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골보석은 위로일까, 애도를 막는 물건일까

by 김수철


최근 보람상조가 유골보석을 만들어주겠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유골의 일부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적절하지 않게 처리해

유가족들과 분쟁을 겪고 있다는 뉴스가 나왔다.


사람들은 분노했다.

그리고 그 분노는

단순한 소비자 분쟁 이상의 감정처럼 보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 역시 계속 머릿속을 맴돌던 질문들을

하나씩 다시 꺼내 보게 됐다.



아주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유골보석은 오래된 장례문화가 아니다.

기술과 소비문화가 결합된

아주 현대적인 발명에 가깝다.


반려동물 문화가 확산되며

펫의 유골을 보석으로 만들어 소지하던 관행이

이제는 사람의 장례로까지 확장된 것이다.


‘유골’이라는 단어의 부정적인 어감 때문에

추모보석, 메모리얼 스톤, 블리스 스톤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제작 과정을 조금만 떠올려보면

유골 전체가 보석이 될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다.


실제로 사용되는 것은 극히 일부이고,

나머지 분골은 반드시 남는다.


그래서 아주 냉정하고

이성적으로만 생각하면

이런 추론은 충분히 가능하다.


“아, 일부만 쓰이고

나머지는 업체가 알아서 처리하겠구나.”


하지만 이 말을 실제로 들었을 때

사람들은 격렬하게 분노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이성의 영역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절대 이성적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추모보석 계약은

전자제품을 사는 계약이 아니다.


이건 기능과 성능을 비교하는 거래가 아니라

상실과 애도를 외주화 하는

정서적 계약에 가깝다.


소비자는 이 과정에서

제조 공정을 계산하지 않고,

법적 처리 절차를 따져보지 않으며,

그저 한 가지만 믿는다.


“그래도 사람의 마지막을 다루는 일인데

최소한의 존엄은 지켜줬겠지.”


사람들이 실제로 분노한 지점은

“유골 일부만 쓴 줄 몰랐다”가 아니다.


그보다는

그 나머지를 어떻게 다뤘는지

상상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가깝다.



그런데, 유골보석은 정말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가


여기서 질문은

한 단계 더 깊어진다.


이런 유골보석이라는 물건 자체가

과연 남은 사람들의 애도에

도움이 되는가?


정신과적으로 이 질문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애도는 ‘잊는 과정’이 아니라 ‘관계를 바꾸는 과정’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5단계 모델은

애도를 설명하는 유일한 정답이 아니다.


현대 애도 이론에서

더 중요하게 다뤄지는 개념은

‘지속적 유대(continuing bonds)’다.


건강한 애도란

고인을 완전히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형태를 바꾸는 과정이라는 관점이다.


이 맥락에서 보면

서구권의 추모 묘지,

우리나라의 제사 문화,

일본의 가정 불단 역시

애도를 병리화하지 않기 위한 장치들이다.



그렇다면 추모보석은 묘지나 사진과 무엇이 다를까


냉정하게 보면

추모보석은

묘지나 사진, 영상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느낌은 다르다.

이상하게.


묘지는 ‘가야 볼 수 있는 기억’이고,

사진과 영상은 ‘꺼내보는 기억’이다.

원할 때 접근하고,

필요하면 거리를 둘 수 있다.


반면 추모보석은

“기억을 몸에 붙이는 물건”에 가깝다.


항상 곁에 있고,

촉각과 무게로 존재를 주장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보석은 변하지 않는다.


이 변하지 않는 물성은

기억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대로야. 너도 그대로 있어.”



기억은 변해야 한다. 그래야 삶이 앞으로 간다


사람의 기억은

본래 점진적으로 변화한다.


잊히기도 하고,

재해석되기도 하며,

삶의 다른 맥락 속으로 편입된다.


그 과정이 있어야

상실은 삶 속에 통합된다.


추모보석은 이 과정을

도울 수도 있고,

막을 수도 있다.


• 애도 초기에 정서적 안정을 돕는

중간 대상이 될 수도 있지만

• 시간이 지나도

감정적 위치를 고정시키는

애도 유예 장치가 될 위험도 함께 가진다


그래서 이 물건은

좋다거나 나쁘다고 단정할 수 없다.



결국 문제는 ‘물건’이 아니라 ‘사용 방식’이다


추모보석이 문제가 되는 순간은

그것이 위로의 상징이 아니라

고인의 대체물이 되어버릴 때다.


불안을 느낄 때마다 만지고,

벗으면 죄책감을 느끼고,

그 물건 없이는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할 때

애도는 멈춘다.


반대로

특정 순간에만 의미 있게 꺼내어

“나는 계속 살아가도 된다”는

허락을 주는 물건으로 기능한다면

그건 분명 도움이 될 수 있다.



마치며


유골보석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아주 개인적인 결론을 말하자면,

내가 만약 심리적으로 취약한 상태라면

유골보석은 선택하지 않을 것 같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보석으로

죽음의 순간을 반복해서 각인시키기보다는,

기억 속에서 서서히 변화하며

시간이 망자를 조금씩 풍화시키는 과정을

받아들이는 편이 더 건강하다고 느껴진다.


우리는 기억을 붙잡기도 하고,

놓아주기도 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간다.


그것이 삶이다.


그리고 때로

유골보석은

그 과정을 막는 물건이 될 수도 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죽은 이들과 이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