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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Jun 01. 2020

기억의 모순에 경의

그것을 기억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인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일본 작가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아닐까 싶다. 설령 그의 작품을 한 번도 읽어본 적 없는 이라도 이름은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백야행>의 경우 한국에서도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고 기실 히가시노의 작품 대다수가 일본에서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본 글에서 이야기할 <기도의 막이 내릴 때>는 2018년도 작품으로 드라마 <신참자>의 후속 이야기에 해당하며 역시 히가시노의 작품을 기반으로 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백야행>을 읽은 이후 히가시노의 작품을 거의 읽지 않았는데(일본 특유의 찝찝한 정서가 극대화된 소설로 기억한다), 드라마 <신참자>는 재밌게 보기도 했고 간만에 아베 히로시의 연기를 볼 수 있다는 점에 <기도의 막이 내릴 때>를 관람했다. 단순한 추리물처럼 보이지만 본 영화는 기억에서 시작하여 기억으로 마무리되는 영화다.


서양 추리물과 동양 추리물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서양에서는 Who와 How에 초점을 맞추는 데 반해 동양의 추리물들은 Who와 Why에 초점을 두는 것 같다. 최근의 예시로는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모두 받았던 <나이브스 아웃>이 있다. <나이브스 아웃>을 보며 누가 어떻게 할란 트롬비를 죽였는지 궁금해하는 관객은 많았겠지만 왜 죽였는지가 궁금했던 관객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살인 동기가 할란 트롬비의 유산이라는 것으로 시작부터 자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까닭에 서양에서 유독 사이코패스 스릴러물이 많이 보이는 것 같다. 셜록 홈즈의 숙적 모리아티 교수가 수많은 사건을 일으키고 다니는 이유도 본인만의 개똥철학 때문이지 눈물나는 사연이 있어서가 아니다. 하지만 동양의 추리물, 특히 일본의 추리물에서는 why에 그토록 귀를 기울이는 경향이 강한데 이는 아직까지도 연재되는 <명탐정 코난> 시리즈나 <소년탐정 김전일> 시리즈를 보면 확연하게 드러난다(만화라 신빙성이 없다고 여겨지는 독자들에게는 김전일의 할아버지인 코우스케가 등장하는 요코미조 세이시의 소설들을 권한다). 물론 추리물에서 가장 큰 재미는 '불가능해 보이는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가'이지만, 탐정이 이를 풀고 범인을 지목하고 나면 반드시 범인의 눈물없이 들을 수 없는 과거사가 봉인해제된다(범죄 트릭보다도 매번 다른 사연들을 어찌 만들어내는지 요즘은 그게 더 궁금할 지경이다..). 아마도 그런 탓에 서양의 추리물에서는 물리적인 증거를 확보해 추리하는 방식이(CSI 드라마 시리즈가 만들어진 데는 이런 배경이 한몫하지 않았을까), 동양의 추리물에서는 탐문 수사로 추리하는 방식이 유독 두드러진다. 탐문 수사는 결국 용의자 및 목격자들의 기억을 토대로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 탐문 수사와 기억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 <기도의 막이 내릴 때>이다.



