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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May 18. 2020

유사성과 획일성 사이의 잔혹한 양자택일

유사성에 대한 착각

영화에 대한 감상들을 기록으로 남겨보자는 생각이 들 즈음 친구로부터 요청을 받았다. <더 랍스터>를 봤는데 짜증이 났고 내용은 찾아보니 이해를 하겠는데 감독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차세대 감독 중 가장 흥미로운 감독 중 하나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의 작품은 거진 챙겨보았기 때문에 한 번쯤 리뷰를 써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더 랍스터>는 2015년 작품으로 이후 란티모스 감독은 <킬링 디어>, <더 페이버릿:왕의 여자>등을 감독하며 전성기를 맞이하는 중이다.


란티모스 감독의 세계는 대부분이 기괴한 설정을 지니고 있다. 시각적인 테러는 그다지 많지 않은 편이지만 설정만 들었을 때는 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었기에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가장 기이하게 느껴졌던 <송곳니>는 작은 세계에 갇힌 가족의 이야기였고(찾아보면 이렇게 단순하게 표현되기에는 정말 괴이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될 것..) <킬링 디어>는 그리스 신화를 차용해 한 소년의 저주가 멀쩡한 가족을 잠식해가는 이야기였다. 희한하게도 독특한 설정을 유지하는 가운데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들은 언제나 가족이 그 중심에 있다는 느낌이 든다. 대놓고 가족 이야기인 <송곳니>도 그렇지만 <킬링 디어>도 결국 없는 가족을 열망하는 자와 있는 가족이 파국으로 몰리는 이야기니까. <더 페이버릿>도 연장선상에서는 결국 가족이 이야기되고 있다. <더 랍스터>도 가족에 관한 이야기일까? 조금 과장한다면 정확히는 사회에서 주입한 '정상 가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2015년은 아직 한국 사회에서 비혼에 관한 논의가 그다지 활발하지는 않았던 시기지만 영화를 보면서 연애공화국이라 불리는 한국사회의 현실을 감독이 알고 비튼 건가 싶을 만큼 와닿는 바가 많았다. 이혼이든 사별이든 자신의 짝을 잃게 되면 짝을 찾는 호텔에 45일간 머물며 자신의 짝을 찾아야만 하는 이 세계는 어색함으로 가득하다. 주어진 시간 안에 짝을 찾지 못하면 동물로 변하(..)는 세계이기에 다들 짝을 찾기에 필사적인데 이 짝을 찾는 방식이 희한하다. 다들 자신과 비슷한 부분이 있는 누군가를 찾으려고 하는데 이런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면 아무나(정확히는 아무나는 아닌 것 같지만) 찍어서 그와 비슷한 부분을 억지로 연출한다. 절름발이 남자(벤 휘쇼 분)는 코피를 흘리는 여인을 발견하고 수영장에서 코를 부딪혀 코피가 나는 척 연기한다. 극중에서 유일하게 이름을 알려주는 데이비드(콜린 파렐 분)는 짝을 찾는 것이 생존의 문제임을 깨닫고 누구도 짝으로 선택하지 않을 것 같은 여인을 짝으로 받아들일 계획을 세운다.


위 설정만 들어도 충분히 이상한 세계관인데 여기에 이들이 입소하는 호텔의 설정은 더욱더 흥미롭(..기묘하)다. 이 호텔은 양자택일의 세계다. 데이비드는 입소 시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하고(양성애자는 선택지에 없다) 신발도 중간 사이즈를 고르지 못한다(개인적으로 발 사이즈가 245라 10단위로 출시되는 브랜드에 강력한 불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순간 데이비드에게 감정이입했다). 그리고 짝짓기에 실패 시 변할 동물을 고를 수 있는데 데이비드는 장수하며 죽을 때까지 번식을 하는 동물이라는 이유로 랍스터를 고른다. 호텔에 입소하여 도망칠 때까지 마음에 맞는 상대방을 찾지 못하는 데이비드가 위와 같은 이유로 랍스터를 선택한 것은 영화를 볼수록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데이비드는 이 무시무시한 호텔에 짝짓기에 실패하여 강아지가 된 자신의 형을 데리고 입소하게 된다.


이 호텔에는 한가지 더 특이한 규칙이 있는데, 짝을 찾지 못하더라도 이 세계의 규칙을 거부하고 야생으로 나가 무적의 솔로부대를 형성한 이들을 죽이면 한 명당 하루씩 더 호텔에 인간으로서 머물 권리를 부여한다. 대부분은 어쩔 수 없이 사냥을 시작하지만 사냥을 하기 위해 짝을 찾지 않기를 선택한 자도 있다. 이 영화의 기본적인 세계관을 설명하는 데만 세 단락이 걸렸는데 사실 이조차도 전부 설명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로써 다들 란티모스 감독의 변태적인 취향을 파악하는 데는 충분했을 것이라 믿는다.


