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좋은 불평등>
좋은 불평등
(최병천/ 메디치/ 초판 4쇄/ 2022.11.11)
- 불평등을 보는 새로운 관점 -
모든 건 양면을 가진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앞모습이 있으면 뒷모습이 있다. 이 말들은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점이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다면, '불평등'에도 양면이 존재할까? 불평등에도 좋은 게 있고, 나쁜 게 있을까?
책, <좋은 불평등>은 30년 동안 우리나라와 세계의 변화를 짚어보며, 우리나라의 불평등이 언제부터 발생했는지, 그 원인은 무엇이었는고, 불평등 해결의 대안은 무엇일지 다루는 책이다. 책의 제목처럼 그 내용도 새롭고, 신선하다.
저자가 제목으로 삼은 '좋은 불평등'은 쿠즈네츠 곡선의 전반부를 말한다. 쿠즈네츠 곡선은 처음 경제가 성장하는 단계에서는 불평등이 증가하지만, 정점을 찍고 성장세가 둔화되는 시점에서는 오히려 불평등이 줄어든다는 이론이다. 성장세가 정점을 찍는 해를 기준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라 나뉘는데, 이때 전반부를 저자는 좋은 불평등이라고 말한다.
사실 쿠즈네츠 곡선은 처음 제안한 쿠즈네츠 조차 완벽하지 않다 말하고, 현대 경제학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불평등을 논하는 책에서 이 부분이 나온 게 재밌었다. 이렇게 옛것을 되살려 쓰기 위해서는 후반부의 근거나 제안이 탄탄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후 한국 불평등의 원인과 문제점과 그간 해결책들의 문제점과 본인의 대안을 내놓는다.
저자는 한국의 불평등 진단부터가 틀렸다고 말한다. 많은 언론, 학자, 정치인들이 우리나라 불평등이 1997년 IMF 외환위기에서 시작됐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를 비판한다. 우리나라 불평등이 시작된 시점은 1994년부터이고, 이 불평등이 시작된 이유는 1987년의 국내변화, 1992년의 세계 변화 특히 중국의 변화가 있었다고 말한다.
1987년 국내 변화는 노동자 대투쟁으로, 최저임금이 급격히 상승하고, 기업별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시점이다. 민주화 운동이 있었고, 노동권 탄압으로 부터 기본권을 쟁취한 해이기도 하다. 박정희, 전두환 군부 독재부터 이어져온 체제를 끊어낸 해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때의 공이 아이러니하게 불평등의 시작을 알렸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잦은 노사 분규로 개개인의 임금은 올라갔지만, 생산성은 줄었기 때문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기업의 위기로도 이어진다. 그리고 이 문제의 탈출구가 될 세계적 변화가 발생한다. 1992년 중국 덩샤오핑의 남순강화와 한∙중 수교다.
덩샤오핑의 남순강화로 중국은 사회주의 경제모델을 채택한다. 문을 개방하고, 외국이 중국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중국은 낮은 임금과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노동력을 갖춘 나라였다. 기업에겐 매력적인 나라였다. 1992년 당시 정권인 노태우 정권은 지지기반이 약했던 탓에 적극적인 액션이 필요했다. 그것은 중국과의 수교로 이어졌고, 우리나라 기업이 직접 중국에 투자하도록 길이 열린 것이다. 그리고 이 길은 급격한 임금 인상과 노사분규로 애를 먹던 우리나라 기업에게는 숨통이 트일 해방구였다. 반대로 말하면, 국내 노동자들에겐 해방의 비극이었다.
중국에 직접 공장을 세우고, 투자하며 국내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이직을 한다. 그 이직처는 내수 시장 일자리였다. 내수시장은 그 한계가 이미 명확한 시장이다. 인구가 제한되어 있고, 땅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내수 중심 일자리는 성장의 한계가 있다. 반면, 수출은 그렇지 않다. 글로벌 차원으로 길이 열려있고, 성장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결과적으로 수출을 하는 기업들은 성장했고, 이곳 일자리에 속한 사람들은 임금이 올라갔다. 또 그 결과 우리나라 GDP 증가와 1인당 GDP 증가까지 나타났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여기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은 내수 일자리로 몰렸다. 내수는 시장성이 한정되어 있다. 이때의 상황은 우리나라 중산층이 얇아지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건, 수출 중심 산업에 속한 사람들은 상층으로 올라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층으로 내려갔다는 점이다. 저자는 '상층 대비 하층의 소득 격차'를 불평등으로 정의한다. 수출이 잘되면 불평등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상층에 속한 사람들이 돈을 더 벌기 때문이다. 한편, 이런 불평등이 줄어드는 시점이 있다. 바로 수출이 작살날 때다. 2008년 금융위기가 대표적인데, 이때 불평등이 늘어났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지만 실제로는 줄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상층의 소득이 줄었기 때문이다. 밑이 변한 게 아니라, 위가 변해서 줄어든 불평등이었다.
