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Other Choice - 선택지가 없다
많은 기대를 모으던 박찬욱 감독님의 신작, <어쩔수가 없다>가 드디어 개봉을 했습니다. <유퀴즈 온 더 블럭> 인터뷰에서 이번 작품은 정말 크게 흥행을 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소감을 밝혔는데 쉽지만은 않아 보입니다. 글을 쓰는 10월 3일 기준 누적 관객 수 139만 명, 실관람객 평점이 7점을 조금 넘어서고 있군요. 보다 긴 추석 연휴가 아마 이번 영화 흥행에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늘 그랬듯 저는 이번 박찬욱 감독님의 작품도 개인적으로 매우 인상 깊게 봤으나 흔히들 비교하는 봉준호 감독님과 달리 대흥행에는 실패하는 이유가 나름 있긴 하다고 봅니다. 일단 19금으로 분류되는 박찬욱 감독님의 작품들 특성상 애초에 모객이 쉽지 않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헤어질 결심>을 비롯한 최근 작품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 같은데 기대감이 큰 만큼 실망감도 크게 다가오는 현상으로 보입니다. 20여 년 전 박찬욱 감독님의 작품들을 생각해 보면 상당히 강렬하죠. <JSA>,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박쥐> 등등 매우 강렬하고 자극적인, 부모님이나 심지어는 연인이랑 함께 보기에도 다소 부담스러울 정도인 작품들이 대부분입니다. 흥미로운 서사, 노골적이고 수위 높은 장면들의 향연, 충격적인 반전 등이 대중들에게는 박찬욱 영화의 공식 레시피로 자리 잡아 왔습니다. 이번 <어쩔수가 없다>도 마찬가지고 <헤어질 결심>도 그랬지만 이런 부분을 기대하고 간다면 다소 실망할 수도 있는 '강도'입니다. 마라탕을 기대하고 갔는데 설렁탕까지는 아니고 된장찌개 한 그릇 먹고 오는 느낌이랄까요? 그런 부분에서 이번 작품 역시 관람객들의 호불호와 전반적인 평이 상당히 크게 갈리는 듯합니다.
<어쩔수가 없다>의 서사의 설정은 이미 개봉 전부터 널리 알려졌습니다. 제가 제목에 "스포주의"라고 쓰긴 했으나 내용상 크게 스포 할 만한 요소 자체가 없다는 소리죠... 이병현 배우가 연기한 만수라는 주인공은 다니던 회사에서 정리해고 당했고, 그런 과정에서 재취업을 위해 경쟁자들을 '어쩔 수 없이' 제거하기 시작한다는 것이 기본 설정입니다.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보니 서사 자체가 충격적이거나 큰 반전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이 영화의 묘미는 그 과정이죠. 위에 화분을 들고 있는 장면이 한 예입니다. 만수가 경쟁자를 제거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우스꽝스럽고 변수가 발생하며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전개시키는 구조입니다.
이미 다양한 해석들이 나오고 있는데 영화 속에 숨겨진 상징성과 의미들을 들여다보는 것도 재미 포인트 중 하나입니다. 예를 들면, 주인공 만수가 재직하던 회사는 왜 하필 제지 회사로 설정을 한 것일까요?
그에 대한 정답은 극 중 만수의 대사에 힌트가 있는 듯합니다. "저희가 종이를 쓰지 않는다면, 누가 쓰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는 세상에서 제지 산업은 어쩔 수 없이 저물어 가는 산업입니다. 종이가 사라질 일은 없을 테고 여전히 일상생활에서 필수적인 존재이긴 하나 여러 방면으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종이를 덜 쓸 뿐 아니라 기업과 공공기관 차원에서도 ESG의 일환으로 종이 사용 절감을 오히려 독려하는 분위기이죠. 종이처럼, 극 중 인물들 또한 갈수록 쓰임새가 줄어드는, 자칫하면 쓸모가 없어지는, 누가 억지로 써주지 않는 이상 아무도 찾지 않을 제품과 같은 사람들임을 시사합니다.
주인공 만수가 최종적으로 합격하게 되는 회사와 면접을 보는 장면에서는 이 '대체가능성'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을 넘어 인류 전체로 확장됩니다. 면접관들은 제조를 점차 자동화하고 AI를 활용해 나가는 과정에서 앞으로 인원감축은 불가피할 텐데 괜찮겠느냐라고 질문하죠. AI와 관련해서 이미 화두가 되고 있는 그 질문입니다.
