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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May 25. 2020

죽음을 눈앞에 둔 뮤턴트가 돌려받은 것

로건의 것이자 아니었던 이름, 호칭, 소속

*<로건>의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코로나 특수 재개봉은 결국 마블까지 이어졌다. 재개봉을 잘 시켜주지 않는다는 디즈니도 코로나 시즌은 특별히 예외 처리를 해준 것이다. 마블민국이라 불릴 만큼 마블영화를 사랑하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어쩌면 행복한 시즌일지도 모른다. 어벤져스 시리즈가 재개봉하자마자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잠식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와중에, 판권이 마블로 돌아가기 직전에 개봉된 한 많은 울버린의 마지막 이야기 <로건>이 함께 재개봉했다. 필자는 사실 <로건>을 4D로 보고 싶은 마음에 재관람을 하게 되었고 평소 4D영화 티켓값보다 가격도 쌌다.


*혹여나 하는 마음에.. 저 영화볼 때 눈치게임해서 타 관객과 떨어진 자리에서 보고, 눈치게임 실패 시에는 마스크 끼고 봅니다ㅠㅠㅜ


<로건>의 가장 큰 특징은 서부극의 형태를 빌려왔다는 것이지만 기실 현 대한민국의 젊은 관객에게 이는 그다지 어필할 만한 포인트가 아니다. 서부극을 보며 자란 세대도 아닐 뿐더러 개척자의 후손도 아니기에 서양인들이 서부극에서 느끼는 향수를 느낄 수도 없고 서부극을 모티브로 한 영화들을 본다 해도 딱히 연상되는 영화들도 없다. 영화덕후를 자처하는 필자조차도 서부극이라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상당히 근래에 제작된 <매그니피센트 세븐>이며 이에 연상되는 영화는 심지어 이병헌이 이전에 출연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다(부끄럽게도 그 다음에 떠오르는 영화는 <장고:분노의 추적자>다..). <로건>에 관한 많은 평들은 <로건>이 서부극의 형태를 빌려 얼마나 성공적으로 시리즈를 마무리지었는가에 관한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영화를 전공하지 않은 대부분의 관객들에게는 와닿지 않는 평가들이다. 이는 평론가의 잘못이 아니며 서부극을 챙겨보지 않은 관객의 잘못도 아니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서부극에 관한 이야기는 접어 두고 울버린이라는 한 많은 캐릭터가 로라를 통해 끝내 돌려받은 자기 자신의 유산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울버린이라는 캐릭터는 많은 것을 가졌지만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캐릭터이기도 하다. 엑스맨 시리즈 가운데 가장 많은 영화에 출연했고 가장 잘 알려진 캐릭터이며 설정상 가장 나이가 많지만(<엑스맨:아포칼립스>에 등장하셨던 그 분을 제외한다면) 힐링 팩트로 인해 가장 오랫동안 젊은 육체를 유지해오기도 했다(좋은 작품에도 많이 출연했지만 그만큼 망작도 많이 양산했다는 것도..). 이는 휴 잭맨이라는 배우의 스타성에 기반한 것이지만 잘 알려진 대로 휴 잭맨이 처음 울버린 역에 캐스팅되었을 때는 무명의 신인배우였다. 마치 신인시절의 휴 잭맨 그 자신처럼 울버린은 시작할 때에는 이름도 기억도 없었지만 시리즈의 마지막에 와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랑하는 여인들을 (최소한) 두 번은 잃어야 했고 이미 한번 기억을 잃어버린 데 이어 <엑스맨:데이즈 오브 퓨쳐 패스트>에서는 희생정신을 간만에 발휘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기억을 가진 채 깨어나야만 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오래 프로페서X의 곁을 지킨 엑스맨이지만 가장 엑스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는 이름을 여럿 가지고 있지만(울버린, 울비, 로건 등) 정작 자신의 원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며, 제대로 된 가족을 가져본 적이 거의 없고 가족에 대한 기억을 잃은 탓에 항상 호칭이 불명확하고(자비에 스쿨에 있을 때는 교수로 불리기도 하지만 진심을 담아서 교수라 부르는 학생을 본 적이 없다) 소속이 없이 언제나 유랑생활을 해온 비운의 캐릭터인 셈이다.


