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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Apr 17. 2023

차별이 부재하는 세계

출발선이 동등해지면 경쟁도 동등하다

<존 윅> 시리즈의 세계관은 최고 회의에 속한 인물들을 제외한 인물들은 배경처럼 작동한다. 킬러들이 지하철 역에서 사람을 아무리 많이 죽여도, 클럽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폭동이 일어나도 배경으로 존재하는 이들은 마치 NPC처럼 그 자리를 지킨다. <존 윅> 시리즈의 세계관에는 비명소리가 부재하고,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지만 이에 대한 도덕적인 고민은 지옥행이라는 단순한 단어 아래 휘발된다. 마치 평행 세계나 게임 속의 세상 같은, 킬러들을 관리하는 최고 회의가 존재하는 이 세상의 규칙은 생존 이외에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킬러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노예계약도, 배신도 서슴지 않으며 친구 사이가 서로를 향한 청부로 점철되어도 덤덤히 받아들인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세계에서 장애인을 위시한 소수자를 다루는 방식이다. 킬러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존 윅> 시리즈의 세계관은 외부 세상의 차별이나 억압은 애초에 없었던 세상인 것처럼 설정되어 있다.


<존 윅4>의 케인(견자단 분)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설정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본격적으로 장애인을 킬러들의 세계로 초대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존 윅 - 리로드>에서 이미 수어를 사용하는 아레스(루비 로즈 분)가 등장한 적이 있다. 아레스의 등장이 재미있는 포인트였던 건 아레스와 존 윅을 포함한 세계관 내 인물 대다수가 수어를 사용할 줄 아는 것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수십개 국어가 가능한 것으로 설정된 존 윅도 수어가 마치 그중 하나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아레스와 수어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아레스의 수어는 등장인물의 대화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아레스가 청각장애인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아레스의 업무 수행에 수어는 그 어떤 영향도 없다. 즉 애초에 <존 윅>의 세계관은 장애인들이 지닌 불리한 점을 비장애인이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발맞춤으로써 시작점을 동등하게 맞춘 곳이다. 오히려 아레스의 수어는 상황의 긴박감을 더해주고 과묵한 킬러라는 이미지를 더해 매력을 극대화시킨다. 액션을 위한 영화 시리즈이기에 발화량 자체가 일반 영화에 비해 적은데, <존 윅 - 리로드>는 아레스의 등장으로 발화량을 더욱 축소함으로써 액션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애초에 수어는 손이 필요한데 액션을 수행하다 보면 손을 쓰게 되므로 대화량 자체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지팡이(cane)와 언어유희를 사용해 만든 이름인 케인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존 윅> 시리즈의 세계관에서 다룰 만한 또 하나의 포인트는 강아지로 대변되는 동물권이다. 애초에 <존 윅> 시리즈가 시작한 것이 멋도 모르고 존의 강아지를 죽였다가 유혈사태를 본 갱단인 만큼 이 시리즈의 개에 대한 애정은 엄청나다. 아내가 선물한 강아지를 애지중지 키우던 존은 첫 편의 마지막 장면에서 결국 다른 강아지를 입양한다. <존 윅4>에서는 이름없이 '별거 아닌 사람(Mr. Nobody)'으로 통하는 이와 함께 다니는 강아지가 등장한다. 이 강아지가 존 윅의 강아지보다 특별한 점은 마치 강아지판 존 윅처럼 행동한다는 점이다. 차에 치여도 죽지 않고, 주인의 명을 따라 사람을 공격하는 이 강아지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존의 위치를 이어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별거 아닌 사람은 자신의 강아지를 공격한 이들을 (그 수많은 킬러들 속에서도 얼굴을 기억하고) 끝까지 쫓아가 복수한다. 콘티넨탈 오사카 지점에 투숙할 때도 별거 아닌 사람은 강아지가 자신의 정서적 지지견이 아닌, 자신이 강아지의 정서적 지지인이라고 분명히 밝히며 강아지가 킬러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암시한다.