만수가 제거하기로 결심한 인물들도 흥미롭습니다.
만수의 레이더에 들어온 인물은 총 세명입니다. 본인이 취업하고자 하는 회사에서 중책을 이미 맡고 있는 선출(박희순 배우), 그리고 나머지 두 명은 현재 본인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범모(이성민 배우)와 시조(차승원 배우)입니다. 영화를 곱씹어 볼수록 만수가 이 세명을 제거하는 것인 단순히 경쟁자를 제거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특히 선출과 범모 캐릭터에 대해 알게 되는 사실들을 보면 더욱 그러한데, 이 둘을 제거하는 행위는 만수 본인이 갖고 있는 두려움, 결함을 제거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범모의 아내는 젊은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고, 선출 또한 아내에게 버림받은 신세입니다. 만수 역시 본인의 아내인 미리(손예진 배우)를 혹여나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게 될까 봐 지속적으로 불안해하고 경계하죠. 또 하나는 술입니다. 영화 중반부 정도에 만수는 과거에 술로 인해 크고 작은 불화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는데 범모 또한 알코올중독자의 면모를 보이고 있고 선출 또한 궁극적으로는 술로 인해 최후를 맞이하게 되죠. 심지어는 만수 본인이 술로 인해 죽을 뻔했던 방법과 동일한 방법으로.... 만수는 경쟁자를 넘어 부끄러웠던 자신의 과거와 결함, 그리고 앞날에 대한 불안함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극 중 만수의 딸 리원이에 대한 이야기도 많습니다.
딸 리원이는 원작 소설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라 하죠. 그렇다면 박찬욱 감독은 왜 이 캐릭터를 굳이 추가했을지 궁금해지게 됩니다. 리원이는 일종의 자폐를 앓고 있는 캐릭터입니다. 말을 거의 하지 않고, 주변에서 듣는 말을 반복하는 것이 전부이지만 첼로 연주에 있어서는 또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죠. 또한 가족 구성원보다는 강아지들에게 훨씬 더 많은 애정을 보이는 인물입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리원이는 AI나 인간성이 결여된 디지털 기술을 상징하는 인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과의 소통, 사회성은 결여되어 있는 상태에서 주변 인물들의 대화를 학습하고 이를 반복하는... 천부적 재능을 소유했으나 정작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는 들려주지 않는... 픽셀과 같은 이미지를 혼자서 계속 그리는데 이게 알고 보니 악보였던.... 그리고 비로소 마지막에 악보를 연주하며 완성형이 되는... 리원이가 엔딩에서 연주하는 곡이 무엇일까 궁금해서 찾아보니 Marin Marais라는 프랑스 작곡가가 쓴 Le Badinage라는 곡이더군요. 그렇다면 Le Badinage의 뜻은 무엇일까 찾아보니 익살스러운 대화, 장난, 놀리는, 농담과 같은 의미를 가졌습니다. 선곡에 있어 의도가 분명 있을 듯한데 그렇다면 리원이는(AI는) 인간들을 잠식해 오며 놀리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일까요? 다소 억지스러운 해석일 수는 있겠으나 리원이의 여러 특징을 종합해 봤을 때 분명 숨겨진 의미와 의도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영화를 관람했을 당시 박찬욱 감독님과 배우들이 무대인사를 왔었는데 아마 이성민 배우님이 말씀하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영화를 보며 무언가 아리송한 부분들이 있다면 몇 번 다시 보면 실마리가 풀릴 거라고 했던 게 기억이 납니다. 진짜 그럴 것 같습니다. 숨겨져 있는 디테일이 많고 대사 하나하나 곱씹어 보면 해석할 여지가 상당히 많은 작품입니다. 재밌게 봤고 당장 n회차 관람은 아니더라도 시간이 좀 흐른 상태에서 오랜만에 다시 보면 새로운 것들이 분명 다가올 작품으로 생각합니다.
사회의 부조리함과 인류가 앞으로 맞서야 할 과제에 대한 은유를 담고 있는 <어쩔수가 없다>였습니다. 영화에 대한 관렴평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웃프다'라는 표현이 가장 정확할 것 같습니다.
즐거운 명절 연휴 보내시기 바랍니다.
Till next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