다시 호텔의 짝짓기 경쟁으로 돌아가면, 절름발이 남자가 짝을 억지로 만들기 위해 코피를 터트리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기묘하면서 유머스러운 장면 중 하나다. 혹시나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호텔에서는 비슷한 사람과 짝을 지으라고 강제하지는 않는다. 호텔로 끌려온 자들이 어떻게든 짝을 만들기 위해 비슷한 사람을 찾아나서는 것일 뿐이다. 서로 다른 사람보다는 비슷한 사람이 결혼할 확률이 더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기는 하지만 사실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매력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자신과 비슷한 사람과 잘 지내지 못하는 동족혐오적 성향을 지닌 사람도 있고, 비슷하면 친한 친구나 가족처럼은 느껴지더라도 연애감정은 생기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왜 이 호텔의 구애자들은 그렇게도 유사성에 목숨을 거는 것일까. 아마도 사회에서 주입한 정상가족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일 것이다. 이 호텔의 목적은 결국 커플을 양산하여 사회로 내보내는 데 있는데, 사회에서는 커플이 한 집에 살아야 한다. 룸메이트를 가져본 이들은 알겠지만 한 지붕 아래 누군가와 함께 살려면 다르기보다는 비슷한 것이 여러모로 편리하다(샤워시간을 제외한다면..). 결국 이들은 사회의 정상가족 프레임에 의한 희생양인 동시에 그 프레임으로 생존하려는 자들이기도 한 것이다. 이 호텔에서는 심지어 짝을 이룰 경우 며칠 지켜보다가 자녀를 주기도(낳는 게 아니라 어린 아이들이 지급된다) 한다. 부부가 반드시 아이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상기해 보면 이 영화가 얼마나 정상가족 프레임에 집착하는 사회를 비꼬는지 엿볼 수 있다.


왜 사회에서는 정상가족이라는 프레임을 만들고 국민이 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가기를 그토록 독려하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통제와 예측이 쉽기 때문이다. 국민 전원을 이성애자로 상정하고 전원이 결혼에 성공하여 일정 수의 자녀를 가진다고 가정할 때 미래의 가구 수와 세수를 예측하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하며 세수의 현상유지가 가능하다. 왜 하필 이성애자냐고? 그래야 가정을 이루었을 때 세대원을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동성커플의 경우 입양이나 정자기증을 통한 인공수정 등이 가능하지만 전자는 재생산이 아닌 이미 있는 국민을 양육하는 것일 뿐이고 후자는 자연 임신출산에 비해 예측이 어렵다(대리모는 아직까지 윤리성 논쟁이 활발한 단계라 제외하기로 한다). 전 국민을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로 나누어도 이럴진대 양성애자라니 국가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다. <더 랍스터>의 호텔은 이러한 현대 사회를 그대로 반영한 소집단이며 호텔의 규칙은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을 시각적으로 풀어낸 것일 뿐이다. 무적의 솔로부대(..)를 저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회의 규칙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처단을 명하지만 이를 처단하는 자에게는 대단한 선심이라도 쓰는 마냥 해당 사회에머물며 복지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하여 정상가족이라는 틀에 스스로를 우겨넣도록 독려하는 것이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호텔을 나와 무적의 솔로부대에 합류한 데이비드는 또다른 아이러니에 부딪힌다. 솔로부대 내에서 사랑에 빠지고 만 것이다. 납득되지 않는 규칙의 사회를 빠져나오자 또다른 황당한 규칙을 가진 다른 사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외톨이 대장(레아 세이두 분)이 이끄는 이 외톨이 군단의 규칙은 사랑에 빠지지 말 것(..)이다. 외톨이 군단은 필요한 물건을 구하러 시내에 나갈 때에는 짝을 이루어 커플인 척 연기하지만 그들만의 사회로 돌아오면 철저히 군중 속의 혼자가 될 것을 강요한다. 이들은 조용히 해야 한다는 명목 하에 이어폰을 끼고 다같이 같은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춘다(말로 설명하니 잘 모르겠지만 실제로 영화에서 해당 장면을 보면 정말 우스꽝스럽다). 실상 이해되지 않는 규칙을 강제한다는 측면에서는 호텔이나 외톨이 군단이나 다를 것이 없는 셈이다. 커플이 되길 강요당한 호텔에서는 커플이 되기 싫어 탈출한 데이비드는 외톨이 군단에서는 정작 사랑에 빠져 양쪽 세계에서 역적으로 몰린다. 조심했지만 외톨이 대장에게 이를 들키자 대장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데이비드와 사랑에 빠진 근시 여인의 눈을 완전히 멀게 만들어 버린다. 왜 하필 눈인가 하면 데이비드와 근시 여인은 몰래 소통할 수 있는 수단으로 자신들만의 비밀 수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외톨이 대장은 단순히 근시 여인의 시력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이들의 의사소통 수단을 함께 제거하여 집단의 획일성을 되돌리려 한다.