위 이야기들은 한국의 언론, 정치, 지식인들이 어떻게 불평등을 잘못 진단했는지를 보여준다. 이 진단이 잘못됐기에, 그 대안도 잘못된 대안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도 대표적 사례가 문재인 정부가 주도한 소득주도성장과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이었다.
저자는 문재인 정부의 대안이 '자본가=부자=적폐'라는 등식과 '서민=노동자=좋은 집단'이라는 등식을 기저에서 두고 있다고 말한다. 그 때문에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을 공약으로, 급진적인 임금 인상을 일궈냈다고. 하지만, 이로 인해 불평등은 증가했다. 급격한 임금인상으로 버티지 못한 내수 시장 일자리가 작살났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내수시장은 경제성이 명확한 곳들이라, 그 한계가 명확한데 이걸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점은 사회의 진짜 하층이 누구인지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저자가 말하는 진짜 하층은 노인이다. 특히 75세 이후 후기 노인이다. 이들은 비노동 집단이다. 즉 일을 할 수 없는 집단인 것이다. 이들은 소득이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하층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은 진짜 하층을 위하지 않고, 오히려 하층의 위 집단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마저도 이들을 작살낸 조치였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진짜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서 저자는 진짜 하층인 노인을 위한 지원을 해야 하며, 노인일자리, 기초연금 등 정책을 제대로 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하층의 소득이 올라가서 불평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저자가 말하는 불평등은 상측과 하층의 소득 격차다. 이 격차를 메우기 위해 노인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여러 면에서 흥미로운 책이다. 불평등의 시작이 어느 때부터인지 파악한 것도 유익했고, 그 시작이 국내 요인만이 아니라 국외 요인도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 게 흥미로웠다. 또한 후기 노인을 비노동 집단으로 인식하게 한 점도 좋았다.
하지만 불평등의 고착화는 제대로 다루지 않아서 아쉬웠다. 불평등이 줄어들지 않은 이유는 한국의 세습문화와 구조적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늘어가는 불평등이 좋은 불평등이라고 해도, 그 좋은 불평등이 이루어지는 기간 동안 그 격차를 메울 수 있는 도구와 자본 역시 멀어진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갑/을의 구조적 문제도 다루지 않았다. 이런 점 역시 불평등을 고착화시키는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은 지적하지 않고, 단순히 좋은 불평등이라고 퉁치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 한편으로 수출의 영향으로 우리나라 불평등이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이라면 이 불평등은 결코 해결하지 못하고 체념한 채 계속 가져가야만 한다는 느낌도 받았다.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불평등 관점을 보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 불평등이 바람직한지 아닌지는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경제성장과의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p.36)
ㄴ> 불평등은 그 자체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경제성장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는 말은 동의한다. 저자는 불평등에도 좋은 게 있고, 나쁜 게 있다고 말한다. 그 근거는 쿠즈네츠 곡선이다. 경제가 성장하는 시점에서는 불평등이 증가하지만, 최고점에 이른 뒤부터는 불평등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저자는 전반부의 불평등을 좋은 불평등이라 말한다. 이렇게 보면 경제 성장과 불평등은 필연인 듯 보인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하층을 형성한 사람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결코 위로 올라갈 수 없다는 점이다. 자본과 자원을 상층이 거의 점령하고, 하층이 쟁취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전반부의 불평등이 좋지 않은 이유다. 경제 성장이 상층과 하층의 격차를 더 벌리며, 중간 사다리마저 끊어내기 때문이다.
