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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 Jan 29. 2023

광부의 삶과 사회주의자 비판

책,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조지 오웰/ 부북스/ 초판 1쇄/ 2013.06.19)

- 광부의 삶과 사회주의자 비판 -



신문이나 인터넷 기사를 보다 보면 기사 제목에 [르포]라고 적은 걸 가끔 본다. 르포란 기자가 직접 현장에 가서 쓰는 걸 말한다. 기업이나 정부에서 낸 보도자료를 토대로 한 것이 아니라, 직접 현장에 가서 본 걸 쓴다는 데 의미가 있다. 르포 기사를 쓰는 기자는 보통 하루 종일 현장에 가서 취재를 한다. 대개 품이 많이 들지만, 르포 기사를 읽다 보면 현장감을 느낄 수 있어서 재밌게 보곤 한다. 물론 자신이 본 걸 설득력 있고, 재밌게 쓰는 건 기자의 능력이다.


르포 풀명칭은 사실 [르포르타주]다. 필자 개인의 식견에 따라 심층취재를 하고, 종합적으로 쓴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누군가의 삶을 더 심층적으로 보고, 현상이나 문제를 종합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제대로 된 르포르타주에 몇 달씩 걸리는 이유다. 그리고, 르포르타주의 문을 열었다고 일컬어지는 작품이 바로 조지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다.


조지오웰은 <1984>, <동물농장>으로 잘 알려진 영국의 작가이자 언론인이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그가 영국의 북부의 탄광지역에 2~3달간 머물려 쓴 책이다. 광부들의 삶과 공식적으로 200만 정도라고 말하는 실업자들의 삶을 깊이 있게 바라보고 썼다. 광부들이 일하는 광산으로 직접 함께 들어가기도 하고, 광부들이 지내는 싸구려 숙소에 몇 달씩 거주하며 그들의 특성, 건강상태, 가정환경 등 삶을 깊게 들여다본다. 그리고 대부분의 영국인들 특히 중산층, 상층, 지식인들 모두 이 광부들의 일에 기대어 살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이후 이들의 삶을 제대로 모른 채 계급과 편견에 사로잡혀 비난만 하는 사람들과, 자칭 사회주의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그 자신도 중산층 계급으로 어릴 적부터 하층민은 냄새가 나고, 불결하고, 적이라는 인식을 갖도록 교육받은 조지오웰은 광부들과의 보낸 시간을 통해 완전히 다르다는 걸 깨닫는다. 그가 마주친 광부의 삶은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와 전혀 달랐다. 


실업자들은 게으르다는 편견과 다르게, 실업수당을 받으면서 일하는 광부들은 시간으로 쳐주지도 않는 시간을 일하러 가는데 소비했다. 가는 과정도 곤욕이었다. 1.2m 천장 높이밖에 되지 않는 곳을 쭈그리고 가야 했으며, 도착해서도 계속 무릎을 꿇고 일을 해야 했다. 허리를 제대로 펼 수 없고, 열기가 가득하며, 목을 가득 채우는 석탄가루를 마시며 일해야 하는 게 광부의 일이었다. 반면, 광부가 받는 돈은 형편없다 할 만큼 초라한 수준이었다. 그 모습 어디에도 게르은 모습은 없었다.


또한 그들은 마땅한 권리가 있음에도 제대로 행사할 수 없었다. 연금을 받을 권리가 있음에도, 그들은 회사가 정해준 시간대에만 연금을 받으러 갈 수 있었다. 그 비루한 삶에서 광부는 6 페니를 내고 연금을 타러 가야 했다. 아무리 빌어먹을 상황이라도, 중산층은 자기가 원하는 시간대에 가서 자신 통장에 연금을 수령할 수 있었다. 하지만 광부는 하층민이었기 때문에 마땅한 권리를 제대로 행사할 수 없었다.


