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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Oct 26. 2020

악인을 묘사하는 방식

쉬운 길과 어려운 길

금주 개봉작 가운데 눈에 띄는 한국영화는 단연 두 편이다. <종이꽃>과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두 영화 모두 예고편이나 영화 소개글 등만을 봐서는 꽤 뻔해 보이는 영화들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종이꽃>은 뻔하다못해 진부한 수준이고,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생각보다 영리하고 복잡한 서사를 가진 영화다. 두 영화를 가로지르는 가장 큰 차이점은 악인을 묘사하는 방식에 있다. <종이꽃>은 쉽고 단순한 방법을 택한 후 감성에 기대는 연출로 인해 진부하고 흑백논리적인 결과물을 내놓았고,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악의 평범성이라는 보다 고차원적인 접근 방식에서 시작하여 최종보스에 이르기까지 길고 복잡한 여정을 이어간다. 단순히 여성 서사임을 떠나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자영(고아성 분)의 입을 빌어 '작고 작은 존재(tiny, tiny person)'들이 머리를 맞대어 진실을 밝히는 과정을 경쾌하게 추적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짙다. 반면 <종이꽃>의 경우 단순히 가진 자들을 악인으로 묘사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직업이든 재산이든 가진 자들을 단순히 악인으로, 물리적 자유든 금전적 자유든 혹은 그 외에 무엇이든 가지지 못한 자들을 선인으로 그리는 방식은 대단히 위험하다. 인간이 가진 복잡성을 무시하고 단순히 자산의 유무에 따라 캐릭터들을 규정지어 버리기 때문이다.



<종이꽃>은 무엇보다도 착한 영화의 함정에 빠진 영화다.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인다는 취지는 좋지만 약자들이 반드시 선인일 수는 없다는 점을 간과했다. 거기다 <종이꽃> 속 약자들은 비상식적인 요구를 관철시키며 가진 자(라고 해봐야 사실 별로 가진 것도 없는 이들이 대다수다)들을 피도 눈물도 없는 악한으로 몰아간다. 죽은 장 선생(정찬우 분)의 장례를 치르게 해달라고 하는 동백국수집 사람들은 장례를 치를 돈이 없다. 이들이 광장에서 장 선생의 장례를 치르고자 하는 이유는 단순히 장 선생이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시에서 사망한 모든, 그 기준조차 모호한 '좋은 사람'을 전부 광장에서 장례식을 치를 수는 없다(1년 365일 장례치를 일 있나). 광장은 공익적인 목적으로 사용되는, 세금으로 지어진 장소이기 때문이다. 시에서는 미스 월드 대회를 치르기 위해 동백국수집 사람들과 대치하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물론 여성을 상품화한다는 점에서 미스 월드 대회 자체가 극혐이긴 하지만) 미스 월드 대회는 최소한 시를 홍보하고 일시적으로나마 시의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공익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장 선생이 좋은 사람이라 광장에서 장례를 치러야 한다고 하기엔 영화 속에서도 장 선생의 분향소를 찾는 사람이 동백국수집 사람들과 성길(안성기 분) 이외에는 없다. 장 선생의 장례를 거절하는 공무원과 분향소를 치우기 위해 고용된 용역, 그리고 장례 비용을 치러주길 거부하는 성길의 장례 회사 해피엔딩 소속의 회사원 모두 인정머리없는 이들 같지만 결국 이들도 먹고 살기 위해 주어진 업무를 하는 직장인일 뿐이다. 광장 장례식을 치르기 위한 허가를 거절하는 공무원, 장례 비용을 거절하는 해피엔딩 직원, 미스 월드 대회 진행을 위해 분향소를 강제 철거하는 용역이 악인이라니 일반 직장인 눈에는 기가 찰 뿐이다.


한편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속 악인들은 보다 복잡하다. 삼진그룹 공장의 폐수가 처리과정 없이 유출되는 것을 목격한 자영은 동료 유나(이솜 분), 보람(박혜수 분)과 함께 폐수 유출의 책임자를 찾아 나선다. 처음에는 회장 아들인 오태영 상무(백현진 분)가 범인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평범한 얼굴을 한 악을 끊임없이 옮겨간다. 암에 걸려 퇴사했지만 보람에게는 다정했던 봉현철 부장(김종수 분)을 지나 최동수 대리(조현철 분)까지 통로를 확장한 악은 마침내 최 대리의 입을 빌려 진실을 토해낸다. 종착역은 다소 뻔해 보이기도 하지만 대기업이라는 존재 자체를 거대악으로 규정하는 대신 직원들이 의미를 두고 일하고자 하는 일터로써의 위치를 결코 놓지 않는다는 점은 영화 말미에 이르러 약자들이 결집하는 중심축으로 작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악이 거쳐간 경로가 최종보스가 아닐지라도 책임을 무시할 수는 없는 위치였다는 것을 인정하기도 한다. 봉 부장은 보람에게는 다정했지만 기업의 과오를 묵과한 죄가 있으며 마지막까지 책임을 저버리지 않는다. 최 대리는 순진한 얼굴로 시키는 일을 모두 처리했고 그 또한 기업의 과오를 묵과했지만 진실이 묻히지 않도록 자영을 돕는다. 무능한 오 상무는 자신의 잘못에 결국 책임을 지는 인물이다. 그리고 진실을 밝히기 위한 첫 단추는 자영의 정곡을 찌르는 한 마디다. "사람이 어떻게 자기 아픈 것만 알아요?"