- 많은 지식인의 오해와 달리 한국경제 불평등의 시작점은 1997년 외환위기가 아니다. 1994년부터 시작됐다. 이는 한국경제 불평등이 1997년 외환위기가 아닌 다른 요인에 의해 시작됐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해, 국내적 사건과 국제적 사건 3가지가 맞물려서 작동했다. 3가지 사건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1992년 1~2월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1992년 8월 한∙중 수교다.(p.59)
ㄴ> 신선하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나라 불평등이 언제 시작됐는지 제대로 탐구해보지 않았다. 그저 1997년 외환위기라고 생각했다. 국내외 변화 때문이라는 부분이 매우 새롭다.
- 1987년부터 1992년까지는 대구모의 노사분규로 인해 인건비가 '급상승한' 상태였다. 당시 한국 제조업은 저임금노동력에 기반한 수출 중심 모델이었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노동 기본권을 탄압했던 이유는 2가지였다. 하나는 냉전 반공주의적 사고방식의 연장이었다. 노동조합 설립 시도는 그 자체로 빨갱이 취급을 받았다. 다른 하나는 수출 시장에서 가격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노동조합을 빨갱이로 몰아야 노동조합 설립을 막고, 임금을 억제하고, 국제적인 가격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유리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노동운동의 활성화는 '박정희식 노동 체제'를 해체시켰다.(p.70)
ㄴ> 맞다. 인건비가 상승했다. 하지만 그렇게만 판단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긴 시간 탄압을 받았던 걸, 돌려받았던 게 아닐까 싶다. 저자가 말하듯, 국가 재건과 먹고살고,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가격 경쟁력 확보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탄압이 일어났다. 이런 탄압은 국민의 동의가 없었다. 군사 쿠데타로 잡은 정권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것이 폭발해 1987년 투쟁이 일어났다. 물론 이것이 현재의 불평등을 만든 원인이라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모든 건 양면이다. 빛이 생기면, 그림자도 생긴다.
-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대규모 임금인상과 잦은 노사분규는 기업 입장에서 '경쟁력 위기'를 의미했다. 한국 기업의 경쟁력이 급격히 약화되던 그 시점에서 중국에서는 덩샤오핑에 의한 남순강화가 있었다. 1992년 중국공산당은 제14차 당 대회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 노선'을 채택했다. 마침 그 시기에 노태우 정부는 취약한 지지율을 돌파하기 위해 북방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1992년 8월 24일 한국과 중국은 드디어 수교를 맺는다. 3가지 사건이 드디어 만나게 됐다.(p.70~71)
ㄴ> 우리나라는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수출 중심 경제 국가다. 국제 사회 변화에 취약하다. 만약, 불평등 역시 그런 것이라면 사실상 우리나라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는 건 아닐까 생각도 된다.
- 한∙중 수교가 체결되자, 인건비 인상으로 수익성 압박을 받던 저숙련∙저임금 기반의 한국 자본가들에게 중국 공산주의는 '자본의 해방구'가 된다. 저임금∙저숙련 기반의 한국 자본가들은 일당 독재의 나라 중국 공산주의로 피난을 간다. 더 낮은 임금을 찾아서.(p.71)
- 1992년 8월 한∙중 수교 이후 저기술∙제조업 분야에서 한국은 중국에게 가성비 경쟁에서 밀리게 된다. 저기술∙제조업 분야에서 한국이 중국에 밀리는 과정은 2가지 경로로 작동했다. 하나는 한국의 저기술∙제조업 공장이 중국으로 이전한 경우다. 이는 중국에 대한 한국의 FDI 급증으로 확인된다. 다른 하나는 국제무역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게 된다. 한국에 공장이 남아 있더라도, 가성비 경쟁에서 중국을 이길 수 없었다.(p.73)
- 섬유∙가죽∙신발산업에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중략) 도∙소매업, 숙박∙음식업, 부동산 임대업으로 이동했다. 도∙소매업, 숙박∙음식업의 취업자 증가율은 무려 70%에 육박한다. (중략) 도∙소매업, 숙박∙음식업, 부동산 임대업은 서비스업이자 동시에 '비교역재' 분야에서 새로 생긴 일자리다. 다시 말해, 내수산업 일자리다.(p.76~77)
ㄴ> 우리나라는 인구 규모상 내수로만 먹고살 수 없다. 내수로만 먹고살기 위해선, 최소 1억 명의 인구가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그 절반을 약간 넘는 정도다. 때문에 수출을 해야 하고, 글로벌에 진출할 수밖에 없다. 즉, 내수시장은 그 한계가 명확하다는 점이다. 또한, 내수 시장용 일자리를 갖춘 사람의 경제성 역시 그 한계가 명확할 수밖에 없다.