서부극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지만 사실 이런 배경은 서부극에 상당히 적합해 보인다. 서부극은 대부분 은퇴한 총잡이가 오랜만에 총을 잡고 마을에 침입한 악당들을 물리치는 서사를 담고 있는데(이는 필자가 요약한 내용이 아니라 영화 <우먼 인 할리우드>에서 지적한 내용이다) 사연을 가진 비련의 총잡이로서 근미래에 가장 잘 어울리는 역할에 울버린만한 캐릭터가 있을까. <로건>은 이런 서부극 설정을 그대로 가져온 것처럼 보이지만 로건의 유전자적 딸인 로라(다프네 킨 분)가 나타나며 이 모든 설정을 뒤집어 엎는다. 그렇기에 서부극을 성공적으로 차용했다는 평 이외에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을 우선 짚어두고 싶다. 로라는 울버린이 무조건적으로 지켜야 할 약자도 아니고(심지어 초반에는 자비에 교수를 데리고 도망친다고 로라를 중무장한 성인 남성 열댓명과 싸우게 놔두고 튀려고 한ㄷ..) 차후 지켜야 할 가족이 있는 성인으로 자라날 소년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서부극을 떠올렸을 때 연상되는 캐릭터인 미망인과 아들(왜 보통 딸이 아니라 나이어린 소년인지..), 총잡이 중 로라는 그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로라가 나타나며 그에게 가장 먼저 돌려준 것은 그의 이름이다. 로건은 로라에 대한 정보가 담긴 종이를 들여다보며 로라에게 사용된 DNA의 소유주가 제임스 하울렛임을 확인한다. 이것은 로건의 본명인데 이를 알아보는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는 이미 과거의 기억을 어느 정도 되찾았거나 자신에 대한 기록을 찾아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로라가 자신과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매개체가 로건의 본명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역설적이게도 영화의 제목마저도 <로건>이지만 그는 로라라는 생면부지의 가족을 통해 자신의 본명을 확인하고 자신의 역할을 직감하는 것이다. 또한 관객도 이 장면을 통해 그간 자신의 과거를 알지 못해 고통받았던 로건이 자신의 정체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에 맞게 그는 부정하고 분노하지만 끝끝내 자신이 로라의 아버지임을 인정하고 딸을 후대에 살려 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된다. 


이름은 엑스맨 시리즈에서 의외로 중요하게 활용되는 요소 중 하나인데, 슈퍼히어로 시리즈가 기본적으로 코드네임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도 하지만 이를 가장 먼저 다채롭게 활용해온 시리즈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기존 슈퍼히어로인 배트맨이나 슈퍼맨 등은 코드네임이 있었지만 히어로로서의 별명이라기보다는 고유명사처럼 느껴지는데다 엑스맨 이전까지 각 히어로 무비에서 유의미한 별명을 가진 히어로는 대체로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엑스맨 프랜차이즈는 거의 최초로 뮤턴트라는 존재를 만들어 수많은 히어로들을 뷔페식으로 보여줌으로써 각 히어로는 모두 생각하는 바가 다르고 특징이 있다는 사실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는데 이 때 가장 잘 활용된 방식이 이들의 특징을 반영한 코드네임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스톰은 날씨를 조정할 수 있고 미스틱은 모습을 자유자재로 변형시킨다(신비롭다mysterious고 해서 미스틱). 즉 이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은 정체성을 준다는 것인데 울버린은 계속해서 새로운 정체성을 얻어가지만 자신이 최초에 누구였는지는 모르는 상태였다. 정말 불운하게도 브라이언 싱어가 만들어낸 최초의 프랜차이즈에서 기억을 찾아가던 와중 감독이 바뀌는 바람에 <엑스맨:최후의 전쟁>에서는 기억을 찾다 말았는데 캐릭터의 설정이 현실에 반영된 것만 같다. 그가 사용하던 로건이라는 이름은 사실은 친아버지의 성이었는데 자신의 근본을 알지 못하던 이에게 드디어 최후에 이르러 이름을 돌려주었다는 것, 그리고 그 이름을 돌려준 이가 역설적으로 코드네임을 (아직) 부여받지 못한 로건의 딸이라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또한 영화 중반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던 로라가 로건에게 친구들을 찾으러 가자고 조르며 로건을 괴롭게 만드는 방법 중 하나로 친구들의 이름을 지속적으로 되뇌이는 것도 이름에 대한 시리즈의 애증을 짐작케 한다.



