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영화 Top 5 등극
넷플리스에 (또는 다른 OTT 플랫폼에) 찜을 해놓고서는 한참 보지 못하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분명 관심이 가서, 보고 싶어서 찜해놨을련만... 막상 찜을 해놓으면 이게 또 뭔가 숙제/과제 같고... 오늘의 mood와 맞지 않는다는 둥 여러 핑계와 이유를 대며 미루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저만 해도 그런 영화와 시리즈가 한 무더기입니다. 그런 작품 중 하나가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였습니다.
찜을 해둔 정확한 시점은 기억이 안 나지만 대략 5년 정도는 된 듯합니다. 지금은 폐업하셨는데 한동안 아내와 데이트를 자주 즐기고는 하던 "아비정전"이라는 와인바가 있었는데 술집 이름에서부터 짐작이 가시겠지만 이곳 사장님들께서(커플 두 분) 완전 홍콩 마니아였죠. 와인바에 <아비정전> 다음으로 색채와 테마를 많이 참고하신 작품이 바로 <화양연화>였습니다. 그분들을 통해 저 또한 이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렇게 찜만 해둔 채 몇 년간 방치해 오다가 최근에서야 드디어 보게 되었습니다.
이게 웬걸... 보자마자 인생영화 Top 5에 등극합니다. 이 영화를 왜 여태 안 봤던 것일까.... 이제라도 봐서 다행이다... 아니, 어쩌면 지금 이 나이에 봐서 더욱 울림이 큰 것일 수도 있겠다... 강한 여운과 여러 생각을 남기는 명작이었습니다. 바로 블로그에 글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하고 삽입할만한 영화 포스터 이미지를 찾던 중 재밌는 부분을 발견하게 됩니다. 구글 이미지에 "화양연화"를 검색하면 여러 영화 포스터 이미지가 등장하는데 대체로 상당히 야릇합니다.
재밌다고 생각했던 부분은 이 지점입니다. (술을 몇 잔 걸치고 시청해서 기억을 못 하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영화에는 포스터와 같은 장면은 일절 나오지 않습니다. 주인공 간 찐한 스킨십 자체가 부재하죠. 왜? 주인공 주모운(양조위 배우)이 영화 중 여러 번 언급하 듯 '우린 저들과 다르니까요'라는 철칙 때문이죠. 이 영화가 정서적으로 이토록 아련하고 아름다운 것은 주인공은 주모운과 소려진(장만옥 배우)의 "절제"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어찌 보면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과도 많이 닮아있죠. <헤어질 결심>이 훨씬 나중에 나온 작품이니 <헤어질 결심>이 <화양연화>를 닮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으려나요? 여하튼, 절제.... 서로를 향한 마음을 날이 갈수록 애틋해지지만 두 작품에서의 주인공들은 모두 이를 절대 물리적으로, 육체적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헤어질 결심> 포스터는 이러한 정서를 그대로 반영한 반면 <화양연화>는 어찌 보면 두 주인공이 차마 실천하지 못한 욕망을 영화 포스터로나마 표현했다고 볼 수 있겠죠.
줄거리를 요약해 보자면 많은 분들께서 이미 아시겠지만 <화양연화>는 이사 온 집에서 서로 이웃이 되었는데 하필이면 서로의 배우자가 상호 간의 불륜을 저지르고 있음을 깨닫는, 그러면서 그 아픔을 서로 간에 공유하다가 결국에는 당사자들 또한 아련한 사랑에 빠지게 되는, 미묘한 감정을 자아내는 로맨스 장르입니다. 어찌 보면 비극적이죠. 결국 핵심 테마는 "불륜"입니다. 이 불륜은 핵심 등장인물 4인 외에도 소려진이 근무하는 회사 사장님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지속 언급됩니다. 사장님이 똑같은 가방 두 개를 선물로 요청하는 포인트나, 넥타이가 바뀐 것을 소려진이 눈치 채자 아내를 만나러 가기 전 황급히 다른 넥타이로 바꿔 매는 장면이라던가...
이러한 다소 비극적인 상황을 너무나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영화적 장치들은 음악, 그리고 무엇보다 미장센입니다. <화양연화>는 영화 내내 녹색과 붉은색 간의 갈등으로 이어지는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미장센의 색감이 이렇게 서로 충돌하고 교차하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신호등인가? Red=Stop. Green=Go. 영화 내내 두 주인공은 사회적인 규율과 눈치에 시달리는 사람들입니다. 아이러니하게 정작 본인들은 이러한 규율과 눈치를 밥 말아먹은 배우자들에 의한 피해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럼 이런 사회적 규율을 신호등으로 표현한다면 어떨까요? 녹색은 허용되는... 납득이 가능한 범위일 것이고 적색은 허용되지 않는, 금기시되는... 즉 이들의 욕망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주모윤과 소려진의 감정이 깊어질수록 영화의 미장센은 붉은색감이 더욱 강해집니다. 욕망이 폭발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상기 이미지는 뒷모습만 보여서 표현이 잘 안 되는데 상당히 흥미로웠던 부분은 소려진이 갈등을 하다가 결국 호텔에서 칩거 중인 주모윤을 처음 찾아가던 이 장면에서 그녀는 저 붉은색 외투 아래 하얀색 베이스의 치파오를 입고 있죠. 순수한 마음으로 찾아가고자 했으나 숨길 수 없는 붉은색 욕망으로 점 칠 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영화 속에는 역사적 시점을 은유로 표현하는 장치도 꽤나 교묘하게 삽입이 되어 있습니다. 영화 시작의 배경은 1962년도 홍콩입니다. 왜 하필 1962년도일까요? 여러 매체를 통해 소개된 바 있는데 1962년도는 왕가위 감독의 가족이 홍콩으로 이주한 해이고 그뿐만 아니라 중국 본토의 정세가 문화혁명과 같은 사건들로 인해 매우 불안정 해지면서 홍콩으로 이주민들이 대거 넘어온 시기입니다. 이런 급격한 인구 밀도 증가를 보여주는 대목이 주인공들의 주거 형태입니다. 아파트 이웃으로 살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각각 예를 들면 101호, 102호에 사는 이웃이 아니라 각 호실에 방 하나를 겨우 전대하는 일명 사글세 형태로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직장을 고려했을 때 좀 의아할 수 있는 부분이죠. 복장을 봤을 때도 그렇고 주모윤은 나름 잘 나가는 신문사에, 소려진은 추정컨대 꽤나 사업을 크게 벌이는 무역회사 또는 여행사 직원입니다.
