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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Oct 19. 2020

악인을 처단하는 방식

그들이 죗값을 제대로 치르려면

* 본 글은 결말에 관한 이야기를 하므로 필연적으로 스포일러가 포함됩니다.


대부분의 헐리우드 영화에는 빌런이 존재한다. 타노스나 사우론과 같은 초자연적인 힘을 지닌 이들 이외에도 경제 사범이나 악덕 고용주도 빌런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다만 빌런의 최후에 대해서는 실화 기반 영화와 실화에 기반하지 않은 영화로 나뉜다. <어벤져스> 시리즈가 실화를 기반으로 할 리는 없으니 슈퍼히어로 영화를 포함한 허구의 이야기 속 빌런들은 대부분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드라마긴 하지만 <왕좌의 게임> 시리즈와 같은 예외가 있긴 하다). 하지만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 속 빌런들은 잔인하게도 처단은커녕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망갔습니다"로 끝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리먼 브라더스 사태를 일으킨 <빅 쇼트> 속 경제 사범들이 대표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영화들이 의미가 없다고 볼 수는 없지만 관객에게는 씁쓸함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어쩌면 현실의 빌런들이 장렬한 최후를 맞는 것을 보기가 어렵기 때문에 허구의 이야기 속에서나마 선한 자들이 승리하고 악인이 패하는지도 모른다. 타노스가 현실에 있었다면 손가락을 튕길 때 어벤져스 멤버들은 모두 사라지고 자신은 대궐 같은 집에서 무병장수하도록 했을 것이 분명하다. 수많은 허구의 이야기 속 빌런들이 결국엔 최후를 맞이하긴 하지만 이것이 과연 정의의 심판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사실 의문이 든다. <그리드>의 결말은 헐리우드 영화 속 빌런들이 처단되는 방식의 전형이지만 과연 바람직한 걸까.


<그리드>를 보며 떠올랐던 영화는 의외로(?) 피터 잭슨의 범작 중 하나인 <러블리 본즈>다. 아름다운 영상미로 무장한 이 영화는 시얼샤 로넌의 10대 시절 연기를 볼 수 있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수지(시얼샤 로넌 분)를 강간하고 시체를 파묻은 조지 하비(스탠리 투치 분)는 멀쩡한 인생을 살아가다가(=평범남 코스프레를 하며 강간과 살인을 반복하다가) 허무하게 죽음을 맞는다. 영화의 초점은 조지가 어떻게 처단당하는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엔 그가 누군가에게 붙잡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처벌받기를 간절히 바랐다. 단순히 조지 하비의 최후를 보여주었다고 해서 수지의 억울함이 가시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드> 속 리차드 맥크리디(스티브 쿠건 분)는 언뜻 보기엔 빌런처럼 보이지 않는 기업가다. 하지만 그의 옷값 후려치기로 인해 제3세계 여성들은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노동력을 끊임없이 착취당한다. 그렇게 얻은 이득으로 리차드는 자산을 축적하고 호화로운 파티를 즐기며 명사들과 어울린다. 청문회에 소환당한 리차드는 아무렇지 않게 협상을 했다고 주장할 뿐이며 사실 틀린 말도 아니다. 영화에서 리차드의 성격을 이기적인 한탕주의자로 표현해서 더욱 빌런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가 주변인들에게 성인군자처럼 행동한다 해도 그의 (악덕) 사업가적인 면모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리차드가 패스트 패션 제국을 세워 억만장자가 된 것이 더 어이없는 이유는 리차드는 사실 옷에는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패션에 대한 철학으로 패션 회사들을 사들이고 사업을 확장한 것이 아니라 리차드에게 있어 패션회사들은 그의 자산을 늘리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자신의 재산을 늘릴 수만 있으면 회사가 빚을 지고 파산해도 상관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명확하게 묘사하지는 않지만 한 회사가 파산했을 때 고용인과 그 가족들이 겪게 될 경제적 곤란을 생각해 볼 때 리차드의 사업수완은 사회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하다. 또한 리차드는 물건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치르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저 원가를 낮춘 의류를 고가에 시장에 유통시키는 데 급급하다. 원가를 낮추겠다고 스리랑카의 공장들을 돌아다니는 리차드는 결국 원했던 가격의 공장을 발견하지만 그가 낮춘 시장가로 인해 다른 공장은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리차드의 빌런성(?)은 기실 타노스보다 악질이다. 우주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인구의 절반을 날려버린 타노스는 무식하지만 나름의 철학이 있었다(우주의 자원을 생각해 인구의 절반을 날렸다면 인피니티 건틀렛으로 그냥 자원을 두 배로 늘리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리차드는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나 파생되는 현상에 대해 무관심한데다 청문회까지 불려가 지적당해도 수긍할 줄 모른다.


