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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팔청춘 Dec 24. 2022

지속 가능성 없는 자본주의

책,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사이토 고헤이/ 다다서재/ 초판 1쇄/ 20201.10.19)

- 지속 가능성 없는 자본주의 -

지난 9월에 한 기사를 접했다. 언젠가 꼭 가고 싶다 생각한 '파키스탄'에 대한 기사였다. 내용은 6월부터 지속된 폭우로 홍수가 났고, 국토의 1/3이 물에 잠겼다는 것이었다. 제목도 자극적이었다. '죄는 부국이 짓고, 벌은 빈국이 받고'였다. 기후변화로 인해 계속된 홍수 피해를 전 세계적으로 온실가스 배출량이 미미한 파키스탄이 받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파키스탄은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의 0.4%를 차지한다.


기후변화는 전 세계적인 위험이다. 하지만, 그 위험이 모두에게 같은 피해를 주진 않는다. 같은 규모라도 선진국은 사회적 기반이 되어 있어서, 견디거나 대비할 수 있다. 하지만 개발도상국은 그렇지 않다. 사회적 인프라가 부족하고, 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 때문에 같은 위험도 더 큰 피해를 입는다. 선진국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기술을 개발한다. 온실가스 배출을 감축하는 기술을 만들고, 인프라를 깐다. 그렇게 선진국의 하늘은 깨끗하고, 공기는 맑고, 온실가스 배출은 낮은 듯 보인다.


책,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는 이것이 선진국의 착각이라고 말하며, 선진국이 자신들의 풍요를 위해 글로벌 사우스에게 위험을 외주화 하는 문제를 지적한다. 외주화를 통해 누리는 제국적 생활양식의 문제라고 말하며, 현재 기후변화 해결을 위해 만들어지는 정책, 기술 개발 등이 대부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자본주의가 근본적으로 환경을 착취하고, 사람을 착취하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 안에서 지속 가능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지속가능발전목표(SDGs)'와 '그린 뉴딜'은 모두 사람들의 눈을 가리는 안대일 뿐이다. 이유는 해당 이슈들이 모두 경제성장과 기후변화 혹은 환경위기 극복을 동시에 이룰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린 뉴딜이 일어나서 기후변화를 온실가스 배출을 낮추는 기술이 개발된다고 해도, 경제성장과 온실가스 배출의 디커플링이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태양광을 깔아서 석탄 발전에 비해 탄소배출이 적은 전기를 생산할 순 있지만, 태양광 패널을 만들기 위해 채굴되는 자원과 선진국까지 넘어오는 모든 과정을 살펴보면 결코 탄소 배출이 디커플링 되지는 않는다.


진정한 기후변화 해결이 되기 위해서는 경제성과과 온실가스 배출이 역행하는 '절대적 디커플링'이 일어나야 한다. 하지만 전 주기로 보면 절대적 디커플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린뉴딜과 SDGs는 모두 마치 이 기술이 개발되고, 이 문제가 해결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듯이 사람들을 안심시킨다. 집에 불이 난 듯 움직여야 나아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텀블러와 에코백을 사용한다고 해서 기후변화가 해결되는 것이 아닌데, 마치 두 개를 사용해서 안심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또한 성장과 환경위기는 동일하게 가는 것이 자본주의의 속성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때문에, 탈성장을 추구해야 하며, 그 방법으로 마르크스가 말년에 꿈꿨다고 하는 코뮤니즘이다. 쉽게 말하면 시민들이 직접 얼마나 생산할지 결정하고, 부족한 걸 서로 채우는 사회를 말한다. 성장만을 쫓는 자본주의 안에서는 지속 가능한 성장이나 발전은 존재하지 않으니, 탈성장을 추구하고 말년에 마르크스가 말한 코뮤니즘으로 방향 선회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해답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 역시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하지만, 정작 어떻게 나아가야 한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물론 문제의식은 공감한다. 실제 연간 온실가스 배출량을 보면 몇몇 선진국이 차지하는 비율이 개도국에 몇 십배는 더 많다. 선진국 반열에 오른 우리나라에 사는 나 역시 내가 누리는 전기, 편의가 모두 우리나라에서만 이루어진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개도국 어딘가의 누군가가 몇 푼 안 되는 돈을 받으며 일한 대가를 내가 혜택으로 누리는 것이다. 나 역시 전 지구적 문제의 원인이라는 점에 공감하고 동의한다. 또한 그린 뉴딜만으로는 절대로 기후변화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도 공감한다. 나 역시 기술만 믿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그 기술이 완성되기 전에 지구가 없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의 대안이 과연 현재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지는 물음표다. 세계는 이미 세계화되어 있다. 저자가 말하는 코뮤니즘을 내가 정확히 이해했다면, 전 세계 사람들이 이 문제에 공감하고 행동해야 한다. 마지막 즈음에 말한 것처럼 전 세계 3.5%가 행동하면 정말 변화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바람으로 저자 역시 해당 내용을 언급했을 것이다.