조지오웰은 그들의 삶을 보고, 아무리 좋게 보아도 중산층, 상층, 지식인들의 삶은 이 광부의 삶에 의존해서 살아간다는 걸 깨닫는다. 또 그와 동시에 하층과 실업자는 게으르다, 냄새가 난다, 등 형편없는 말을 하는 사회주의자들과 계급에 대해 의문과 비판을 던진다.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이 시작되는 건 책의 2부부터다. 조지오웰은 입으로는 노동자를 위한다는 말을 하지만, 정작 노동자와 함께 있는 것을 불편해하고, 그들의 문화는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한다. 그저 말로만 노동자들을 개혁하고, 노동자들의 편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행동하지 않는 걸 강력하게 비판한 것이다. 조지오웰이 보기에 오히려 더 개혁이 필요한 건 사회주의자들과 계급의식에 젖어 있는 중상층의 사람들이었다.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그들의 뼈를 드러내는 날 선 비판이었다.


조지오웰 그 역시 사회주의자였다. 그가 당대의 사회주의자들과 달랐던 점은 행동했다는 점이었다. 중산층이었던 그도, 하층은 냄새가 난다는 교육을 받으며 하층을 적으로 보는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그 교육의 견고한 틀을 깨고 가장 밑에 있는 하층에게 내려갔다. 그리고 자신이 갖고 있던 생각의 틀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절실히 깨달으며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썼다. 이 책을 내고 당대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아마도 날 센 비판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책을 다 읽고 <데미안>에 나오는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오래도록 영주, 왕 등 계급의식이 있는 유럽 그것도 영국에서 계급이라는 알을 깨고 하층으로 내려간다는 건 여러모로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전에 버마에서 생활하며 제국주의의 폐해를 몸소 경험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의식이 깨어난다고 해서 행동으로 바로 연결되는 건 아니다. 모든 행동에는 용기와 투쟁이 필요한 데, 조지오웰의 행동이 그 알을 깨는 모습처럼 보였다.


그와 동시에 나는 어떤 모습인지를 돌아본다. 나 역시 내가 바라는 모습이 있다. 그 모습을 이루는 데 나는 적절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또, 내가 바라본 모습과 정 반대되는 모습으로 인식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도 조지오웰이 비판한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아닐까 무섭기도 하다.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더 많은 행동을 해야겠다.


밑줄

- 그들은 대개 주간지나 일요 신문에 고용되었다. 그들은 매일 신문사에서 마련해 준 지도와 거리 목록을 가지고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다니며 목록에 있는 거리에서 신문 구독자를 모집하는 "작업"을 했다. 만약 하루에 최소한의 할당량인 20건의 주문을 얻어내지 못하면 그들은 해고당했다. 하루에 20건의 주문을 받아 내는 한 그들은 일주일에 2파운드의 쥐꼬리만 한 급여를 받는 모양이었다. 20건 이상의 주문을 받으면 아주 적은 금액의 구전도 받았다. 노동 계층이 사는 지역에서는 모든 가정에서 2 페니짜리 주말 신문을 구독했고 보던 신문을 한두 주 후에 다른 것으로 바꾸기 때문에 20건의 주문을 받는 일이 보이는 만큼 그렇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오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신문사들은 실직한 사무원이나 떠돌이 세일즈맨 같은 부류인 절박하게 비참한 사람들을 고용하여, 그 사람들이 필사적인 노력을 해서 얼마간 최소한의 판매를 유지하다가, 그 끔찍한 일로 지치게 되면 해고하고 새 사람들을 다시 그 자리에 채웠다. (p.16~17)


- 달력상으로는 지금이 봄이지만 그걸 믿는 새는 별로 없는 것 같았다.(p.27)


- 산업 지역의 한가운데라 해도 여전히 정결하고 깨끗한 땅들이 존재할 여지가 있다. 이것은 용기가 솟아나게 해주는 생각이다.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만 인간은 아직 모든 곳을 다 더럽히지는 못했다. 지구는 광활하고 여전히 비어 있어서 문명이 일구어 놓은 불결함 한가운데서도 회색 아닌 초록색 풀이 자라는 들판을 발견할 수 있고 열심히 찾으면 아마 당신은 연어 통조림 대신 살아 있는 물고기가 헤엄치는 냇물마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차가 훤히 트인 곳을 상당히 오랫동안, 약 20분간 더 달려가더니 빌라 문화가 또다시 우리 앞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후 외각에 있는 빈민가, 다음에는 폐석 더미가, 연기를 뿜어내는 굴뚝이, 용광로의 요란한 소리가, 운하와 가스탱크가 우리 앞에 다가왔다.(p.28)