호텔과 외톨이 군단은 전혀 다른 세계처럼 보이지만 두 세계의 동작 원리는 동일하다. 호텔은 파트너와의 유사성을 강요당하지만 외톨이 군단은 개인의 개성을 완전히 몰살시켜 집단으로 동화되길 강요한다. 두 집단은 결국 거대한 양자택일의 세계를 기반으로 한 것이며, 이 위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을 유지하고자 하는 개인을 철저하게 짓밟는다. 호텔에서는 규칙을 거부한 개인을 동물로 바꿔버리고 외톨이 군단에서는 이에 상응하는 보복이 잇따른다. 근래 비혼과 미혼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는 것을 보면 마치 <더 랍스터> 속의 세계를 보는 것만 같다. 확고하게 비혼으로 마음먹은 사람도 마음이 맞는 누군가를 만나거나 성 정체성에 대해 새롭게 깨달을 경우 언제든 기혼의 삶을 살아갈 수 있으며 기혼인 상태이거나 기혼을 원하는 미혼일지라도 가치관의 변화로 비혼의 삶을 살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누군가가 미혼인지 비혼인지 기혼인지를 확실하게 알고 싶어한다. 고용주가 고용인에게 기혼 여부를 물어보는 것은 결국 고용인을 통제 하에 두겠다는 의미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 기혼과 연령을 고려할 때 일반적으로 구성원 재생산의 시기가 예측 가능해지고 이를 통해 고용인의 업무 효율을 가늠할 수 있게 된다. 기실 이미 서양에서는 동거의 형태가 나타난 지 오래고, 정자기증을 받아 결혼하지 않은 채 출산하는 여성이 이미 있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서양 사회에서 이들이 예측하고자 하는 바는 사실 무의미하다. 그렇기에 사회는 정상 가족의 프레임을 구성하여 구성원을 이 틀 안에 어떻게든 넣으려고 하는 것이고, 이는 영화에서 호텔과 외톨이 군단의 세계로 구현되었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문화라는 미명 하에 개인의 삶을 통제하는 폭력으로 행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데이비드는 이 유사성과 획일성을 거부하는 데 성공했을까. 외톨이 대장에게 재보복(..)을 가하고 외톨이 군단에서 도망친 데이비드는 근시 여인을 데리고 도시로 향한다. 안경을 낀 데이비드가 안경을 끼지 않은 근시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이 영화가 스펙트럼과 양자택일에 대해 비유하는 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허무하게도 도시로 향한 데이비드는 유사성을 받아들일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이 유사성을 요청하는 것은 이제는 장님이 된 근시 여인이다. 또한 이 영화에서 처음부터 들려오는 내레이션을 읊조리는 것 또한 근시 여인이었다. 즉 근시 여인은 이미 이 모든 사건을 겪은 후 회고하듯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으며, 이미 데이비드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담담하게 오래 전 이야기를 하듯이 내레이션을 들려주던 근시 여인은 영화의 마지막 의자에 앉아 데이비드를 기다리고 있다. 데이비드는 불합리한 규칙을 강요하는 두 사회에서 탈출했지만 이들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데는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들은 결국 다시금 유사성의 세계로 귀환한 것이며 이 곳에 머물겠다는 의지를 암시함으로써 양자택일의 세계에 불복했다고 표현하는것이다. 


인간은 유사한 이에게 끌리는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끌린 이후 유사성을 찾는 것인가? 코피를 같이 흘리면 비슷한 사람이니 잘 살수 있는 것일까?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식조차 서로 다르다. 이 넓은 세상에서 서로 다른 배경과 경험을 가지고 살아온 이들 중에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을 거라는 가정부터 착각이 아닐까 싶다. 유사성을 억지로 찾으려 했던 호텔의 남녀는 결국 거짓된 삶을 살거나 다른 존재로 변화해야 했고 유사성 찾기를 거부하고 도망친 이들은 이보다 심한 획일성을 강요당했다. 란티모스의 세계는 이렇듯 허무함과 풍자로 가득하지만 현 사회를 돌아보게 하는 뒷맛이 있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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