팬은 왜 그렇게 잔인해질까?

by 김수철


인스타그램과 브런치스토리를 운영한 지도 어느덧 1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글을 쓰는 행위 자체는 익숙해졌지만, 한 가지 질문은 점점 더 또렷해졌다.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를 좋아하는가.

그리고 팬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성공한 유튜버나 인플루언서를 보면,

결국 그 끝에는 언제나 팬덤이 있다.

그 팬덤은 단순한 구독자 수가 아니라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진다.


스스로 성장하고, 내부 규칙을 만들고,

외부의 공격이 오면 하나로 뭉치고,

그 공격이 사라지면 다시 내부에서 균열이 생긴다.


이쯤 되면 팬덤은

‘사람을 좋아하는 집단’이라기보다

하나의 사회, 혹은 작은 국가에 가깝다.



팬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팬덤을 설명할 때

“매력적인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임상 현장에서 사람을 오래 보다 보니,

이 설명은 항상 반쯤만 맞아 보였다.


대중은 사람 그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대중이 좋아하는 것은 언제나

그 사람을 통해 충족되는 자기 내부의 욕구다.


팬덤이 만들어질 때,

보통 세 가지 심리적 요소가 겹친다.


첫째는 동일시다.

“저 사람은 나와 닮았다”,

혹은 “저 사람은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다”라는 감각.


둘째는 대리 충족이다.

내가 살지 못한 삶,

내가 하지 못한 말,

내가 감히 선택하지 못한 태도를

그 사람이 대신 살아줄 때 사람들은 깊은 만족을 느낀다.


그리고 셋째는 정서적 일관성과 감정적 신뢰다.


대중은 완벽한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떻게 행동할지는 알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

말과 행동의 결이 크게 흔들리지 않고,

도덕적 선을 쉽게 넘지 않으며,

감정의 톤이 예측 가능한 사람.


이 신뢰가 쌓일 때,

관계는 소비를 넘어 정서적 투자로 바뀐다.



팬덤은 정체성 집단이 된다


팬덤이 커질수록 흥미로운 변화가 나타난다.

사람들이 더 이상

“그 사람을 좋아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나는 그 사람의 팬이다”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이 순간부터 팬덤은

‘취향의 집합’이 아니라

정체성 집단이 된다.


“나는 의 팬이다”라는 말은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자기 정의로 이어진다.


이 구조가 만들어지면,

팬덤은 대상을 보호하는 동시에

서로를 평가하기 시작한다.


• 누가 더 오래된 팬인가

• 누가 더 잘 알고 있는가

• 누가 더 가까운 위치에 있는가


겉으로는 같은 대상을 좋아하지만,

내부에서는 서열과 경쟁, 질투가 생긴다.



그래서 팬덤은 ‘적’을 필요로 한다


이 지점에서 팬덤은

놀랍도록 국가와 닮아진다.


외부의 공격이 등장하면

팬덤은 즉시 단일대오로 뭉친다.

내부 갈등은 사소해지고,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라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외부의 적이 사라지면

그동안 눌려 있던 내부 균열이 드러난다.


해석의 차이,

대상의 사소한 선택,

콘텐츠 방향의 변화가

곧 ‘배신’이나 ‘변질’로 읽히기 시작한다.


그래서 팬이었던 사람이

가장 빠르게 안티로 바뀌기도 한다.



팬이 안티로 바뀌는 순간


이 현상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흑백요리사 시즌2 출연 이후 급격한 인기를 얻었던 임성근 셰프의 사례다.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던 이유는

요리를 잘해서만은 아니었다.

과격하나 소탈하고 그러면서도 실력은 있는

‘뭔가 재밌는 어른’이라는 서사가 함께 소비되었다.


이런 인물에게 음주운전 이슈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팬에게 그것은 정체성의 배신으로 경험된다.


그래서 실망은 곧 분노로 바뀌고,

팬은 가장 날카로운 안티가 된다.



그런데, 안티가 거의 보이지 않는 채널도 있다


이쯤 되면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한국 사회에서 안티 없는 사람은 없다.

유재석도, 아이유도 안티가 있다.


그런데 유독

구독자 100만이 넘는 육아 채널들은

눈에 띄는 안티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왜일까.


이 채널은

• 우월한 양육을 제시하지 않고

• 정답을 가르치지 않으며

• 시청자를 평가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공격할 명분을 만들지 않는 위치에 서 있다는 점이다.



‘공격할 명분을 만들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


안티는 감정으로 생기지 않는다.

안티는 언제나 명분으로 움직인다.


“저건 위선이다”

“사람들 가르치려 든다”

“자기 잘난 척한다”


이런 도덕적 언어가 붙을 때,

싫어함은 집단적 공격으로 확장된다.


몇몇 안티 없는 육아채널들은


의도적으로 잘난 척을 하지 않고,

자기 삶을 정답처럼 제시하지 않으며,

비교를 유도할 만한 계층 신호를 최대한 낮춘다.

일상을 보여주되 누군가의 삶을 평가하거나 대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불편함이 생겨도

그 감정은

“내 취향은 아니다”에서 멈춘다.



명분 없이 팬덤을 만드는 것은 가능한가


엄밀히 말하면, 불가능하다.

영향력이란 결국

누군가의 욕망을 건드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안티 없는 채널이 건드린 욕망은

갈등을 낳는 욕망이 아니라

중단을 원하는 욕망이었다.


• 비교를 멈추고 싶다

• 판단을 쉬고 싶다

•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일상을 보고 싶다


이 욕망은 적을 만들지 않는다.

그 대신 조용히 오래 남는 팬을 만든다.



그래서 대중은 누구를 좋아하는가


대중은

가장 옳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가장 똑똑한 사람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대중은

평가받지 않는 상태에서,

그냥 보고 있어도 되는 공간에 머문다.


팬덤은 전략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부산물에 가깝다.


그리고 그 관계는 언제나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이 사람 곁에 있을 때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에서 시작된다.


아마도 그 지점이

팬덤이라는 생명체가 태어나는 자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