- 우리 문명은 우리가 깨닫는 것보다 더 철저하게 석탄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우리의 삶을 유지시켜 주는 기계들과 기계를 만드는 기계들은 모두 직접 혹은 간접으로 석탄에 의지하고 있다. 서방세계의 신진대사에서 광부는 땅을 경작하는 농부 다음으로 중요한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 건축물을 떠받치는 때 묻은 여인상 기둥 같은 사람이다. 그의 어깨에 더럽지 않은 거의 모든 것을 지탱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기회가 생긴다면 그리고 기꺼이 수고할 의사가 있다면 석탄 채취가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p.29~30)


- 탄광으로 내려갈 때는 "필러"가 작업하고 있을 때 막장에 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쉽지 않다. 탄광에서 작업 중일 때 손님들은 귀찮은 존재여서 방문을 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다른 때 간다면 완전히 잘못된 인상을 받고 돌아올 수도 있다. 가령, 일요일에는 광산은 거의 평화로워 보인다. 기계 소리가 요란하게 나고, 대기는 석탄 먼지로 시커멀 때, 그럴 때 그곳에 가야 한다. 바로 그때가 실제로 광부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를 볼 수 있는 때다. 그런 때 그곳은 마치 지옥 같다. 아니면 적어도 내가 마음속에서 지옥이라고 그려보는 광경과 같다. 우리가 지옥이라는 곳에 있다고 상상하는 대부분의 것들 — 열기, 소음, 혼동, 어둠, 탁한 공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이 좁은 공간—이 거기에 있다. 지옥 불 빼고는 모든 것이 다 있다. 땅 속의 탄갱에는 흐릿한 데이비램프와 회중전등 말고는 아무런 불빛도 없는데, 이것들도 거의 시꺼먼 석탄 먼지를 뚫고 나오지 못한다.(p.30)


- "필러들"이 일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의 강인함을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이 하는 일은 지독한 일이고, 보통 사람의 수준으로 본다면 그들이 하는 일은 거의 초인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대한 양의 석탄을 이동시킬 뿐 아니라, 작업을 두세 배로 어렵게 만드는 자세로 그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내 무릎을 꿇어야만 한다 — 그들이 일어나면 천정을 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걸 시도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대단히 힘이 드는 일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p.31)


- 허리를 굽히고 걷는 것은 처음에는 좀 장난 같지만 그 장난은 곧 사라지게 된다. 나는 유별나게 키가 커서 불리한 입장이었지만, 천정이 1.2m나 그보다 더 낮을 때는 아이나 난쟁이가 아니고는 그런 식으로 걷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몸을 반으로 구부려야 할 뿐 아니라 들보나 대들보를 만나면 그것들을 피할 수 있도록 고개를 항상 위로 향하고 걸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목의 근육이 경련하는 것을 내내 느끼지만 이것은 무릎과 넓적다리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800m를 걸은 후 그 고통은 참을 수 없는 사투가 된다. (과장이 아니다). (중략) 그러다가 갑자기 신비스럽게도 천장이 높이 열려서 —아마 예전에 바위가 떨어진 곳이었을 것이다— 약 20m를 꼿꼿이 서서 걸을 수 있다. 그처럼 고통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은 굉장한 것이다.(p.36~37)