로건에게 이름을 돌려준 로라는 로건이 죽고 나서야 그에게 호칭을 부여한다. 아마 로건은 자신의 본명을 보고서 로라가 자신에게 생전에 불렀어야 할 호칭을 직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포옹 한번 보여주지 않던 애증의 부녀는 로건이 죽을 때가 되어서야 서로를 바라보며 슬퍼하기 시작하는데 로건이 죽을 때가 되어서야 로라는 비로소 그를 "아빠(daddy)"라고 부른다. 로건에게 멀쩡한 호칭이 없었다는 것은 그가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했다는 점을 상기시키는데 이는 교수(혹은 교장선생님)라 불렸던 프로페서X, 닥터라 불렸던 진 그레이와 비교된다. 하지만 그는 연구소에서 자란 탓에 제대로 사회화되지 않은 로라를 붙잡고 유일하게 혼낼 줄 아는 교육자 역할을 하고, 자신을 무적으로 만들었던 아다만티움이 자신을 죽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돌이켜 보면 <엑스맨>에서도 미스틱의 농간으로 자비에 스쿨을 떠난 로그를 달래 데려오는 것은 교육을 줄곧 맡았던 다른 엑스맨들이 아닌 울버린이었다. 오래 방랑생활을 하고 지인들을 지나치게 많이 떠나보낸 탓에 표현이 거칠어 <엑스맨:데이즈 오브 퓨쳐패스트>에서는 오랜만에 만난 비스트/행크를 보자마자 주먹질을 시작하지만 우리는 결국 친구가 될 것임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또한 해당 영화에서 모두가 희망을 잃어버렸을 때 마지막까지 찰스 자비에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그가 미스틱을 살인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게 한 것도 울버린이었다. 이토록 많은 역할을 수행해온 그에게 죽고 나서야 얻을 수 있었던 유일한, 제대로 된 호칭이 "아빠"였다는 점은 매우 아이러니하다(특히 시리즈 내내 멀쩡한 가족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더욱 그러하다).


울버린이 마지막으로 돌려받은 것은 소속이다. 이는 제대로 된 호칭이 없었다는 점과 직결되는데 그에게 부여된 호칭이 "아빠"인 것과는 다르게 그는 사후 로라에 의해 엑스맨으로 인정받는다. 울버린이 엑스맨 소속임은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봤을 때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는 자비에 스쿨에서 제대로 된 교수인 적이 없었고(<엑스맨:엑스투>에서 아이스맨 바비의 집을 방문하자마자 맥주를 퍼마시자 바비의 부모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봤던 것을 떠올려보라..) 언제나 다른 엑스맨과 함께 전투에 임하지만 어딘지 프리랜서의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는 아마도 유랑생활을 지속해온 울버린이 시리즈 내내 어딘가에 소속되는 것을 거부해온 티를 내왔기 때문일 것이다. 카메오로 출연한 <엑스맨:퍼스트 클래스>에서 젊은 시절의 찰스 자비에(제임스 맥어보이 분)가 술집에서 그를 발견하고 스카웃하려 하자 꺼지라고 하는 장면이 이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준다(후에 <엑스맨:데이즈 오브 퓨쳐 패스트>에서 찰스는 이것을 기억해 내고 야 니가 먼저 꺼지라며ㅡㅡ 라고 소심한 복수를..). 거기다 망작이긴 하지만 그는 <엑스맨:최후의 전쟁>에서 사랑했던 엑스맨이자 동료인 진 그레이를 죽이고 말았다. 그에게 엑스맨이 된다는 것은 결국 사랑하는 누군가를 또다시 잃어야만 하는 것일 뿐이기에 관객은 무의식중에 그가 결국에는 자비에 스쿨을 떠날 것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가장 마지막까지 자비에 교수를 곁에서 지킨 엑스맨이었으며 작중 코믹스에도 등장하여 로라로 하여금 로건을 따르게 만든다. 그리고 로건이 죽자 로라는 그를 묻은 무덤의 십자가를 돌려 X자로 만들고 그가 진정한 엑스맨이었음을 관객에게 상기시킨다.



로라가 멕시코의 연구소에서 만들어진 존재라는 점은 아마도 이민자를 대하는 (트럼프 정부로 대변되는) 미국의 현 태도를 비판하기 위해 설정되었을 것이다. 엑스맨 또한 소수자이자 차별받는 존재라는 설정을 기저에 깔고 있기에 이 설정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하필 울버린의 시리즈 마지막에 이르러 스페인어 억양이 섞인 영어를 사용하는 로라의 모습은 제 아버지인 울버린과 마찬가지로 긴 세월을 정착하지 못하고 유랑해야 할 로라의 운명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로라는 아버지의 희생으로 그 자신은 갖지 못했던 동료들을 얻을 수 있었고, 작중 인용된 서부극의 대사와는 다르게 로라의 인생은 앞으로도 수없이 많은 총성으로 가득하겠지만 로라는 최소한 자신의 뿌리를 알 수 있게 되었다. 휴 잭맨이 울버린으로서 은퇴하고 20세기폭스사가 디즈니에 흡수되며 엑스맨은 다시 마블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어 앞으로 로라의 이야기는 들을 수 없겠지만(마블의 수장 케빈 파이기는 엑스맨이 MCU에 합류하려면 적어도 10년은 걸릴 것이라 발표한 바 있다ㅠㅠㅠㅜㅜ), 적어도 로라는 관객이 추억하는 울버린의 최후를 가장 따듯하게 만들어준 뮤턴트가 되었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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