- 한국경제 불평등을 제대로 조망하기 위해서는 그 시야를 세계사와 세계경제사로 확대해야만 한다. 세계사와 한국사가 만나는 접점, 세계경제사와 한국경제사가 만나는 접점에서 우리가 겪어야 했던 환경 변화를 찾아내야 한다. 한국경제 불평등은 '국내적' 원인으로만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p.79)
- 한국경제 불평등이 시작되는 단 하나의 사건을 꼽으라면, 1992년 8월 24일 한∙중 수교 체결이다. 한∙중 수교는 중국경제의 부상이 한반도에 상륙한 의미를 가졌다. (중략) 1992년 체제는 1987년 체제와 1997년 체제에 비해 정치∙경제∙사회∙문화∙외교∙안보에 이르기까지 매우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많은 지식인이 1997년 체제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들의 상당수는 1992년 체제 때문이었다. 한국경제의 불평등 확대, 대기업∙중소기업으로 갈라지는 기업 규모의 양극화, 중화학공업∙경공업의 양극화, 수출∙내수의 양극화, 제조업∙서비스업의 양극화, 노동시장 불평등, 경제적 이중구조, 노동시장 이중구조, 자본의 이중구조, 중소기업의 수출 비중 감소, 중간 허리층 기업의 정체 및 약화, 상층 10%의 소득집중도 급증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p.79~80)
- 불평등을 직관적으로 정의하면 '하층 소득 대비 상층 소득의 격차'다. 불평등에 대한 중립적 표현은 '격차' 그 자체다. 불평등 개념을 이렇게 정리할 경우, 불평등이 증가하는 경우는 3가지다. ① 상층 소득이 오르는 경우, ② 하층 소득이 떨어지는 경우, ③ 중간층이 얇아지는 경우다. 불평등이 하락하는 경우도 3가지다. ① 상층 소득이 떨어지는 경우, ② 하층 소득이 오르는 경우, ③ 중간층이 두터워지는 경우다.(p.109)
- 1994년 불평등 미스터리는 '중간층이 얇아진 경우'였다. 세계경제사에서 중국경제의 등장으로 인해 한국의 저기술∙노동집약적∙수출∙제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대량으로 사라졌다. 이들은 제조업에서는 하단에 존재하지만 전체 취업자 구조에서는 중간소득층에 해당했다. 1994년 이후 불평등이 커진 것은 1990년대 이후 글로벌 자본주의의 환경 변화로 인해 '중간층이 지속적으로 얇아지는' 일이 벌여졌기 때문이다.(p.109)
- 경제학적으로 볼 때 수출, 투자, 성장, 고용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수출이 잘되면 투자가 늘어난다. 투자가 늘어나면 성장률이 높아진다. 투자와 성장률이 높아지면 고용이 창출된다. 이는 한국경제에서도 고스란히 작동하고 있다. 문제는 불평등이다. 수출이 잘되면 불평등은 증가한다. 반대로 수출이 작살나면 불평등은 줄어든다. 수출, 투자, 성장, 고용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실은 불평등도 연결되어 있다. 다만,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p.112~113)
- 왜 국제무역이 위축되고 수출이 축소되면 한국경제 불평등이 축소되는 것일까? 그 이유는 크게 3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한국경제는 수출 비중이 매우 크고 수출의 낙수효과가 여전히 매우 강력하기 때문이다. (중략) 둘째, 한국경제에서 수출은 대기업∙제조업∙고임금∙고소득과 연결되어 있다. (중략) 셋째, 수출∙제조업∙대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체계가 본질적으로 '수출연동형' 임금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p.113~115)
ㄴ> 수출이 작살날 때 불평등이 줄어드는 이유는, 상층의 임금이 줄기 때문이다. 즉 상층의 임금이 줄어서 하층은 가만히 있어도 격차가 메워지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불평등이 줄어드는 것은 맞겠지만, 바람직한 불평등 개선 방법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하층의 능력을 끌어올려 격차가 줄어드는 게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 2007년 중국의 중간재 자급률은 77.1%였다. 2017년 중국의 중간재 자급률은 87.2%가 됐다. 불과 10년 만에 중국의 중간재 자급률은 10.1% p 향상됐다. 중국이 중간재를 국산화하고, 자급률을 높이는 과정은 동시에 중국에 대한 한국의 중간재 수출이 그만큼 쇠퇴하게 됨을 의미했다.(p.151)
ㄴ> 중국에 대한 수출이 줄면 불평등은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만 보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너무 단편적인 이슈로만 우리나라의 불평등이 준다, 는다를 말하는 게 맞는 것인지? 물론 불평등을 소득 격차로만 한정한다면, 맞는 말일 수 있다. 하지만 상층과 하층의 힘, 권련, 도구 등등의 차이까지 넘어간다면 이렇게 단편적인 것으로만 판단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 경제위기가 발생하면 항상 불평등이 커진다는 발상 역시 사실이 아니다. 불평등이 커지는 경제위기가 있고, 오히려 불평등이 줄어드는 경제위기가 있다. 2008~2009년 경제위기는 '불평등이 줄어드는' 경제위기였다.(p.161)
ㄴ> 상층의 소득이 작살났기 때문이다.
