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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Jun 15. 2020

수치화와 정치가 주관적인 영역에 들어올 때

키이라 나이틀리의 필모그래피가 말해주는 것

기억하는 한 키이라 나이틀리는 흥미로운 필모그래피를 가진 배우다. 나이틀리의 배역은 수동적인 역할에 머무르는 일이 없었고 누군가의 아내 혹은 상대역으로서 머무르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이틀리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아마도 처음일 프랜차이즈 상업영화는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인데 엘리자베스로 출연한 나이틀리는 코르셋으로 숨을 쉬지 못해 바다로 추락했다가 코르셋을 벗고서야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극을 시작한다. 이후 연인인 윌 터너(올랜도 블룸 분)와 함께 모험의 세계로 떠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시리즈 중반에는 남장도 서슴지 않는다. 윌 못지않게(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윌보다 더) 용감하고 현명한 엘리자베스라는 캐릭터는 이후 이어지는 키이라 나이틀리의 필모그래피를 예견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나이틀리는 <킹 아더>에서는 다른 궁수들과 함께 얼음 위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활을 쏘는 기니비어로 등장했고 <공작부인:세기의 스캔들>에서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공작부인 조지아나를, <이미테이션 게임>에서는 남자 암호해독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조안 클라크를 연기했다. 자신의 딸에게는 디즈니 영화를 금지시키면서도(지금은 보여준다고 한다) <호두까기 인형>에는 요정으로 출연하기도 했지만 모험의 세계로 떠나는 소녀의 성장 서사였기에 디즈니는 나이틀리가 출연하도록 설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콜레트>와 <오피셜 시크릿>에 이어 <미스비헤이비어>가 관객의 눈앞에 당도했다. 


키이라 나이틀리는 기이할 정도로 자주 몸매 평가를 당해왔다. <킹 아더>의 경우 포스터에서 키이라 나이틀리의 가슴 사이즈를 포토샵으로 키웠고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에서 상대역을 맡았던 올랜도 블룸도 나이틀리의 가슴 사이즈에 대해 공개적으로 발언하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미스비헤이비어>는 나를 몸매로 재단하지 말아달라는 키이라 나이틀리의 외침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혼 후 어머니, 남자친구와 함께 딸을 키우며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는 샐리 알렉산더는 키이라 나이틀리 그 자체처럼 보인다. 놀랍게도 이 영화의 배경은 1970년대이고 이 영화가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개봉된다는 것은 그 이후 그만큼 사회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영국 왕실에서 출산 몇시간 후 새로 태어난 세손과 왕자, 세자빈이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하는 관습에 대해 키이라 나이틀리는 자신의 딸에게 보내는 서신으로 의견을 공개 피력하기도 했다. 



영화 속 미스 월드 대회의 개최자들은 사람들의 작은 즐거움을 왜 망치려 하느냐고 묻는다. 샐리는 등떠밀리듯 TV에 출연하여 이렇게 말한다. 숫자로 재단하여 값이 매겨지는 곳은 가축 시장 뿐이라고. 이러한 수치화는 영화에서 줄곧 미스 월드 참가자들의 신체 사이즈 숫자가 지속적으로 불려지는 것으로 끊임없이 확인된다. 사실 사람의 능력에 대한 수치화는 경쟁을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기업에서는 외국어 능력을 측정하기 위해 토익 점수를 요구하고 대학에서는 학생을 선발하기 위해 대학수학능력시험으로 학습 능력을 점수화한다. 토익 점수 몇점 차이가 진정 지원자들 간의 영어 능력을 반영하는지, 수능 점수 몇점 차이가 진정 학생들 간의 학습 능력을 반영하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또한 영어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업무 능력과 직결되는지, 학습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학문적으로 유의미한 성과를 내는지 역시 비례그래프로 단순히 그려지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기업에서도 다양한 자격 요건을 서류로 요청하고 이에 더해 면접과 인적성 검사를 실시하고 대학에서도 정시 이외에 수시 등 다양한 전형을 통해 학생을 선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은 여전히 수치화된 지원자들의 능력을 서류에서 볼 수 있도록 요구한다. 그렇다면 왜 미스 월드에서는 이러한 수치화가 문제가 될까. 그 답은 샐리가 말한 가축 시장이라는 단어에서 찾을 수 있다.


가축 시장에서 수치로 가축을 재단하는 이유는 해당 가축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식량을 추출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즉 가축은 가축 자신의 가치가 아닌 가축을 식량으로서 이용하고자 하는 소비자의 수요에 따라 수치화된다. 수치화된 미스 월드는 미스 월드 본인이 가진 능력이나 가치관으로 평가받지 않는다. 이들은 철저하게 수치화된 상품으로서 존재하며 샤프롱 없이는 대회장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미스 월드가 다양한 아름다움을 반영하고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영화 초반 에릭 몰리(리스 이판스 분)의 대사를 통해 획일화된 아름다움만을 참가자들에게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참가자들이 피부에 흠결이 없어야 하고, 나이도 어려야 하며 실제로 처녀여야 한다고(..) 말한다. 즉 그에게 있어 화상을 입거나 장애인인 여성, 나이든 여성, 성경험이 있는 여성은 미를 상징하는 미스 월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애초에 미美라는 것이 개개인의 기준에 따라 다른 주관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인 데다 이 기준 또한 사회의 관습에 영향을 받는 것인데 이것을 수치화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헌데 이런 기준에 사람을 구겨넣고 그에 맞추는 것은 사람을 사람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치환하여 값을 매기는 행위이기에 문제가 된다.