<존 윅> 시리즈가 매편 화려한 로케이션과 볼거리를 자랑하다보니 다양한 국가에서 액션을 수행하면서 존의 다개국어 능력을 과시해왔는데, 4편에 이르러 아시아에 도달했다. 헐리웃 영화에서 동양을 다룰 때 보통 한 국가를 지정해서 한 종류의 외국어만을 다뤄왔는데, 흥미롭게도 <존 윅4>는 오사카의 컨티넨탈에 중국계인 견자단을 출연시키고 일본어와 중국어가 혼재된 상황을 일부나마 연출한다. <존 윅> 세계관에 등장하는 킬러들은 다개국어가 전부 능한 것처럼 보이는데, 이들이 영어를 사용하는 건 영어가 세계 공용어이기 때문이 아니라 존을 위해 '해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태생이 고아로서 최고 회의의 러시아 지부에서 길러진 존이 다개국어를 할줄 아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최고 회의의 지부가 다국적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시리즈의 마무리에 이르러 특히 다양한 언어가 등장하는 이번 편은 존 윅의 언어 능력을 과시하기보다는 최고 회의의 지부가 다양한 것을 과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케인의 액션은 어떤 장면에서는 장애에 구애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떤 장면에서는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장치들이 액션을 더 흥미롭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사카 컨티넨탈의 주방에서 케인이 알람 센서를 부착해 비장애인 킬러들을 사살하는 장면은 신선한 자극을 준다. 다만 영화는 시각 장애로 인한 케인의 불리한 점을 굳이 숨기려 들지는 않는다. 존과 1:1로 대치하는 장면에서 존은 케인이 자신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가만히 멈춰서 소리를 내지 않는다. 하지만 존이 방심한 순간 케인은 그를 덮치고, 오랜 세월 킬러로 일해온 케인이 장애로 인해 자신의 업을 그만두는 대신 다른 감각을 발달시켜 왔음을 과시한다. 한편 케인의 두 눈에 세로로 새겨진 칼자국은 킹(로렌스 피시번 분)을 비롯한 다른 킬러들의 얼굴에 아로새겨진 칼자국과 겹쳐 보이는데, 이는 누구에게도 생길 수 있었던 장애가 케인에게 온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케인은 최고 회의가 자신의 시력을 앗아간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들에게 주었다고 덤덤하게 이야기하며 자신이 장애를 선택했음을 설파한다.


그라몽 후작(빌 스카스가드 분)이 케인을 고용하면서 후작의 킬러들은 뭘 믿고 맹인을 고용했냐며 케인의 장애를 우려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장면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장애인이 비장애인 사회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불리함을 설파하는 것이다. 그라몽 후작은 그럴싸한 궤변을 늘어놓고 아마도 존이 결투장에 시간맞춰 오지 못할 것이라고 킬러를 설득하지만, 사실 존과 케인이 벌이는 최후의 대결은 생각보다 케인에게 불리하지 않다. 결투장은 정해진 공간의 직선거리 내에서 수행되고, 바닥에 돌을 깔아 존의 움직임이 케인에게 들리도록 설계되어 있다. 222개의 계단을 존과 케인이 함께 올라가 케인의 장애를 존이 수용하고 서로에게 동등한 환경이 설계되었을 때 그제야 존과 케인에게는 한 판당 총알 하나라는 동등한 기회가 주어진다. 수직의 계단장면 이후에 평평한 수평의 공간이 펼쳐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각자에게 동등한 기회가 주어진 이후 한 번의 사격 기회를 더 얻으려던 자는 바로 그 동등한 총알에 의해 최후를 맞이한다. 애초에 <존 윅>의 세계관은 케인이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케인을 위한 환경을 설치한 곳이다. 케인은 그라몽 후작의 의뢰를 받아들일 때 자연스럽게 의뢰지가 자신의 왼쪽에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손을 뻗으며, 의뢰지는 점자로 프린트되어 있다. 이것은 케인을 위한 배려가 아닌 케인을 고용하기 위한 당연한 환경 설정이다.



<존 윅> 시리즈의 세계관 안에는 인종으로 인해 당하는 차별도, 성별로 인해 당하는 차별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킬러 대부분이 백인 남성이긴 하지만 고용된 흑인이나 동양인은 피부색으로 고용 조건을 차별당하지 않으며 여성의 비율이 적은 건 실제 범죄자의 성비에 기초한 것이라는 변명을 댈 수 있다. 불균형한 성비에도 불구하고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결코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갱단을 이끄는 리더이거나 존과 동등하게 결투하는 킬러로 등장한다. 더군다나 <존 윅> 세계관의 첫 번째 스핀오프인 <발레리나>는 아나 데 아르마스 주연으로 제작되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세계관이 외부 세계의 변화를 따라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존 윅4>에서 장애인을 대한 방식은 한 번쯤 되짚어 볼 만하며, 지속적으로 네번째 손가락이 잘린 존의 왼손을 스크린에 비추는 이유도 어쩌면 장애를 대하는 시리즈의 태도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감히 추측해본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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