문제는 현실성이다. 저자가 그린뉴딜로는 절대적 디커플링이 일어나기 어렵고, 현재의 기술 속도로 가면 기술이 완성되기 전에 지구가 망한다고 지적한 것처럼 저자의 대안 역시 시간적인 면에서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언제 그 많은 사람을 설득해서, 납득시키고, 이해하게 하고, 행동하게 할까. 더군다나 선진국들이 과연 그렇게 행동할까도 의문이다. 스스로 자신들이 받는 혜택을 놓으라는 것인데, 기후위기가 대두되니 이제 그 혜택을 놓아라라고 말한다고 설득될까 싶다. 물론 이 때문에 제국적 생활양식을 말하며, 문제의 외주화를 말한 것일 테지만. 물론 나 역시도 정답이 없다. 그린 뉴딜도, 저자의 대안도 모두 함께 진행되어야 하는 것 같다. 


밑줄

- 글로벌 사우스란 자본주의의 세계화로 인해 피해를 입고 있는 지역과 그곳의 주민들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다. 사실 글로벌 사우스가 끌어안고 있는 문제들은 예전부터 '남북문제 North-South Problem'라고 불려 왔다. 다만 신흥국이 대두하고 선진국으로 이민이 증가하면서 '남북' 격차는 지리적 위치와 상관없는 문제가 되고 있다.(p.25)


- 자본주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선진국의 풍요로운 생활 이면에서는 남북문제를 포함하여 수많은 비극이 벌어졌다. 이른바 자본주의의 모순이 글로벌 사우스에 응축된 것이다.(p.25)


- 멀리 지구 반대편인 멕시코와 블라질에서 벌어진 사건에 우리의 관심이 미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치부하는 독자도 분명 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인재'에는 우리 '선진국 사람들'더 분명히 가담해 왔다.(p.26)


- 자동차에 쓰이는 철, 가솔린, 옷을 만드는 섬유, 저녁 식탁의 소고기 등이 모두 그 지구 반대편에서 우리에게 온 것들이다. 글로벌 사우스에서 노동력을 착취하고 천연자원을 수탈하지 않으면 우리의 풍요로운 생활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p.26)


- 제국적 생활양식이란 간단히 말해 글로벌 노스의 대량 생산˙대량 소비 사회를 가리키는 것이다. 제국적 생활양식은 선진국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풍요로운 생활을 실현해주기 때문에 보통 바람직하고 매력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글로벌 사우스의 사회집단과 지역에서 벌어지는 수탈, 나아가 우리가 누리는 풍요로운 생활의 대가를 글로벌 사우스에 떠넘기는 구조가 존재한다.(p.27)


- 문제는 수탈과 대가의 전가 없이는 제국적 생활양식이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글로벌 사우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조건이 악화되는 것은 자본주의의 전제 조건이며, 남북 사이의 지배종속 관계는 예외적 사태가 아니라 '평상시 상태'인 것이다.(p.27)


- 또 다른 본질적 측면, 그것은 지구 환경이다. 자본주의가 착취하는 대상은 주변부의 노동력뿐 아니라 지구 환경 전체인 것이다. 선진국은 자원, 에너지, 식량 모두 '부등가 교환'을 하면서 글로벌 사우스에서 앗아가고 있다. 인간을 자본 축적의 도구로 사용하는 자본주의는 자연 역시 약탈한 대상으로 여긴다. 이것은 이 책의 기본적인 주장 중 하나다. 지금 같은 사회 시스템이 무한한 경제 성장을 목표하면 지구 환경은 위기 상황에 빠질 수밖에 없다. 당연한 귀결이다.(p.31)


- 중심부 사람들이 누리는 저렴하고 편리한 생활의 이면에 주변부에서 이뤄지는 노동력 착취만 있는 것은 아니다. 주변부 자원의 약탈과 그에 따른 환경 부하의 전가 역시 빠뜨려서는 안 된다.(p.32)


- '외부화 사회'라는 개념으로 선진국을 규탄한 레세니히에 따르면, '어딘가 먼 곳'의 사람과 자연환경에 부담을 전가하고 그 진정한 비용은 떼어먹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누리는 풍요로운 생활의 전제 조건이다.(p.32)


- 제국적 생활양식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그러나 그 폭력성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p.33)


