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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타레스 Apr 27. 2023

현실을 삼켜버린 가상의 세계에서 허우적 대다

   성큼 다가온 '트롱프뢰유' 기법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신 후 진주성 서문-벽화 거리-인사동 골동품 거리 코스를 산책했다. 며칠이라도 더 보고 싶은데 또 이렇게 지고 마는 벚꽃이 아쉽다. 꽃잎들이 하나 둘, 바람을 타고 핑그르르 돌아 바닥에 내려앉는다. 우리는 진주성 서문에서 맞은편으로 보이는 한 건물로부터 벽화 감상을 하기 시작했다.          

사위는 흩날리는 꽃으로 들떠있고 해는 밝았다. 여유로운 한낮의 산책으로 마음은 몽글몽글해졌다. 여유롭게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가슴을 쫙 펴고 그림을 바라보았다.

응 십장생도네, 응응 진주니까, 알아. 촉석루와 논개네.

그냥 그런 그림들이다 했는데          

       

<현실 세계의 장독대와 가상의 벽돌로 된 담벼락이 조화롭다. 담벼락의 담쟁이덩굴이 바람에 흩날려 떨어질 것만 같다. >


이런 벽화가 나오면서부터 뭔가 심상찮음이 느껴졌다. 현상과 상상이 점점 섞이기 시작하는 '트롱프뢰유'라는 눈속임 기법이 들어가 있다. 대학생들이 그려놓은 건지 완벽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진 못하지만, 현실과 비현실이 조화롭게 잘 녹아들었고 진짜인지, 어디서부터가 가짜인지 구별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출처: <트롱프뢰유 뮤지엄> 제욱시스의 포도그림과 파라시오스의 커튼그림

'트롱프뢰유'란 프랑스어로 눈을 속이다라는 뜻이다. 관객이 실물로 착각할 정도의 정밀하고 생생하게 묘사한 그림을 말한다. 고대 그리스에 살던 화가인 제욱시스, 파라시오스가 세기의 그림 대결을 펼쳤던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생생한 포도 넝쿨 그림에 속아 날아들던 새와, 파라시오스의 커튼 그림에 속은 제욱시스.     

쓰고 보니 황룡사의 벽화를 그렸다던 솔거 이야기와 비슷하다. 그러니까 역사가 아주 오래된 기법이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진짜 사물을 재현하고 복제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겼고 진짜와 똑같을수록 감탄을 자아냈다.      

이 벽화는 실제 벽돌 아래에 가짜 벽돌들이 눈속임을 하고 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모호하게 연결된 것이 호기심을 갖게 한다. 게다가 우그러지는 벽이라니, 다들 놀라워했다.  갈색 물감이 진짜 벽돌이라도 되었다는 듯, 위쪽의 실제 벽돌 패턴을 의뭉스럽게 배턴터치하고 있다.



이런 기법을 소설에 썼던 작가가 있다. 현실인듯하지만 어딘가에서부터 가상이 스며든다. 그런데 조화롭게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작가, 바로 보르헤스다. 보르헤스는 친구 비오이와 어느 별장에서 묶고 있었다. 그날 밤 친구와 일인칭 소설에 대해 논쟁을 하던중 복도 끝 거울이 자신들을 쫓아다니며 노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에 친구는 "거울과 성교는 사람들의 수를 늘리기 때문에 혐오스러운 것"이라는 우크바르의 어느 이교도 지도자의 말을 떠올렸다. 보르헤스가 이 멋진 격언의 출처를 물었더니 <영미 백과사전> 46권 우크바르 항목에서 봤다고 했다. 둘은 이 격언의 완전한 설명을 보기 위해 마침 별장에 있던 <영미 백과사전> 46권을 보았으나 46권에도 47권에도 우크바르는 나오지 않았다.