- 당신이 석탄 캐는 과정을 관찰한다 해도 아마 단지 잠시만 관 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몇 가지 계산을 해보기 시작하고서 야 비로소 "필러들"의 임무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깨닫는다. 보통 각 광부는 4,5m 넓이의 공간에 있는 석탄을 모두 채취해야 한다. 절단기는 석탄을 1.5m 깊이까지 파 놓는다. 그래서 엷은 석 탄층이 약 1m 높이라면 각자가 잘라내고, 잘게 부셔서 컨베이어 벨트에 올려놓아야 하는 석탄의 양은 7에서 12 입방미터까지 된 다. 1 입방미터가 2700의 중량이 나간다고 하면 각 광부는 1시간에 2톤에 가까운 석탄을 옮기는 꼴이 되는 것이다. 곡괭이와 부 삽으로 일해 본 내 경험에 비추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나는 겨우 이해할 수 있다. 정원에 도랑을 팔 때, 내가 오후에 2 톤의 흙을 옮긴다면 나는 내 밥값을 했다고 느낀다. 그러나 석탄에 비하면 흙은 다루기 쉬운 물질이다. 그리고 지하 330m의 숨 이 콱 막히는 열기 속에서 무릎을 꿇고 호흡할 때마다 석탄 먼지를 들이쉬며 일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일을 시작하기 전에 몸을 구부리고 1.6km를 걸어가야 할 필요도 없다. 광부의 일이란 날아가는 그네 위에서 묘기를 부리는 것이나 대장애물 경마에서 우 승하는 것이 내 능력에 벅찬 것처럼, 내 능력에 벅찬 일일 것이 다. 나는 육체노동자가 아니다. 그리고 사정이 허락하면 결코 육 체노동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꼭 그래야 한다면 내 가 해낼 수 있는 육체노동이 있다. 나는 어느 정도 쓸 만한 도로 청소부나 비효율적인 정원사나, 아니면 형편없는 농장 노동자는 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낼 수 있는 온갖 노력을 하고 훈련을 받는다 해도 나는 석탄 광부는 될 수 없다. 그 일은 나를 몇 주안에 죽게 할 것이다.(p.43~44)


- 그가 하는 일이 매우 끔찍할 뿐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경험과는 매우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말하자면 눈에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노동을 잊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혈관의 피를 잊고 지내는 곳처럼 말이다. 어느 면에서는 광부가 일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조차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가 일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속에서 불현듯 "지식인"으로서 그리고 일반적으로 좀 더 상위층에 있는 사람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지위에 대해 덧없는 의구심이 든다. 적어도 그들이 일하는 것을 바라보는 동안 우월한 자가 우월하게 버틸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광부들이 땀 흘리며 열심히 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당신과 나 그리고 <타임 문학부록>의 편집자, 그리고 동성애자 시인들과 캔터베리 대주교와 <유아를 위한 마르크시즘>의 저자인 동지 X—리 모두가 비교적 고상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정말이지 목구멍에서 석탄 먼지가 가득하고 눈까지 시꺼멓게 된 채 강철 같은 팔과 배의 근육으로 삽질을 해대며 지하에서 악착스럽게 일하는 이 가련한 사람들 덕택이다.(p.46~47)


- 광부가 연금을 타러 탄광 회사로 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신분이라는 것이 여전히 얼마나 대단히 중요한 것인가에 충격을 받았다. 모든 직업 중에서 가장 유용한 일 중 하나를 하다가 거의 시력을 잃은 사람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는 완벽하게 받을 권리가 있는 연금을 타고 있었다. 만약 어느 누가 받을 권리가 있다면 말이다. 그런데도 그는 이 연금을 요구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그가 받고 싶은 시간에 받고 싶은 방식으로 지급받을 수 없었다. 그는 한 주에 한 번 탄광회사에서 지정하는 시간에 가야만 했고, 그곳에 가서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몇 시간씩 기다려야 했다. 내가 아는 한 그에게 연금을 지불해 주는 사람이 누구이건 광부는 자신의 모자에 가볍게 손을 대어 그 사람에게 감사를 표시해야 했다. 어쨌든 그는 오후 시간을 허비하고 버스 비용으로 6 페니를 써야 했다. 그것은 나처럼 매우 초라한 사람이라 해도, 중산계급에 속하는 사람에게는 다르다. 내가 거의 기아 상태에 있을 대조차 나는 중산계급 신분에 속하는 권리들을 가지고 있다. 나는 광부 정도의 돈을 벌지만 적어도 신사에 걸맞은 방식으로 그것을 출금할 수 있다. 그리고 내 잔고가 바닥이 나도 은행 사람들은 내게 상당히 공손하다.(p.64~65)