- 환경 위기라는 말을 듣고 많은 이들이 면죄부를 구하듯 에코백을 '구입'할 것이다. 하지만 그 에코백조차 디자인이 바뀌며 차례차례 신재품이 발매되고, 광고에 끌린 사람들은 이미 에코백이 있음에도 새로운 것을 구입해 버린다. 그리고 면죄부가 안겨주는 만족감 때문에 에코백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의 사람과 자연이 폭력에 노출된다는 사실에는 점점 무관해진다. 자본의 속임수인 그린 워시는 바로 이렇게 사람들을 구워삶고 있다.(p.33)


- 환경오염을 줄이면서 경제 성장도 이루었다고 선진국이 자축하는 것이야말로 '오류'다. 선진국의 환경오염이 개선된 것은 단순히 기술 발전에 의한 결과가 아니며, 자원 채굴과 쓰레기 처리 등 경제 발전에 따라오게 마련인 부정적 영향의 적지 않은 부분을 글로벌 사우스라는 외부로 떠넘긴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국제적인 전가를 무시한 채 선진국이 경제 성장과 기술 발전으로 환경 문제를 해결했다고 믿는 것이 바로 '네덜란드의 오류'다.(p.35)


- 인류의 경제 활동이 전 지구를 뒤덮은 '인신세'란, 수탈과 전가를 하기 위한 '외부가 모두 소진된 시대'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p.35)


- 그간 자본은 석유, 토양 양분, 희소금속 등 쓸모가 있는 것이라면 죄다 쥐어짜왔다. 이런 '채굴주의'는 지구에 큰 부담을 지울 수밖에 없다. 자본이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필요한 '저렴한 노동력'이라는 미개척지가 더 이상 없듯이, 채굴과 전가를 위해 필요한 '저렴한 자연'이라는 외부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p.35~36)


- 자본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 자본은 무한한 가치 증식을 목표하지만 지구는 유한하기 때문이다. 외부를 모두 소진하면 지금껏 해왔던 방식이 통하지 않게 된다. 위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신세의 위기'의 본질이다.(p.36)


- 기후 케인스주의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희망'이다. 기후 변화를 호기로 삼으면 지금까지 해온 것 이상의 경제 성장이 이어질 수 있다는 '희망' 말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기후 케인스주의에 근거한 '녹색 성장'이야말로 자본주의가 '평상시'를 유지하기 위한 '마지막 보루'가 된 것이다.(p.61)


-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기후 케인스주의가 말하는 새로운 성장과 지구의 한계가 양립할 수 있을까? '녹색'이라는 말로 치장했지만, 탐욕스럽게 끝없이 성장을 추구하다 보면 결국은 지구의 한계를 넘어버리지 않을까?(p.63)


- 보통 '경제 성장'에 따라 '환경 부하'는 증가하게 마련이다. 그동안 연동해서 중대되었던 두 현상을 새로운 기술을 이용해 서로 떼어내는 것이 바로 디커플링이다. 즉, 경제가 성장해도 환경 부하가 커지지 않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기후 변화와 관련한 디커플링이란, 신기술을 개발하여 경제 성장과 이산화탄소 배출량 삭감을 동시에 실현하는 것이다.(p.65~66)


- 203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반감하고, 2050년까지는 0으로 줄여야 한다. 즉, 앞으로 10년에서 20년 사이에 기후 변화를 멈출 만큼 '충분한 절대적 디커플링'이 가능한지가 관건인 셈이다.(p.69)


- 왜 불가능할까? 디커플링에는 단순하고 강고한 딜레마가 따라붙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이 순조로울수록 경제 활동의 규모는 커지게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자원 소비량이 늘어나고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자원 소비량이 늘어나고 이산화탄소 부출량을 줄이기 어려워진다. 경제 성장과 이산화탄소 삭감 중 무엇도 선택하기 힘든 딜레마와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p.69)


- 요약하면, 녹색 성장이 잘 풀리는 만큼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증가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욱 극적인 효율화를 목표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경제 성장의 함정'이다. 우리가 이 함정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p.69)


- 오늘날에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신기술이 개발되어 효율성이 높아져도, 상품이 그만큼 저렴해지는 바람에 결국은 소비가 증가하는 현상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 이를테면 텔레비전은 갈수록 전력 소모가 적은 제품이 출시되고 있지만, 사람들이 더 큰 텔레비전을 구입하는 탓에 전체적인 전력 소비량은 외려 증가하고 있다. SUV 같은 대형차 판매가 늘어나서 자동차의 연비 향상이 무의미해지는 것도 같은 역설에 해당된다. 신기술 덕에 효율성이 올라가 '상대적 디커플링'이 일어나는 듯해도 소비량이 증가하여 효율화 효과가 상쇄되고 무의미해지는 것이다.(p.78)


