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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May 18. 2020

하나의 세계에 갇힌다는 것

<패왕별희>를 보며 <4등>을 떠올리다

코로나의 여파로 극장가는 신작 개봉을 대다수 미루었고, 여전히 영화는 개봉되고 있지만 대다수의 관객이 기대하는 텐트폴 무비는 아직까지 개봉되지 않고 있다. 극장가는 자구책으로 재개봉을 시작했고 그 행렬에 필자가 건진 것이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이다. 상영시간이 3시간여에 달하기 때문에 기존 상영 시간에 한 시간은 더 붙인 게 아닐까 의심했지만 실제로 늘어난 상영시간은 15분여에 불과하다. 즉 원래도 긴 영화였다는 얘기다(영화덕후를 자처하지만 아직까지도 보지 못한 고전 걸작이 많다는 점은 부끄럽기도 아쉽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걸작이라도 재미없는 고전은 재미없다고 말하고 다니고 별점도 낮게 주는 편이다. 영화는 무릇 재미있어야 하는 법! 중국영화에 대한 편견(..)도 있었고 특히나 중국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이기에 사전지식도 없는 편이라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영화덕후이니 그래도 극장 개봉했을 때 봐두자는 생각으로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을 관람했고 상영시간을 보고 기겁했다. 3시간 동안 재미없어서 나오고 싶어지면 어떡하지? 하지만 기우였다.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은 경극에 대해 아는 바가 극히 적은 관객도 시선을 스크린에 고정시킬 수 있는 굉장한 흡입력을 가진 이야기다. 아무리 걸작이라도 27년 전 영화이기에 젠더감수성이 부족한 면모도 있고 이후 안타까운 장국영의 죽음이 있어 영화를 감상하는 데 있어 이러한 부분들이 지속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특히 극중극인 <패왕별희>에서 우희를 연기하는 데이의 마지막(사실 데이의 삶도)은 배우 장국영의 실제 삶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많다. 그렇기에 영화의 결말을 보면서 짠하게 느껴 영화에 별 반개라도 더 주게 된 관객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홍등가를 그려내는 방식이나 주샨(공리 분) 캐릭터의 활용 등은 아쉬운 면이 적지 않다.



하지만 본 글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이런 부분들이 아니다. 영화를 관람하는 내내 경극 수련을 하는 어린 아이들을 보며 저것은 아동학대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고 끝내 데이와 샬루가 삶을 이어가는 방식을 지켜보며 이들이 평범한 삶을 희생당한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을 이어가다가 필자가 <패왕별희>를 보며 불현듯 떠올랐던 영화는 정지우 감독의 <4등>이었다. 예체능을 일찍부터 삶의 업으로 정한 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잃는지도 모른 채 많은 것들을 흘려보낸다. 대부분이 집단생활 문화(라고 쓰고 필자는 군대문화라고 읽는다)와 일상적인 폭력에 노출되며 서서히 잠식되어 가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합리적인 문제들을 묵과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아직까지도 국가대표들이 코치로부터 겪는 폭력에 대해 대부분이(심지어 일반 시민들조차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4등>의 준호(유재상 분)는 이에 대해 저항했지만 아빠인 영훈(최무성 분) 말고는 들어주는 이가 없고 사실상 영훈조차 '맞을 짓을 했으니 맞았겠지'라고 이미 타인에게 행해지는 폭력을 묵과한 전력이 있는 인물이다. 이는 <패왕별희>에서 고스란히 재현되는데 두지(청데이의 어린시절)와 시투(단샬루의 어린시절)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신체를 수련하고 경극을 줄줄 외며 실수라도 할 경우(심지어 실수를 하지 않아도) 일상적으로 폭력을 경험한다. 거기다 폭력에 무감해진 나머지 맞으면서도 스스로 '저는 맞아도 쌉니다'라는 말을 되뇌인다.


이들이 겪는 폭력이 단순히 비인간적이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필자도 어린 시절 예체능 계열을 업으로 삼으려다 그만둔 경험이 있기에 말하자면, 속된 말로 '맞으면 누구나 한다'. 물리적인 힘을 지속적으로 가하여 무언가를 하게 만들면 무서울 정도로 뛰어난 역량을 극한까지 끌어내는 것이 인간이다. <실미도>의 군인들이 삶을 박탈당해가며 얻은 군사력을 떠올려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들은 인간성을 상실하고 자신이 갇힌 세계 이상을 보지 못하게 된다. 데이와 샬루는 경극이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시절 아동기를 희생하여 최고의 기술을 가지게 되었지만 변한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다. 그들은 희생한 아동기로 얻은 기술이 평생을 떠받칠 자산이 될 것이라 믿었지만 그 자산이 쓸모가 없는 시대가 도래하자 다른 길을 모색할 방법조차 모른다.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평범한 아동기가 중요한 이유다.