영화는 카가 형사(아베 히로시 분)의 어머니 타지마 유리코에 대한 회상으로 시작된다. 유리코를 고용했던 고용주는 주점을 운영하는 마담이었는데 유리코가 죽자 유리코의 가족을 수소문하여 형사인 카가 쿄이치로를 찾아낸다. 카가 형사는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여 가져가면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묻지만 고용주는 도리어 그에게 유리코는 알 수 없는 사람이었고, 가족에 대한 기억을 일절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카가 형사가 어렸을 적 가출했기에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카가 형사는 이후로 어머니의 연인이었다는 와타베 슌이치의 행방을 수소문하지만 와타베 슌이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할 뿐 형사의 직함으로도 찾을 수 없는 사람이었고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 16년의 세월이 흘러 니혼바시 부근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한 아파트에서 중년 여성의 시체가 발견되지만 아파트의 소유주는 피해자가 아니다. 또한 강변에서 불탄 남성의 시체가 발견되는데 두 시체 모두 교살의 흔적이 있어 동일 살인범으로 보이지만 진실을 파고들수록 알 수 없는 것이 더 많아질 뿐이다. 또한 조사를 하면 할수록 사건이 카가 형사와 관련이 있음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애초에 사건을 맡았던 마츠미야 형사(설정상 카가 형사와 사촌관계다)는 아파트에서 죽은 시신의 신원을 알아내고 탐문 수사를 시작한다. 이 때 방문하는 요양원에서 유명 연출가의 어머니인 아사이 아츠코를 만나게 되는데, 아사이 아츠코에 대한 설명은 역시나 요양사의 기억에 의존한다. 죽은 여성은 우연히 요양원에서 아사이 히로미(마츠시마 나나코 분)의 어머니를 보게 되었고, 기억 속의 그녀를 떠올리게 된다. 후반부에 가서야 밝혀지지만 기실 모든 사건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요양사는 그 때 아사이 아츠코가 접시며 주변 물건들을 모두 집어던졌다고 회상하고, 이는 실제로 마츠미야 형사가 201씨라 불리던 아사이 아츠코를 탐문하자 재현됨으로써 사실로 드러나는 것처럼 보인다(접시를 집어던졌다는 부분은 회상장면도 없다). 아사이 아츠코의 딸이 연출가 아사이 히로미라는 것을 알게 된 마츠미야 형사는 아사이 히로미를 만난 곳에서 히로미와 카가 형사가 함께 찍은 사진을 발견하고 카가 형사에게 조언을 구한다. 이 때 마츠미야 형사는 또 한번 히로미에 대한 기억을 카가 형사에게 묻는다. 카가 형사는 미인이었다고 우선 답하지만 곧바로 히로미가 했던 이상한 발언을 떠올린다. 기억에서 기억으로 이어지는 이 사건은 새로운 기억을 볼 수록 미궁에 빠진다. 인간의 기억이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모든 기억의 피스를 맞춘 전체 퍼즐을 볼 수 없기 때문일까.



아마도 동양에서 주된 정서가 아닐까 싶지만 사람들은 망자에 대한 기억을 미화하는 경향이 있다. 카가 형사는 어머니가 집을 나갈 때까지 시댁 식구들로부터 어머니를 지켜주지 못했던 아버지를 매정한 인간으로 기억한다. 카가의 아버지와 따듯한 기억을 나눈 간호사의 이야기에도 당신은 약하고 착해진 아버지를 보았기 때문이며, 자신은 평생에 걸쳐 잔인한 아버지만을 보았다고 화를 내지만 이내 간호사가 전해준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한 마디를 듣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미화한다. 히로미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미화시킬 수 없는 이유는 아츠코가 극이 끝날 때까지 살아있기 때문이다. 히로미가 아츠코를 대면하는 장면을 보면 일본어를 아는 이들이라면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는데 마치 어머니가 자신에게 한 짓을 절대 잊을 수 없다는 듯이 표준어를 사용하던 이전과는 달리 사투리를 사용하고 있다. 비록 아츠코가 자신의 가족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긴 하지만 (일본 특유의 민폐 끼치는 것을 꺼려하는 정서 때문일지 몰라도) 현재는 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자신의 이름도 말하지 않고 있다. 반면 극중에서 죽은 인물 대다수는 작중인물 일부에게라도 기억이 미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원조교제를 한 거나 마찬가지인 나에무라 선생에게도 적용된다. 나에무라 선생은 히로미를 보호한답시고 학생들에게 거짓된 기억을 심어주고 히로미와 불륜을 저질렀으며 히로미가 경력을 이유로 임신중단을 했을 때 화를 내는, 소위 말하는 똥차같은 인물이다. 그럼에도 히로미는 그가 선물한 목걸이를 꽤나 오랫동안 걸고 다닌다. 자신을 버린 거나 마찬가지인데도 카가 형사는 어머니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법이 없다(그간 키워준 아버지가 섭섭할 법도 하다..). 어머니가 죽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16년을 니혼바시에서 유령처럼 떠돌았기에 이제와서 어머니를 악인으로 만들면 자신의 16년간의 기억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기억에 대한 미화라는 것이 기억에 대한 왜곡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기도의 막이 내릴 때>는 기억의 왜곡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카가 형사가 히로미에 대한 과거를 캐기 위해 탐문수사를 벌일 때 히로미의 동창들은 히로미에 대해 왜곡된 기억을 갖고 있다. 누가 누구를 괴롭혔는가 하는 것도 그렇지만 히로미의 아버지가 어느 빌딩에서 투신했는지, 나에무라 선생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등이다. 카가 형사가 가져온 몽타주를 보고 누군가는 나에무라 선생같다고 이야기하지만 다른 이는 전혀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은 히로미가 어느 날 증발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대답하는데, 이런 기억의 왜곡 자체가 카가 형사에게는 추리의 근거가 된다. 이렇듯 타인의 기억에 기대어 수사를 이어오던 카가 형사는 후반부에 이르러 자신의 기억을 되돌아보기 시작한다. 왜 이 사건은 자신과 이토록 연관이 있는 것이며, 그렇다면 내가 알고/기억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과정에서 카가 형사에게 도움이 된 것은 물리적인 증거인 사진이다. 다리씻기 행사의 사진 수백장을 뒤져보던 카가 형사는 사진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곳부터 기억의 상자를 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가 주목하는 것은 기억 그 자체가 아니라 기억의 내용에서 거슬러 올라가는 why이다. 왜 아사이 히로미는 5년 전 자신을 만나러 왔는가?



