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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Jun 08. 2020

현실과 가상의 위험한 경계

<인셉션>이 현실이 될 때

<기도의 막이 내릴 때>를 다룬 글에서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한 바 있다. 현실이 시궁창일 때 사람들은 도피할 곳을 찾아 떠나는데, 누군가는 가상현실로 가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과거로 돌아간다. <패왕별희>의 데이와 샬루에게는 그것이 극중극 <패왕별희>였고, <더 랍스터>속 남녀에게는 서로 다른 두 세계였으며, <로건>의 로라에게는 코믹스 속 친구들이 있는 곳이었고 <기도의 막이 내릴 때>의 히로미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었다. 현재는 VR과 AR이라는 기술로 놀라울 만큼 신세계를 구현하는 것이 가능해졌지만 영화 <카페 벨에포크>에서는 수작업으로 과거를 재현한다. 이전에 이야기한 영화들에서 많은 이들이 지금, 여기를 떠나려 하다가 파국을 맞았고 <카페 벨에포크>에서는 이 경계를 위험하게 넘나든다. 아마 본 영화를 보고 많은 이들이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를 떠올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필자는 <인셉션>이 가장 많이 연상됐다.



주인공 빅토르(다니엘 오떼유 분)는 직업을 잃었고 바람을 피우는 아내와도 별거당한다. 아들은 그에게 같이 일하자고 하지만 영 끌리지 않던 차에 아들의 친구 앙투안(기욤 까네 분)의 과거로 돌아가는 사업장에 무료 초대권을 선물받고 1974년으로 돌아가는 수작업 시간여행에 참여한다. 벽지가 엉성하게 붙어있는 등 어설픈 구석이 있지만 빅토르가 이야기한 대로 세세한 부분까지 고증한 과거 세트장에서 빅토르는 25년 전의 자신의 아내 마리안(정확히는 마리안을 연기하는 마르고)과 재회한다. 시간여행 서사 하면 바로 떠오르는 영화가 서너 편은 될 만큼 이제는 흔한 플롯이지만 <카페 벨에포크>는 이 모든 것을 수작업으로 재현했고 그렇기에 천장을 올려다보면 조명이 보일 만큼 참가자가 비현실을 명확히 직시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하룻밤 불장난(?)으로 끝내려고 했던 빅토르의 과거 여행은 그 달콤함을 맛본 빅토르를 중독시키고 결국 그는 있는 돈 없는 돈을 끌어모아 과거 여행을 연장시키려고 한다.


<인셉션>이 연상되었던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인셉션> 초반 수면제 약재상 유수프를 스카웃하러 가는 길에서 임스(톰 하디 분)와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는 집단으로 꿈나라 여행을 떠난 이들이 모인 곳을 방문한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그 곳에서 잠을 잔다는 이들을 보고 식겁한 임스와 코브에게 이 곳을 지키는 이는 "이들은 잠을 자러 오는 것이 아니라 깨어나기 위해 오는 것"이라 말한다. 자기 마음대로 시공간을 변형시킬 수있는 꿈에 중독된 이들은 현실을 버리고 꿈 속을 몇 년씩 방황한다. 빅토르가 재현한 과거 역시 오로지 빅토르의 기억에 의존해 살아난 공간이다. 과거 회상장면이 단 한차례도 나오지 않기에 빅토르의 기억이 실제 상황을 100% 반영했는지 관객은 알지 못한다. 빅토르의 기억 자체가 이미 왜곡되었다는 것은 카페를 나서는 마르고를 빅토르가 쫓아나설 때 알 수 있다. 빅토르는 그 순간 지금 비가 왔다고 말하지만 스태프들은 기록상 그 날 비가 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미 왜곡된 기억에 더해 앙투안은 기억을 더욱 아름답게 보여주기 위해 마르고가 마리안으로서 등장하는 순간에 조명을 쏘고 배경음악까지 첨가한다. 이미 한차례 빅토르의 머릿속에서 미화된 기억이 앙투안의 보정을 거쳐 더욱 아름답게 왜곡되는 것이다. 이 자체가 하룻밤 불장난이라면 크게 나쁠 건 없겠지만 문제는 이 가상세계가 현실을 침범하면서 시작된다. <인셉션>의 맬도 꿈과 현실을 혼동하다가 죽었고 이제 빅토르도 가상세계를 현실로 대체하려고 한다.