- 이처럼 사소한 불편함이나 모욕을 당하고, 그리고 여기저기서 기다려야 하는 것,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편리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 노동계급의 삶에 내재되어 있다. 천 가지의 권력이 노동자를 줄곧 찍어 눌러서 그가 수동적인 역할을 하게 만든다. 그는 행동하지 않고, 지시를 받는다. 그는 자신이 불가사의한 권위의 노예라고 느끼며, 그리고 "그들"이 결코 이것, 저것, 그리고 다른 것들을 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중략) "그들"은 분명히 무한한 힘을 가진 자들이었다.(p.65~66)


- 똑같이 분명한 것은 그들이 처한 환경은 그들이 자존감을 가지도록 격려하지 못한다는 것이다.(p.80)


- 나는 주택이 절박하게 필요하고 그리고 건축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그 속도가 마비 걸린 듯 느리다는 것을 기록할 뿐이다.(p.88)


- 그런데고 그 회관에는 실업자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들은 따뜻한 곳에 있기 위해서라면 훨씬 더 고약한 푸념도 끝까지 듣고 앉아 있을 것이다.(p.106)


- 실업이라는 불길하고 사악한 구름이 당신을 짓누르는 상황에서는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 없고 어떤 것을 창조해 내는데 필요한 희망 정신을 구사할 수 없다. 그렇지만 책을 읽을 때 편안하게 느끼는 실업자는 어쨌든 독서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러나 불편해서 책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예를 들어 어려서부터 탄갱에서 일했고,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 광부가 되기 위한 훈련만을 받아온 광부를 생각해 보자. 도대체 어떻게 그가 그 비어 있는 시간을 채울 것인가? 그다 당연히 일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당치도 않다. 찾을 일거리가 도무지 없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7년 동안 계속해서 매일 일을 찾아다닐 수는 없는 것이다. 시간도 보낼 겸 가족의 먹거리에도 도움이 될 대여 경작지가 있지만 큰 도시에서는 그런 경작지들이 많지 않아서 적은 비율의 사람들에게만 돌아갈 정도이다.(p.108)


- 그러나 이곳에서도 당신은 마음이 양쪽으로 찢어지는 것을 느낀다.(p.109~110)


- 중류층에서는 여전히 "실업수당을 타 먹으며 게으르게 빈둥대는 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고, 그리고 "이 사람들은 원한다면 모두 일자리르 찾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의견은 노동계층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나는 부랑자와 거지를 냉소적인 기생충이라고 생각하도록 배웠다. 그런데 내가 처음으로 부랑자와 거지와 어울려 지내게 되었을 대 이들 중 상당히 많은 사람들, 아마도 1/4은 품위 있는 젊은 광부들과 면직물 노동자들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대단한 충격을 받았던 것이 생각난다. 그들은 덫 안에 갇힌 동물처럼 경악하며 묵묵히 자신들의 운명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일하도록 양육되었다. 그런데 보라! 그들이 다시는 일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그들 입장에서는 처음에는 피할 수 없이 자신들의 품격이 저하되었다는 느낌에 사로 잡혔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그것이 실업에 대한 태도였고, 실업은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일어났고 거기에 대해 당신이 비난받아야 할 재앙이었다.(p.112~113)


- 25만 명의 광부들이 실업하게 될 때 뉴캐슬의 뒷거리에 살고 있는 광부 알프 스미스가 일자리르 잃게 되는 것은 순리다. 알프스미스는 25만 명 중의 한 사람이고 통계적인 단위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느 인간도 자신을 통계 단위로 간주하기란 쉽지 않다. 거리의 건너편에 사는 버트 존스가 여전히 일하고 있는 한 알프스미스는 자신이 수치스러운 실패자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서 실업기 가져오는 최악의 결과인 극단적인 무능함과 절망감이 생긴다. 이것은 어떤 고난보다도 훨씬 더 나쁘며, 빈둥거리도록 강요당한 데서 야기되는 사기 저하보다도 더 나쁘며, 그리고 실업수당을 받는 상황에서 태어난 알프 스미스의 아이들이 신체적으로 쇠약해지는 것보다 조금 덜 나쁠 뿐이다.(p.113)