혼란스럽게 다양한 사람들이 뒤섞이는 상황에서 각자의 배우자들은 서로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고... 그로 인해 당사자들은 유대감을 형성하는 희한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죠. 영화 말미에 다수 생뚱맞게 느껴지는 장면이 하나 더 등장하죠. 캄보디아 1966년 장면입니다.
궁금해서 검색을 해봤습니다. 캄보디아는 이때 어떤 상황이었을까요? 내전을 향해가는 시한폭탄과 같은 시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아누크 국왕이 아직 캄보디아를 통치하고 있었으나 바로 옆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직간접적인 영향이 캄보디아로 들어오며 권력이 쇠퇴하던 시기였고 그런 와중에, 캄보디아를 식민지로 통치하던 국가인 프랑스의 수장 샤를 드 골이 캄보디아를 방문한 것입니다. 바로 이듬해 캄보디아 내전이 벌어졌고 약 8년간의 내전 끝에 악명 높은 폴폿(Pol Pot)의 Khmer Rouge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고 캄보디아는 여러모로 쑥대밭이 되었죠.
<화양연화> 영화의 개봉시점은 2000년도입니다. 영국 식민지 었던 홍콩의 중국으로의 반환이 이루어진 지 몇 년이 지난 시점이죠. 이 당시 홍콩 영화들은, 특히 왕가위 감독의 작품은 중국으로 반환되는 상황을 다소 불안하게 묘사하고, 영국과의 관계를 향수 섞인 감성으로 표현해 낸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럴만하죠. 자유와 서방국가와의 네트워크를 이점으로 삼으며 맘껏 누렸던 혜택들이 정치외교 스펙트럼에 있어서는 반대편에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다시 통합되며 불투명한 미래를 맞이하게 되었으니까요. 이러한 불안 요소들과 갈등의 유산은 홍콩 반환 30년이 되어가는 오늘날까지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왕가위 감독의 의도는 뭐였을까요? 영국의 식민지로서 누릴 수 있는 마지막 순간들을 은유적으로 샤를 드 골의 캄보디아 방문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주모윤이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를 찾아가 사원 구멍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이며 끝나는 영화의 엔딩 장면과 그 이후 등장하는 자막은 이래저래 왕가위 감독이 표현하고자 했던 심정을 대변합니다. 주모윤은 거의 직전 장면에서 동료에게 얘기하죠. 예전에는 비밀을 얘기하고 싶으면 나무에 구멍을 뚫어 거기에 얘기를 했었다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feel) 요즘 실현되고 있는 홍콩에서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를 미리 우려하고 이를 표현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 회상하는 거겠죠. 본인이 가족과 이주해 온 1962년 홍콩부터 중국에 반환되던 1997년 홍콩까지... 꽃처럼 아름다운 시절이었노라...
이런 부분이 <화양연화>의 대단한 점 아닌가 싶습니다. 언뜻 보면 그저 불륜 피해자들이 유대감을 쌓아가는 줄거리라 보이겠지만 그 내면을 더 들여다보면 인간의 욕망, 애틋함, 비밀, 거기서 더 확대하자면 홍콩의 역사관과 향후 정세에 대한 우려까지... 100분도 안 되는 러닝타임에 이러한 풍부한 메시지와 테마, 그리고 세계관을 표출해 냈습니다. 음악, 미장센, 배우들의 연기도 큰 기여를 했죠. 특히 양조위...
이 영화에서 장만옥도 너무 예뻤지만 저는 양조위 배우가 더욱 눈이 가더군요... 원래도 멋있는 배우인 줄은 알았지만 이 형님 이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보면서 '와 양조위 형님처럼 늙고 싶다'라고 생각했다가 궁금해서 검색해 보니 양조위 형님이 1962년생, 영화 개봉 시점이 2000년이니 촬영시점까지 감안하면 어쨌든 만 37세 - 38세 경에 이 영화가 나온 건데.... 지금 제 나이더군요....
여튼.. 이래저래 울림이 강하고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홍콩을 그리워하게 되는 훌륭한 영화, <화양연화> 리뷰였습니다.
'Till next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