<인셉션>과 <카페 벨에포크>의 접점은 현실과 가상이 서로를 침범하고 있다는 데 있다. 코브의 기억 속 맬은 시도때도 없이 코브의 꿈에 나타나 코브의 일을 방해한다. 코브에게 있어 꿈은 현실 작업공간인데 이 속에 가상 존재인 맬이 침범하는 모양새를 띠는 것이다. 반대로 보면 현실에 존재했던 맬이 코브의 가상공간에 침범한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빅토르는 세트장에서 입던 유행 지난 수트를 입고 아들의 회사로 찾아가다가 비웃음을 사고 그의 가상 세계 속 마리안은 빅토르에 의해 현실로 강제 추방당한다. 세트장인 카페 벨에포크를 벗어난 빅토르와 마르고는 다른 세트장으로 점프하다가 마르고의 아파트에 당도한다. 이 공간에서 마르고는 연기하던 마리안의 외피를 벗어 원래 머리카락을 빅토르에게 보여주지만 빅토르에게 그녀는 이미 기억 속 마리안이다. 마르고는 과연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것일까, 아니면 여전히 빅토르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일까? 마르고가 마리안으로서 등장하기 직전 마르고는 분장실에서 앙투안에게 거친 말을 하며 이제 나간다고 외친다. 이 모습을 빅토르가 봤다면 빅토르가 여전히 마르고에게 마르고로서 끌렸을지는 의문이다.


흥미롭게도 빅토르의 직업은 만화가다. 현실 세계는 빅토르의 손을 거쳐 보정이 된다. 빅토르가 재현을 원했던 과거도 빅토르의 그림에 기반하는데 이 그림들 자체가 이미 미화된 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그림을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그림은 춤을 추는 마리안을 그린 것인데 그림 속 마리안에게 꽃잎이 떨어지고 있다. 현실에서 가정집 파티를 하는데 누가 춤을 춘다고 꽃잎을 뿌려줄 리는 없으니 이는 마리안에게 반했던 빅토르가 머릿속에서 뿌린 꽃잎이 분명하다. 앙투안은 이 그림을 보고 똑같이 꽃잎이 흩날리도록 연출하는데 빅토르가 실제로 마르고에게 끌리는 것을 보고 질투를 느껴 꽃잎을 뿌리지 말라고 하지만 이미 꽃잎은 흩날린 뒤다. 흥미롭게도 이 장면을 본 앙투안조차 마르고에게 다시 애정을 느끼는데, 반대로 이것이 그려진 장면을 본 마르고는 현실로 돌아온다. 빅토르는 과거로 돌아갔지만 자기 자신이 같이 젊어진 것은 아니었기에 마르고는 그에게 측은함을 느끼고 있었고 자신에게 끌린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가상이 그림으로써 현실 세계에 나타나자 실제 현실로 마르고를 되돌리는 기폭제가 되었다. 코브가 맬을 현실로 데려오기 위해 다시 한번 가상을 이용했지만 실패한 것과는 다르게 마르고가 가상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데는 역설적으로 가상을 현실화하는 데 기초가 된 물건이 토템 역할을 한 것이다.



코브가 림보에서 탈출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가상의 맬과 현실의 맬을 구분하는 능력이었다. 그는 림보 속 맬에게 너는 실제의 맬이 가지고 있었던 장단점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반면 빅토르가 가상을 벗어나게 하기 위해 앙투안은 다시 한번 가상을 이용한다. 다만 이번에는 천장이 뚫려있고 벽지가 엉성한, 가상임이 티나는 공간이 아닌 현실 공간을 활용하여 빅토르에게 가상을 현실로 믿게 만든다. 마르고는 이 곳에서 빅토르에게 언제까지나 기억의 첫 부분만 재생할 수는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이 대사마저도 앙투안이 만든 가상이다. 결국 코브와 빅토르가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현실세계에 대한 자각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두 영화의 결말인데 <인셉션>은 코브가 돌아온 현실이 과연 현실인가에 대한 의문점을 관객에게 남기고, (마르고가 연기한 마리안이 아니라 진짜)마리안은 빅토르의 가상으로 한발짝 들어선다. <인셉션>과 <카페 벨에포크>는 결국 가상을 연상시키는 무엇으로 회귀하여 극을 끝맺는데 그렇다고 해서 코브와 빅토르가 가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코브의 아이들은 마침내 코브에게 몸을 돌려 그에게 안기고 마리안은 빅토르가 기억하던 대로 보드카를 마신다. 가상이든 아니든 코브와 빅토르는 현실을 자각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빅토르에 치여 현실적인 삶을 살던 마리안이 결국에는 빅토르의 가상에 포섭된다는 결말은 조금 아쉽다. 마리안은 집세며 직업 등 빅토르가 이상에 들떠 챙기지 않던 현실을 누구보다도 자각하고 있던 인물이었고 빅토르에게 염증을 느끼는 건 당연했다. 빅토르가 장점만을 기억하던 과거의 마리안으로 마리안은 결코 돌아갈 수도 없고 애초에 그 마리안은 실제 마리안이 아니었을 것이다. 빅토르를 간신히 현실에 발붙이게 만든 데 반해 현실을 잘 살아가고 있던 마리안을 굳이 가상세계로 데려와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코브나 마리안 모두 결국 현실세계에 발붙이지 못하던 배우자로 인해 고통을 겪어야 했던 인물들임을 감안하면 <카페 벨에포크>의 결말은 마리안에게는 억울할지도 모른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뜻한다는 벨 에포크를 떠난 마리안과 빅토르가 또 다른 25년 후 그 때가 즐거웠다며 다시 지금을 회상하고 있지는 않을까.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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