- "하나님, 제게 제발 일자리를 주십시오."라고 외치는 끔찍한 순간을 틀림없이 기억할 것이다. 이것은 극적인 과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활에서 따온 한 조각이었다. 아마도 틀림없이 수만, 아마도 수십만의 영국 가정에서 지난 15년 간 그런 울부짖음이 들렸을 것이다.(p.113~114)


- 그들이 그렇게 살면서도 정신적인 자제력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찬양할 만하다고, 아마 희망적이기까지 하다고 생각한다. 노동자는 가난의 중압감 하에서도 중류 계층 사람이 와해되는 것처럼 와해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노동 계층이 실업수당을 받는 상황에서도 결혼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것을 보라. 브라이튼에 사는 노부인들에게는 그것은 고민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실업수당을 받으며 결혼하는 것은 노동자 계층의 건전한 판단력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들은 직업을 잃었다고 해서 더 이상 인간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있다. 그래서 어떤 면으로는 빈곤한 지역의 상황은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다. 상당히 나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들의 생활은 여전히 상당히 정상적이다. 우리가 실제로 기대하는 이상으로 정상적이다. 실상 사람들은 전보다 더 허리띠를 졸라매고 생활하고 있다. 자신들의 운명에 분노를 터트리는 대신에 그들은 생활수준을 낮추어서 상황을 참을 만하게 만들고 있다.(p.115)


- 특별히 해로운 점은 돈이 없으면 없을수록 건전한 식품을 사려는 생각이 들지 않기 쉽다는 것이다. 백만장자는 오렌지 주스와 리비타 비스킷으로 아침을 즐길 수도 있다. 실업자는 그런 아침을 즐기지 못한다. 여기에 내가 앞장의 말미에서 이야기한 경향이 작용하고 있다. 실업 상태에 있을 때, 말하자면 영양실조이고, 근심에 시달리고, 지루하고, 비참할 때, 당신은 무미건조하며 건전한 식품을 원하지 않는다. 무언가 조금 "맛있는" 것을 원한다. 언제나 어떤 싸구려 유쾌한 것이 당신을 유혹한다. 3 페니어치 튀긴 감자를 먹자! 뛰어가서 2 페니어치 아이스크림을 사자! 주전자에 물을 끓여서 맛있는 차를 한 잔 하자!(p.126~127)


- 태어났을 때 지녔던 튼튼한 치아를 그대로 지닌 노동자를 랭커셔에서 만나려면 오랫동안 찾아다녀야 할 것이다. 실제로, 아이들 이외에는 타고난 치아를 지닌 사람을 거의 볼 수 없다. 그런데 아이들조차 연약한 푸른 기가 도는 치아를 지녔는데, 그것은 칼슘 부족을 뜻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산업 지역에서 30세 이상이면서 여전히 타고 난 치아를 그대로 지니고 있는 남녀는 비정상인 것처럼 되어 간다고 몇몇 치과 의사들이 알려 주었다. 위건에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생애에서 가능한 한 일찍 치아와 "인연을 끊는 것"이 최선이라는 의견을 내게 말해 주었다. 한 여성은 "치아는 단지 고통일 뿐"이라고 했다.(p.127~128)


- 거친 삼베 앞치마를 입고 숄을 두른 땅딸막한 여인들이 무거운 검은색 나막신을 신고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작은 석탄 조각을 찾기 위해 뜬 숱이 흩어져 있는 진흙 속을 열심히 뒤지는 광경. 이 장면은 랭커셔의 풍경 중 하나로 내 마음에 남아 있다. 그들은 기꺼이 이 일을 한다. 연료는 겨울에 그들에게 꼭 필요한 필수품이다. 연료는 거의 음식보다 더 중요하다.(p.137)