영화의 또다른 한 축으로 등장하는 미스 그레나다(구구 바샤 로 분)를 보고 어떤 이들은 미스 월드의 순기능을 지적하고 싶을 수도 있다. 미스 그레나다와 미스 공아남(남아공South Africa에서 백인, 유색인종 참가자 둘이 참가하는 바람에 구분을 위해 공아남Africa South이라는 기괴한 지역명이 붙었다)은 대회의 유일한 흑인 참가자다. 영화를 자세히 보면 이들을 통해 새로운 미의 기준을 제시하겠다는 것 자체가 정치적인 의도가 포함되었기에 결코 순수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아공에서 유색인종이 참가자에 포함될 수 있었던 것도 언론의 압력 때문이었고 미스 공아남은 대회에 참가하면서도 정치적인 발언을 하거나 특정 기자와는 접촉할 수 없다. 미스 그레나다가 (애초에 수치화될 수 없는)자신의 뛰어난 역량, 진실로 세상을 위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미스 월드에서 우승할 수 있을까? 그레나다의 총리는 미스 월드의 후보뿐 아니라 자신이 심사위원으로서 참여한다면 더욱 더 진보적인 대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미스 월드의 협상 테이블에 끼어든다. 미스 월드의 심사 자체가 국가 간의 알력을 시험하는 정치 테이블이며 미스 월드는 각 국가의 정치력을 상징하는 카드다. 그렇기에 이들은 자신의 이름이 아닌 미스 + 국가명으로 불리며 이들의 순위는 심사 테이블에서 누가 더 큰 파워를 가졌는지와 언론의 입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미스 그레나다는 미스 월드 대회의 소동극으로 경찰에 붙잡힌 샐리와 화장실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드디어 전 세계의 흑인 소녀들에게 자신의 피부색을 부끄럽지 않게 해줄 수 있게 되었기에 미스 그레나다는 이 축제를 망친 샐리가 곱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샐리는 외모로 경쟁하게 한다면 결국 우리 모두의 자리를 좁게 만들지 않겠냐며 미스 그레나다를 설득한다. 외모라는 한정된 영역에서 흑인의 파이를 늘리려는 미스 그레나다의 노력과 전 영역에서 여성의 파이를 늘리고자 하는 샐리의 투쟁은 서로 다른 이상을 추구하는 두 여성의 대립구도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음 순간 샐리가 경찰에게 끌려가자 미스 그레나다는 경찰들에게 샐리를 거칠게 다루지 말라고 소리친다. 샐리 또한 미스 그레나다의 노력과 성공을 비하하지 않기에 축하의 말을 전했던 것이지만 자신의 딸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남자들과 실력으로 공정하게 경쟁하는 대신 외모를 치장하는 데 시간을 보내게 할 생각이 없다. 유니버시티 컬리지 런던은 샐리를 입학시킬 때부터 아이를 키우며 공부할 수 있겠냐고 질문하고, 수업 시간에는 샐리의 발언권을 갈취하며 샐리의 논문 주제는 무시당한다. 미스 월드를 통해 미스 그레나다가 과연 그토록 원하던 선택권을 가지게 되었을까 역시 회의적이다. 밥 호프의 아내는 남편이 집에까지 데려왔던 1961년의 미스 월드 이야기를 하며 지금은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고 한다. 미스 월드가 자신의 외모로 얻을 수 있었던 권력은 유효기간이 길어야 1년이며 그 외모조차도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것이 아님을 생각해 본다면 외모로 얻어지는 성취가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미스 월드 대회 소동과 샐리의 개인적인 삶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 그렇기에 외모로 여성을 재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설파하려는 부분이 덜 매끄러운 점은 아쉽다. 또한 미스 월드가 선발되는 과정에서 각 여성의 개성이 철저하게 무시당하는 대신 각 국가의 정치력이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 좀더 묘사되었더라면 미스 월드 대회가 순수한 목적 대신 정치에 의해 여성이 희생될 뿐임이 보다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 반향을 일으킨 여성들이 재판을 끝내고 환하게 웃으며 서로의 손을 잡아 올리는 모습은 21세기인 지금까지 이 소동극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보여준다. 


수많은 탑클래스 여배우들은 아직도 누군가의 아내 역을 연기하고 있다. <다크 워터스>의 앤 해서웨이, <돈 워리>의 루니 마라 등 여우주연상을 수상해온 여배우들조차 남배우들보다 적은 출연료를 받아가며 주연 위치를 빼앗긴다. 할리우드 배우의 출연료 순위를 보면 23살의 어린 나이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고 필모그래피에 유명 프랜차이즈 시리즈를 두 개나 보유한(<헝거게임> 시리즈, <엑스맨> 시리즈) 제니퍼 로렌스보다 남우주연상 후보에도 오른 적 없는 드웨인 존슨의 출연료가 더 높다. 키이라 나이틀리의 남편 역으로 티모시 샬라메가 조연 출연하는 날이, 그것이 아무렇지 않게 여겨지는 날이 과연 올까. 여성을 상품으로 만들어 수치화될 수 없는 영역에 끼워맞추는 잘못된 행동(misbehavior, 미스비헤이비어)을 바로잡는 행동하는 사람, 미스 비헤이비어를 택한 키이라 나이틀리의 행보를 응원한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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