두 영화가 악인을 다루는 방식을 달리하며 갈라진 가장 큰 차이점은 영화 속 약자들의 태도다. <종이꽃> 속 약자들은 수동적이며 감정적인 반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속 약자들은 능동적이고 이성적이다. 지혁(김혜성 분)은 불의의 사고로 걷지 못하게 된 후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한다. 은숙(유진 분)이 유행이 지나다못해 작위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대책없이 발랄한 캔디형 캐릭터인 점도 문제지만 은숙도 자신의 책임을 피해 도망치기만 하는 역할인 건 심각한 문제다. 남편의 가정폭력을 피하고자 정당방위로 남편을 살해한 후 보호치료 중인 은숙은 딸과 함께 살기 위해 자신을 찾으러 다니는 공무원을 피해 끊임없이 이사를 다닌다. 은숙에게 보호치료를 집행하러 온 공무원들은 억지로 은숙을 끌고 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빌런은 아니다. 아직까지 가정폭력에 대한 정당방위가 제대로 인정되지 않는 제도의 한계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법적인 의무가 지워진 이를 개인사정이 딱하다고 하여 공무원들이 봐줄 수는 없다(극중에서는 은숙이 무죄로 풀려났다고 하는데 내가 아는 한 국내에서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를 살해한 경우 무죄가 인정된 경우는 없다. 참고로 외국에서는 있다). 거기다 은숙은 죽고 싶어하는 지혁에게 자신의 상처를 들이대며 불행 배틀을 자처하는 인물이다. 상처받은 나도 살아있으니 너도 살아야 한다는 강요는 지혁에게 또 하나의 폭력이라는 점을 영화는 간과한 듯하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영화에서 태도 때문에 악인처럼 그려지는 공무원들과 해피엔딩 직원은 태도가 차가운 사람들일 뿐 악인은 아니다. 프로타고니스트들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수동적인 태도를 견지한다고 해서 안타고니스트들이 반드시 빌런이라는 것은 비약이다.


반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속 프로타고니스트들은 끊임없이 돌아다닌다. 자영은 시골 출장을 몇 번이고 반복하고 유나는 인맥을 활용하는 동시에 두뇌를 풀가동한다. 보람은 수학적인 능력을 최대치로 이용하여 회사의 헛점을 찾아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은 영어공부를 절대 놓지 않는다. 이들에게 있어 토익점수란 단순히 대리진급의 사다리가 아닌 자신들을 증명해주는 도구이자 안타고니스트를 향한 반전의 매개체다. 이들은 반복되는 절망 속에서도 서로에 의지해 계속해서 나아가며, 안타고니스트였던 이들을 하나둘씩 프로타고니스트로 끌어들인다. 자영, 유나, 보람은 비리를 밝혀내는 데서 나아가 주변 인물들을 변화시키며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에게 당당해지는 모습마저 보여준다. 고졸 직원이라는 딱지나 마찬가지인 불편한 유니폼을 벗어던지고 당당하게 한 걸음씩 회사로 내딛는 모습이 멋진 이유는 그래서다. 자영은 이제 연차는 낮지만 직급은 높았던 최 대리에게서 선배님/대리님 모두로 불릴 수 있고, 유나는 자신을 가십거리로 소비하며 질투했던 직원에게 당당하게 맞서며 보람은 자신이 원했던 프로그램을 만들어낸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자신이 가진 점들을 활용하여 지치지 않고 전략을 짠다. 한 전략이 실패하면 다음 전략으로 넘어간다. 자영, 유나, 보람은 지속적인 실패 속에서도 진실을 밝히기 위한 여정을 멈추지 않으며 그 과정에서 자신들이 유의미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내는 셈이다.



두 영화의 결말이 사뭇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제 명확하다. 인물들을 선악으로 단순히 구분지었던 <종이꽃>은 거대악에는 선한 개인이 당할 수 없고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웃는 것뿐이라 말한다. 은숙은 딸과 헤어져 보호치료를 받으며 빗속에서 춤을 추고, 성길은 장례식을 돕다가 계약 파기 경고를 받으며, 지혁은 여전히 지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집 밖으로 겨우 한발짝 나와 내리는 비를 바라볼 뿐이다. 하지만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개인들이 모여 연대할 때 세상은 바뀐다고 이야기한다. 직장을 다니며 바쁜 와중에 토익공부를 하던 고졸 여직원들은 이제 당당하게 토익점수를 받아 진급하고 자신들이 비리를 밝혀낸 회사로 출근한다. <종이꽃> 속 인물들은 서로의 불행만을 이야기했고 분위기메이커로 은숙을 이용했지만 그 누구도 상황을 바꾸지 못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속 인물들은 서로에게 의지했고 자신들이 가진 장점을 모아 전략을 짜고 빌런에 대항했다. 나는 여전히 은숙이 딸과 함께 살 수 있게 되기를, 지혁이 다시 여행을 가기를, 성길이 장의사 업무를 이어가기를 바라지만 이는 그들이 자신의 책임을 받아들이고 타인을 무작정 악으로 바라보지 않을 때 가능할 것이다. 자영, 유나, 보람은 앞으로도 차별과 편견을 마주치며 살아가겠지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자영이 말한 대로 자신의 일이 의미가 있기를 바라는 이상 이들은 험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10월 말 개봉한 두 한국영화는 이렇게 선과 악을 가르는 선이 모호해지는 세상을 개인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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