이들이 아직까지 어린시절에 갇혀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자신의 스승에게 성인이 되어서까지 무릎을 꿇고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도록 하는 장면이다.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이들은 이제 성인이고 알아서 돈을 벌고 경극을 하고 있으며 스승의 곁을 떠난지 오래다. 즉 오란다고 갈 필요 없고 때린다고 맞을 필요 없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스승이 부르자 바로 달려가고 아내가 보는 앞에서 회초리를 맞는다(주샨이 샬루 편 들어주는데 샬루가 주샨을 나무라는 부분에서는 복장이 터질 뻔했다). 데이와 샬루는 이 장면에서 스승에게 성인이 되고 얻은 이름인 청데이, 단샬루가 아니라 어린 시절 불리던 이름인 두지와 시투로 불리고 있다. 이 장면은 후에 데이가 후배인 샤오를 훈계하는 장면에서 변주된다. 샤오는 급변하는 시대에 경극의 세상에 합류했지만 경극이 삶의 전부가 아니었기에 폭력을 휘두르는 데이에게 저항한다. 경극을 가르치려면 물리적으로 후배를 제압해야 하고, 그렇게 해서라도 극강의 기술을 키워야 한다고 믿어온 데이에게 이것은 세상이 무너지는 경험이었다. 결국 데이는 샤오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고 화려한 경극 의상들을 불태움으로서 자신의 세상을 스스로 무너뜨린다.


<패왕별희>를 보며 아마도 경극의 세상에 갇혀 사는 것은 데이뿐이고 샬루는 바깥 세상과 왕래를 하고 있다고 믿은 이들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간접적으로 표현되는 샬루에 대한 데이의 마음과 단장을 맡은 샬루와는 달리 단원으로서만 활동하는 데이의 위치 때문에 그렇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샬루도 경극의 세계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주샨이 샬루에게 경극은 이제 그만두고 남들처럼 아이낳고 평범하게 살자고 하자 샬루는 경극을 하지 못하면 할줄 아는 것이 없다며 절규한다(실상 샬루는 극중극인 <패왕별희>에서 강인한 남성인 패왕을 연기하며 현실세계에서의 자신도 패왕일거라 믿어왔지만 이를 그만두면 평범한 사람 1이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다른 직업을 거부하는 것이다). 샬루가 주샨에게 휘두르는 가정폭력은 근현대를 살아온 남성상이라고 보여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샬루가 겪어온 세상을 아내에게 투영하는 것에 불과하다. 현대의 운동선수 출신 남성들이 결혼하고서도 아내에게 폭력을 저지르거나 아이를 대하는 방법을 모른다고 하소연하는 것을 떠올려 보라. 이들은 성인 남성이 아동(혹은 약자)을 대하는 방법으로써 폭력 이외에는 보고 들은 바가 없기 때문에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직도 예체능 계열은 물리적인 폭력이 불가피하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그렇게까지 해서 이들이 얻는 극강의 기술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예를 들어 축구선수들이 극한의 체력과 기술을 가지고 월드컵 혹은 올림픽에서 우승했을 때 그 영광은 단순히 그들에게만 돌아가는가? 그들은 국격을 높이기 위해 아동기를 희생당하는 대신 해당 결과물을 얻었을 때 남은 여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댓가(군대 면제라든지 연금)를 받도록 암묵적인 계약을 맺은 것이다. 이들이 빼앗긴 아동기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로 인해 이들은 주체적으로 변화해가는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다. 운동선수들이 순진해서 사기를 잘 당한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말이 아니다. 또한 대부분이 남은 여생에 댓가를 받지도 못한다. <4등>의 광수(박해준 분)는 끝내 국가대표 자격을 박탈당하고 프리랜서 강사로 근근이 먹고 산다. 경극에서 마치 우희가 살아돌아온 것 같았다는 평을 들었던 데이조차 샤오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경극의 세계에 자신을 영원히 가두어 버리고 만다. 이 과정에서 희생되는 이들은 이들 자신만이 아니다. 주샨도 샬루의 삶에 함께 희생된 것이며 준호의 엄마도 준호의 수영 활동에 일상을 희생하며 끌려다닌다(극중에서 엄마의 이름은 나오지도 않는다).


<패왕별희>는 경극을 아름다운 미쟝센으로 스크린에 박제한 작품으로, 장국영의 젊은 시절을 어떤 영화보다도 아름답게 기록한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또한 급변하는 중국의 시대상과 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무너진 개인들의 삶을 묘사한 작품으로도 평가될 것이다. 이 모든 평가에는 정답이 없고 개개인마다 받아들이는 바가 다른 만큼 영화의 가치도 다양하다. 필자는 영화의 초반, 두지의 어머니가 극단에 두지를 보내며(버리며) 두지의 여섯번째 손가락을 잘라버리는 장면이 필자에게 본 영화가 기억되는 감상을 가장 잘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두지의 여섯번째 손가락은 두지가 잃어버린 어린 시절이며, 두지가 영원히 돌려받지 못할 자신의 개성이었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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