- 또한 효율화 덕에 어느 부문에서 '상대적 디커플링'이 일어나도, 절약된 자본과 수입이 에너지와 자원을 더욱 많이 소비하는 상품의 생산과 판매에 쓰여서 절약이 의미 없어지기도 한다. 가령 가정용 태양광 패널이 저렴해져서 아낀 돈으로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갈지도 모른다. 기업 역시 잉여금이 생기면 새롭게 투자할 만한 곳을 찾을 것이다. 새로운 투자처가 친환경적일 것이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을까.(p.78)


- 국제 무역이 미치는 영향을 반영하여 재료 발자국을 계산해 냈다. 재료 발자국이란 소비된 천연자원을 가리키는 지표다.(p.87)


-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선진국에서도 경제 성장과 재료 발자국 사이에 디커플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분명히 선진국의 국내 물질 소비량은 감소하고 있지만, 수입하는 자원의 재료 발자국을 더해보니 각국의 재료 발자국은 실질 GDP와 비슷한 정도로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판명된 것이다. 선진국에서 일어난 상대적 혹은 절대적 디커플링은 그저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며, 오히려 최근 몇 년 동안 일어난 것은 GDP와 재료 발자국의 '리커플링(재결합)'이었다.(p.87~88)


- 어느 관점에서 보든 지금 같은 경제체제에 지속 가능성이 없음은 분명하다. '충분한 절대적 디커플링'만 어려운 게 아니다. 일부에서는 '순환경제'가 지속 가능한 사회를 실현할 것이라고 기대를 부추기지만, 그 역시 그릇된 길로 이끄는 것이다. 재활용 등을 활용해 자원을 순환시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자원 소비량 그 자체를 근본적으로 줄여야 한다.(p.89)


- 자본주의적인 '녹색 성장'을 추구하는 선진국의 기후 케인스주의가 도달할 미래는 어둡다. 자국 내에서는 '녹색'을 칭송하는 경제 정책이 실행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주변부에서는 갈수록 약탈이 심각해지고 있다. 주변부의 약탈이 중심부가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조건이 되어버린 것이다.(p.89)


- 여전히 전기자동차와 재생에너지로 기존의 것을 100퍼센트 대체하겠다는 기후 케인스주의의 주장이 매력적으로 들릴지 모르겠다. 왜 그럴까? 기후 케인스주의가 우리의 제국적 생활양식을 바꾸지 않아도 — 즉, 아무것도 안 해도 — 미래를 지속가능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기 때문이다. 록스트룀의 말을 빌리면, 그야말로 '현실도피'다.(p.91)


- 구세대 탈성장파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외부화하거나 전가하지 말자, 자원을 수탈하지 말자, 기업의 이익보다 노동자와 소비자의 행복을 우선하자, 시장 규모도 지속 가능한 수준으로 축소하자. 이런 주장은 분명히 간편한 '탈성장 자본주의'다. 이 주장의 문제는 이윤 추구도, 시장 확대도, 외부화도, 전가도, 노동자와 자연을 수탈하는 것도, 전부 자본주의의 본질이라는 사실이다. 그 본질을 전부 그만두고 감속하라는 말은 사실상 자본주의를 때려치우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p.133)


- 이윤을 획득함으로써 경제를 성장시키는 자본주의의 본질적 특징을 없애는 동시에 자본주의를 유지하길 바라는 것, 이 바람은 '둥근 삼각형'을 그리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야말로 '공상주의'인 것이다. 이것이 구세대 탈성장론의 한계다.(p.133)


- 생태근대주의에 기초한 지구공학과 역배출 기술 등 화려해 보이는 기술이 약속하는 미래란, 화석연료를 불태우며 했던 지금까지의 생활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다. '꿈의 기술'들의 화려함은 계속 현상 유지 status quo를 하는 것이야말로 부조리하다는 진정한 문제를 은폐해 버린다. 기술 자체가 현재 시스템의 부조리를 감추는 이데올로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세계적 위기를 앞둔 상황에서 전혀 다른 생활양식을 만들어내어 탈탄소 사회로 이행할 가능성을 억압하고 배제하는 것이 바로 기술이라는 말이다.(p.229)


- 우리에게는 '3.5퍼센트'라는 수치가 있다. 무슨 수치인지 아는 사람이 있을까. 하버드대학의 정치학자 에리카 체노웨스의 연구진에 따르면 '3.5퍼센트'의 사람들이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들고일어나 진심으로 저항하면 반드시 사회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고 한다.(p.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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