-  인구 50만 명의 셰필드에는 이스트 앵글리아에 있는 인구 500명의 평범한 마을만큼도 품위 있는 건물이 없다. 그리고 얼마나 역한 냄새를 풍기는지! 어쩌다가 유황 냄새를 맡지 못하는 때가 있다면 가스 냄새를 맡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셰필드를 관통해 흐르는 얕은 강조차도 어떤 화학 물질이나 그런 것 때문에 대체로 밝은 노란색이다. 한 번은 거리에 멈춰 서서 눈에 보이는 공장 굴뚝 숫자를 세어 보았다. 서른세 개를 세웠지만 만약 대기가 연기로 혼탁하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굴뚝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p.140~141)


- 산업주의에 본래부터 그리고 불가피하게 추악한 면이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왕궁이나 개집이나 성당이 그렇지 않은 것처럼, 공장이나 가스 공장조차도 본질상 추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건물은 그 시대의 건축 전통이 좌우한다. 북부 산업도시가 추한 것은, 현대적인 철강 건축과 매연을 줄이는 방법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을 때,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돈 벌기에 급급해서 그 이외의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때 그 도시들이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그 도시들이 계속 추한 채로 남아 있는 것은 북부 사람들의 눈이 그것들에 익숙해져서 그것이 추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p.142~143)


- 나는 랭커셔와 요크셔의 석탄 지역에서 보았던 다양한 것들을 단편적으로 설명했다. 내가 그곳에 갔던 것은 최악의 상태의 집단 실업이 어떤 것인가를 보기 원했기 때문이었으며, 그리고 영국 노동 계층이 살고 있는 가장 전형적인 지역을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내가 사회주의에 접근하는 방편의 일환으로 내게 필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진짜로 사회주의에 호의적인지 아닌지를 확신할 수 있으려면, 우리 모두는 현재의 상황이 참을 만한 것인지 아닌지 확실한 결론을 내려야 하고, 그리고 대단히 어려운 계급 문제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확실히 해야 하기 때문이다.(p.159~160)


- 그 애들은 "천민"이니 그 애들과 함께 지내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말하고 싶다면, 그것은 허세였다. 하지만 중류계급 사람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천한 억양을 가진 아이들과 함께 자라는 것을 내버려 둘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필요한 조치이기도 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노동계층은 내게 친절하고 멋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적이 되었다. 그들이 우리를 증오하는 것을 깨달았지만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히 우리는 그것을 순전히 악랄한 증오라고 간주했다. 내 어린 시절에 우리 가족과 유사한 가족의 거의 모든 아이들에게 "천민"들은 인간 이하로 보였다. 그들의 얼굴은 거칠었고, 억양은 끔찍했으며, 태도는 무례했고, 자신들과 다른 모든 사람을 증오했다. 만약 기회가 조금이라도 생기면 잔인하게 당신을 모욕했다. 그것이 우리가 그들을 보는 관점이었다.(p.166)


- 유럽에서 중산계급으로 양육받은 자칭 공산주의자가 노동자를 자신과 동등하다고 여기려면 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요즘은 사람들이 좀처럼 이 말을 하지 않지만, 내 어린 시절에는 상당히 자유롭게 주고받던 세 마디의 끔찍한 말로 이것을 요약할 수 있다. 하층민은 냄새를 풍긴다는 말이었다.(p.168~169)


- 우리는 그렇게 배웠다. 하층민은 냄새를 풍긴다고. 그래서 확실히 우리는 여기에서 넘을 수 없는 장벽에 부딪히게 된다. 좋아한다든지 좋아하지 않는다든지 하는 감정은 육체적 느낌만큼 그렇게 뿌리 깊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종족적 증오, 종교적 증오, 교육의 차이, 성격의 차이, 지력의 차이, 도덕적 법도의 차이까지도 극복될 수 있다. 하지만 육체적 혐오감은 극복될 수 없다. 살인자나 동성애자를 사랑할 수는 있지만 입에서 악취를 풍기는 사람은 사랑할 수는 없다. 내 말은 상습적으로 악취를 풍기는 사람 말이다. 우리가 아무리 그가 잘되기를 기원하고 아무리 그의 지성과 성품을 칭찬한다 할지라도 만약 그의 입에서 악취가 난다면 그는 끔찍한 사람이고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를 증오하게 될 것이다.(p.169)