이런 리차드를 정의롭게 처단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굳이 진지하게 논의해 본다면 결국 전 세계적인 노동환경 개선과 무분별한 회사 매입 규제 등의 제도적인 개선이 우선이다. 그리고 제도의 허점을 이용해 자산을 축적한 이들이 사회에 환원하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리차드가 동의할지는 의문이긴 하다). 스리랑카의 최저임금을 높이고 최대 노동시간을 법적으로 규제한다면 리차드가 아무리 협상을 하려 든다고 한들 스리랑카에서는 저가의 의류를 공급받을 수 없다. 리차드라면 스리랑카 이외의 국가를 어떻게든 찾아 나서겠지만 최소한 스리랑카의 의류 공장에서 노동하는 여성들의 삶은 개선의 여지가 있다. 물론 이렇게 흑백논리로 보기는 어려운 문제다. 스리랑카의 의류 공장이 계약을 맺지 못해 파산한다면 결국 여성 노동자들은 수입이 아예 없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치와 경제 논리가 엮여 참으로 어려운 문제임은 분명하지만, 영화 속에서도 묘사되듯 공장 화재로 인해 목숨을 잃은 노동자가 나와도 태연하게 자신의 생일 파티를 즐기는 리차드의 모습을 보노라면 해결되어야 할 문제임은 자명해 보인다. 이런 식으로 리차드의 무분별한 협상을 규제한다고 해서 리차드가 정의의 심판을 받는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리차드 2세의 탄생은 막을 수 있을지 모른다. 태어나기도 전에 처단되는 빌런이라니 선의의 터미네이터가 따로 없다.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자신이 착취했던 이의 손에 의해 결국 리차드는 최후를 맞지만 리차드가 세운 패스트 패션 제국이 함께 최후를 맞는 것은 아니다. 리차드의 전 아내와 아이들이 이를 이어갈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 사후 애플사가 파산하지 않은 것과 같은 원리다. 창립자는 사망했을지언정 제국은 남는다. 제국의 황제는 생각보다 쉽게 대체되며 대중은 일순간 애통해할 뿐이다. 또한 리차드가 죽는다고 해서 그가 파산시킨 회사의 직원들이 해피엔딩을 맞는 것도 아니다. 스리랑카의 공장은 끊임없이 가동되어야 하며 제 3세계에서 도망친 난민의 행렬은 매년 이어진다. 아마도 노동자들과 난민들은 리차드의 죽음을 아예 알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별 관심이 없을 것이다. 피해자가 고소해하지도 못하는 죽음은 처단으로서 의미가 없다고 봐야 한다. 리차드라는 빌런이 사라져도 새로운 빌런은 끊임없이 나타날 것이며 제도가 개선되고 전 세계적인 노동환경의 개선 없이는 이 악순환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 전 세계 의류공장 노동자에 대한 수치가 함께 제시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관객의 뇌리에는 리차드의 개죽음이 더 강렬하게 각인되었을 것이다.


리차드의 최후가 빌런의 처단으로서 기능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있다. 60세의 나이에 개죽음을 맞는다 해도 평생 엄청난 부를 누리며 안락하게 살 수 있다면 편안한 죽음을 맞는 대신 공장 노동자로 살아야 하는 삶 앞에서는 모두 전자를 택할 것이다(심지어 후자의 삶에서 편안한 죽음이 보장되지도 않는다). 더군다나 리차드를 처단한 피해자는 질 좋은 일자리를 새로 공급받기는커녕 리차드를 위해 굴욕적으로 일하던 시기보다도 불안정한 일자리로 돌아간다. 부를 과시하기 위해 저급의 노동력을 기용해 건설한 (말 그대로의) 제국에 갇혀 있던 야생 사자는 황제 자신이 낳아놓고도 무시하던 자손에 의해 미쳐 날뛰고, 이를 지켜보던 제 3세계 공장 노동자의 자손의 손으로 우리를 탈출하여 타락한 황제를 처형한다는 결말은 작중 언급된 오이디푸스 신화처럼 신화적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현실적인 시각에서 타락한 황제의 죽음은 아무것도 바꾼 것이 없으며 오히려 노동자의 삶을 악화시켰을 뿐이다. 제국의 황제는 사우론처럼 사망으로 인해 무너질 제국을 건설하지 않았고 이를 보고 베낄 수 있는 유사 산업 제국을 이미 증식시킨 상태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현대의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뽑고 산으로 들어가 기거하는 대신 당당하게 제국을 물려받아 확장할 야심을 발표한다. 리차드의 삶은 결국 맥크리디 가의 자손에게, 공장 노동자의 삶은 그 자손에게 끊임없이 이어진다. 다스 베이더를 사살했더니 다스 베이더 2세가 시스들을 끌고 나타나 스카이워커 가문을 말살하는 셈이다.



<그리드>의 가장 씁쓸한 점은 이야기의 화자조차 방관한다는 데 있다. 리차드의 자서전을 집필하기 위해 고용된 닉(데이비드 미첼 분)은 수많은 부패와 편법 그리고 타락을 목도하지만 끝내 리차드를 미화하는 인터뷰로 끝을 맺는다. 사자가 갇혀 있던 우리의 버튼을 누른 아만다(다니타 고힐 분)를 고발하지는 않지만 구원하는 주체로서 기능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와인스타인 컴퍼니의 파산에 하비 와인스타인의 미투가 있었듯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황제의 몰락에 이어 제국을 무너뜨릴 내부고발이 필요하다. 빌런의 최후는 세상을 바꾸는 기폭제도 아니요 피해자들을 구원하는 메시아도 아니다. 현실의 빌런을 허구의 세상에서 처단할 때는 빌런이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얻은 결과를 돌려받는 결말이 필요하다. 하비 와인스타인은 감옥에서 코로나에 감염되었지만 아직도 스스로가 무죄라고 믿고 있기에 피해자들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다. 빌런에게는 그 범죄에 맞는 처벌과 최후가 필요하다.


*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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