- 경제 불평등에 관한 정치적 실천이 성공하려면 2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실천에 대한 강력한 의지와 역량을 가진 대통령이다. 다른 하나는, 불평등에 대한 원인 분석과 정책 처방에 관한 올바른 이론이다. 전자는 실천에 관한 것이고 후자는 이론에 관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론은 실천의 실패 이전에 '이론의 실패'였다.(p.163)
ㄴ> 저자가 지적하는 실패는 하층을 제대로 선별하지 못한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진짜 하층은 소득이 조금이라도 있는 저소득층이 아니라, 소득이 아예 없는 노인들이다. 특별히 75세 이후 후기 노인이다. 이들을 지원한 게 아니라, 이들 위 계급을 지원했기에 결과적으로 불평등이 증가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 하층은 누구인가? 이 질문이 가장 중요하다. 결론부터 말해, 하층은 노인이다. 하층은 저임금노동자가 아니다. 노인 소득을 끌어올리면 불평등은 줄어든다. 저임금노동자 소득을 끌어올리면 불평등이 줄어들 수도 있고, 거꾸로 늘어날 수도 있다.(p.203)
- 한국적 현실에 맞는, 불평등과 계급의 통합적 인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노동'의 재발견이다. 한국 사회에서 비노동은 하나의 계급이다. 이들이 불평등의 최하단이고 우리 사회 하층의 진짜 실체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비노동은 누구인가? 바로 노인이다. 다르게 말하면, 불평등과 계급의 통합적 인식에서 가장 중요한 이론적 과제는 노인을 하나의 계급으로 재인식하는 것이다.(p.218)
- 마르크스주의는 사회과학적 이론체계를 가지지만 대중적으로는 로빈후드적 세계관과 깊은 친화력을 가진다. '자본가=부자=적폐'의 등식이 성립된다. 자본가는 나쁜 집단, 노동자는 좋은 집단이다. 부자는 나쁜 집단, 서민은 좋은 집단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부자를 억누르고 서민들을 도와야 한다는 억강부약의 정서와도 연결된다. 진보정당을 포함한 한국 진보세력의 주요 정책 중에 부자 및 대기업에게 무거운 책임을 씌우는 것이 많은 이유다. 민간기업 CEO의 연봉 상한액과 법정 최저임금을 연동하는 최고임금제법을 주장하거나 법인세 인상을 주장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p.220)
- 저임금노동자들이 저금임인 이유는 사업주가 악덕 자본가여서가 아니었다. 저임금노동자가 저임금인 이유는 저부가가치 사업장이었기 때문이다. 사업주 입장에서 돈을 적게 벌어서, 급여가 적었던 것이다.(p.225)
ㄴ> 문재인 정부가 주장한 소득주도성장이 주로 받는 비판이다. 실제 최저임금이 오르고, 한 사람을 주 5일 일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을 주 2.5일씩 일하게 하는 등 일이 발생했다. 어찌 보면 취업이 증가했다고 볼 수는 있지만, 개개인의 급여는 오히려 주는 상황이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