- 해로운 것은 노동자들이 더럽다고 믿도록 양육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어렸을 때 우리는 그들이 더럽다고 믿도록 교육받았다. 아주 어려서부터 우리는 노동자 계층의 육체에는 무언가 미묘하게 역겨운 것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p.169)


- 백만장자의 육체가 역겹지 않은 것처럼 노동자의 육체도 내게 더 이상 역겹지 않다. 나는 다른 사람, 내 말은 다른 남자가 마신 병이나 컵으로 마시는 것을 여전히 싫어한다. 여자가 마신 컵이나 병은 괜찮다. 그러나 거기에 적어도 계급 문제는 개입되지 않는다. 부랑자들과 어깨를 비비고 지낸 것이 계급 문제를 극복하게 해 주었다. 영국인 부랑자는 실상 그렇게 더럽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더럽다는 평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당신이 부랑자와 한 침대에서 자고, 같은 코담배 통으로 차를 마시면 당신은 최악의 것을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최악의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공포에 질리지 않는다.(p.173)


- 짐작컨대 그는 그와 의견이 같은 노동계급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보다 자신을 급진파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계급 사람들과 함께할 때 훨씬 더 편안하다. 그의 음식, 와인, 옷, 책, 영화, 음악에 대한 취향은 여전히 중산계급의 취향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는 자신의 계급 여성과 결혼한다는 것이다. (중략) 어쨌든 이론적으로는 그는 전쟁터에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을 것이지만 그가 여전히 그의 조끼의 맨 밑 단추를 끼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노동자를 이상화하지만 그의 습관이 그들의 습관과 얼마나 다른지가 눈에 확 뜨인다. 필경 순전히 허세로 한 번쯤은 상표가 붙은 채로 여송연을 피웠겠지만 그가 치즈를 칼끝으로 집어서 입속에 넣거나 실내에서 캡을 쓴 책 앉아 있거나 찻잔 접시로 차를 마시는 것은 물리적으로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아마도 식탁 매너는 그의 진정성을 시험하는 시험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p.179)


- 나는 여러 명의 중산계급 사회주의자들을 알고 있다. 나는 그들이 여러 시간 동안 계속해서 자신의 계급을 공격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한 번도 노동자의 식탁 매너를 배운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도대체 왜 노동자 식탁 매너를 배우면 안 되는 것일까? 모든 덕성이 노동자에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왜 여전히 소리 내지 않고 수프를 마시려고 안간힘을 써야만 할까? 유일한 이유는 마음속에서 노동자의 매너가 역겹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 계급을 증오하고, 두려워하고 경멸하도록 배웠던 어린 시절의 훈련에 그가 여전히 반응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p.180)


- 그러나 나는 노동계급의 상황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실업통계를 읽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도 "존경받을 만한 가난"이 항상 최악이라는 근본적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일생 동안 꾸준히 일하다가 갑자기 길거리에 내던져진 점잖은 노동자의 끔찍한 운명, 그가 알지도 못하는 경제법에 대행해서 고통스럽게 발버둥 치는 것, 가족의 와해, 그의 마음을 좀먹는 수치심, 이런 모든 것들은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가난이라는 것은 동물적인 굶주림이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즉각적으로 극단의 경우들, 즉 떠돌이, 거지, 범법자, 매춘부처럼 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자들을 향했다. 이 사람들은 "하층 중에서도 하층"민이었고, 그래서 나는 이런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p.197)


- 사실은 인간이 먹고, 마시고, 잠자고, 사랑하고, 말하고, 게임을 하거나 그저 빈둥거리지 않을 때에는 —그런데 이 모든 것들로 인생의 시간이 다 채워지지는 않는다— 일을 할 필요가 있고, 비록 일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일지라도, 대개 일을 찾는다. 대단한 바보가 아닌 사람들은 주로 수고하며 살아간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천한 쾌락주의자가 생각하듯이 걸어 다니는 밥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손과 눈과 두뇌도 가지고 있다. 손을 사용하지 않게 되면 당신은 의식의 대단히 많은 부분을 잘라 내는 것이다.(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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