히로미를 만나러 왔던 동창이 히로미의 부모님을 기억하지 않았더라면, 카가 형사가 자신을 만나러 왔던 히로미를 기억에서 끄집어내지 않았더라면, 히로미가 아버지가 우연히 했던 그 말을 기억하지 않았더라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 사건은 기억에서 시작하여 기억으로 끝난다. 동시에 이 사건은 기억하고자 하는 이들의 수난기이기도 하다. 어머니를 기억하고자 하는 카가 형사나, 아버지를 잊지 못하는 히로미 모두 사건의 당사자다. 서로 잊기를 선택했다면 이 비극은 벌어지지 않아도 되었겠지만 그들은 기억을 선택하고 잔혹한 운명을 받아들인다. 앞서 <로건>의 리뷰에서 로건은 기억하지 못해 비극적인 역사를 가진 인물이 되었던 것과는 반대로 이들은 기억하기 때문에 비극적인 사건을 발생시킨 이들이 되었다. 


인간을 구성하는 것은 결국 기억일까? 필자가 영화에 대한 리뷰를 남기고자 한 이유도 영화에 대한 감상을 잊지 않고 싶어서였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기억에 의존해 살아가지만 역설적으로 24시간 가운데 인간이 기억하는 것은 수 분에 불과하다고 한다. 대다수의 인간은 삶의 수백분의 1밖에 되지 않는 기억을 위해 살아가고 기억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고자 하는 인간의 모습은 때로는 처량해 보이지만 아름다워 보이기도 한다. 장대한 해리포터 시리즈의 마지막에서 많은 독자들이 눈물을 훔치게 한 것은 스네이프 교수의 기억이 아니었던가. 마지막 권이 나오기 전까지 팬아트 속 스네이프 교수의 이미지는 머리가 기름에 쩐 늙은이였지만 7권 발매 이후로 급 미남이 된(..) 스네이프 교수의 팬아트를 보며 인간의 기억은 이렇게 왜곡되는구나를 몸소 체험했던 기억이 있다.


드라마 <신참자>는 2010년 방영된 작품으로 필자의 기억 속에서도 서서히 잊혀가고 있었다. <기도의 막이 내릴 때>를 보게 된 것도 이 <신참자>에 대한 기억 때문이니 기억에 관한 글을 쓴 이에게는 그럴듯한 관람 계기가 아닐 수 없다. <신참자>를 기억하는 관객에게 미소를 지어주듯, 엔딩 크레딧에서 관객은 <신참자> 속 배경을 다시 한번 볼 수 있다. 실로 관객의 기억에 대한 경의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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