며칠 후 비오이는 자신의 그 백과사전을 기어이 찾아서 보르헤스에게 가져왔다. 별장의 백과사전 마지막 페이지가 917이었고, 비오이의 것이 921페이지였다. 우크바르에 대한 설명은 비오이의 백과사전 918페이지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 외에 두 개의 백과사전을 여러 번 비교해 봤지만 우크바르가 설명된 4페이지 외에는 어떤 차이점도 찾을 수 없었다. 둘은 우크바르와 관련된 4페이지를 꼼꼼히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백과사전다운 그 글들은 그저 어떤 것들에 관해 설명하는 건조한 글들이었다.

그러나 그 건조함 저변에서 무언가 근본적인 모호함을 발견하는데.

<보르헤스 전집 2, 픽션들.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백과사전의 어디까지가 실재고 어디서부터가 환상인가? 과연 우크바르라는 곳은 실재했던 곳일까? 실재하지 않았다면 누구의 상상인가? 가짜 진주를 가려내며 목걸이를 꿰듯 각 사건들이 조심스러웠다.     




예전의 관심사는 가상이 현실을 얼마나 똑같이 재현하고 있는지에 있었다. 이제는 가상이 현실을 압도한 지 오래되었다. 가상은 현실보다 더 실재적이다. 하이퍼리얼리티를 표방하는 미술가들의 작품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그림들을 많이 봐왔을 것이다. 분명 물감이나 아크릴로 그린 그림인데 육안으로 체험하는 현실 사진보다 더 리얼하다. 살아있는 피와 살을 가진 인간보다 더욱 더 강렬하다.          

     


<하이퍼 리얼리티 작품들> 왼쪽: Fabiano Millani 작, 오른쪽: 핸슨의 '관광객들'




실재보다 더 실제 같은     

이뿐만이 아니다. 실재보다 더 실제 같은 영화도, 소설도, 시뮬레이션도 많이 나와 있다. 인간을 대체할 AI도 계속 계발 중이다. 이미 영상에서의 아바타는 실제 사람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이쯤 되면 무엇이 실재고 무엇이 가상인지를 어떻게 구분해야 할지 걱정이 된다. 그렇게 구분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도 한다.      



우리는 주로 미디어에 의한 가상 체험을 하곤 한다. 알게 모르게 미디어를 움직이는 사람의 생각이나 의도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된다. 나름 이것 저것 재보고 똑똑하게 산다지만 영화 <매트릭스>나 <트루먼 쇼>의 주인공들처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채로 지내다가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은 아닌지. 잠시 비관론에 휩싸이게 된다.  


    

진실을 마주할 것인지살던 그대로 살든지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는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모피어스가 말한다.

 “파란 약을 먹으면 여기서 끝난다. 침대에서 깨어나 네가 믿고 싶은 걸 믿게 돼. 빨간 약을 먹으면 이상한 나라에 남아 끝까지 가게 된다.”     

진실을 마주할 건가? 아니면 살던 대로 살 것인가? 빨간약은 진실을 보여줄 것이고, 파란 약을 선택하게 되면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 세계에서 편하게 살게 될 것이다. 어떤 선택이 옳은 것일까?   


  

빨간약을 먹게 된 네오는 매트릭스의 진실을 점점 알게 되지만 이해하기 힘들다. 내 손에 닿는 물건들의 감촉, 여러 가지 냄새, 혀의 맛 등이 이 세계가 진짜임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것들이 어째서 가짜라는 건지.     

매트릭스 1편의 마지막 장면은 가짜 삶을 살거나 살게 될 우리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빨간약을 먹겠느냐고 묻는다. 영화관을 떠나면서 드는 생각은 두 가지였다.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 지금 이 세계는 누구의 매트릭스인가? 

     

요즘 부쩍 대부분의 시간을 가상세계에서 보낸다. 이따금 진짜라고 생각하는 세계를 경험하는 나로서는 이 둘의 경계가 모호하다. 보다 진짜인 이 곳에서의 현실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것들이 아닐까. 

나무와 꽃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것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 근황과 추억을 이야기하는 것, 남들에겐 쓸모없는 나만의 작은 물건을 한 번 더 쓰다듬는것, 나와 엉기고있는 소소한 시간들에 대해 기록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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