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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Oct 12. 2020

당신이 바라본 나는 나인가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의 맹점

예고편에 속았던 경험이 있는가? 예고편으로는 흥미로워 보이던 영화가, 실제 극장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지켜보았을 때 지루해서 '예고편에 속았어!'라고 외쳐본 경험은 한 번쯤 다들 있을 것이다. 관객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어쨌든 당신을 돈을 내고 스크린 앞에 앉혀 놓는 데 성공했으니 마케팅 팀은 최선을 다한 셈이다. 그 지루한 영화에서 그나마 재밌는 장면만을 쏙쏙 뽑아 전체 영화가 재밌어 보이게 했으니 말이다. 두 시간짜리 영화도 이럴진대 몇십 년을 살아온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건 어떨까. <어디갔어, 버나뎃>의 예고편 속 버나뎃(케이트 블란쳇 분)은 확실히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이웃을 차로 쳤고 이웃의 집이 산사태에 쏠리도록 놔뒀다고 상담사는 외친다. 하지만 영화 전체 맥락을 보면 버나뎃에게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고 버나뎃은 그리 이상한 사람도 아니다. 케이트 블란쳇이라는 대배우가 문제가 있는 듯한 인물을 연기하는 것처럼 예고편이 보여주었으니 예고편의 할 일은 다 한듯하다. 영화를 보고 나니 속았다는 느낌은 들지만 확실히 흥미로운 영화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뒤집어 생각해 본다면, 두 시간 동안 버나뎃을 보았다고 해서 관객은 버나뎃을 이해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감독인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장기간에 걸쳐 한 인물 혹은 인물간의 관계성을 탐구해왔다. 비포 시리즈에서는 연인 관계가 시간에 걸쳐 변화하는 양상을, <보이후드>에서는 한 소년이 장기간에 걸쳐 성장하는 과정을 실제 배우가 성장함에 따라 매년 10분여씩의 분량을 촬영하여 필름에 담아냈다. 이와는 반대로 <어디갔어, 버나뎃> 에서 감독은 철저하게 버나뎃의 현재에 집중한다. 20년 전 건축가로서 명성을 날리던 시절의 버나뎃이 중간중간 비춰지기는 하지만 현재의 버나뎃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묘사할 정도일 뿐 당시의 버나뎃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충실하게 묘사해주지는 못한다. 건축계의 아이콘이었던 버나뎃과, 이웃과 충돌하는 현재의 버나뎃은 매우 다른 인물처럼 보이지만 작금의 버나뎃을 만든 것은 건축계에서 겪은 사건들이기도 하다. 이렇듯 복잡한 버나뎃을 이웃들, 그리고 심지어는 남편인 엘진(빌리 크루덥 분)조차 비정상으로 몰아간다. 그나마 버나뎃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은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딸 비(엠마 넬슨 분)뿐이다. 비는 단순한 모녀관계를 넘어서서 버나뎃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 성장함과 동시에 사람들이 단편적으로 관찰한 버나뎃을 보다 복잡한 이면까지 들여다보고 이해한다.



버나뎃을 관찰한 이들이 설명하는 버나뎃은 분명 이상한 인물이다. 버나뎃을 스토킹했다고 해도 믿을 만큼 관찰하고 뒷담화를 하는 오드리(크리스틴 위그 분)는 버나뎃이 이웃과 어울릴 생각이 없으며 모두들 버나뎃을 싫어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버나뎃이 분명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오드리는 버나뎃 때문에 발등을 다치고 집마당에 산사태마저 일어나자 버나뎃을 탓한다. 기실 오드리가 묘사하는 버나뎃이 거짓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버나뎃은 원해서 시애틀로 오지 않았기에 이웃들과 어울리고 싶어하지 않으며 이웃들을 각다귀라 부르고 집 앞에 이들을 거부하는 팻말까지 세운 난년대단한 인물이다. 오드리가 발등을 다친 까닭은 오드리를 피해 버나뎃이 차를 몰다가 차에 발등이 찍혔기 때문이고 오드리의 집마당에 산사태가 벌어진 것은 산사태가 일어날 걸 알고도 버나뎃이 오드리가 원한 대로, 경고 없이 블랙베리를 철거했기 때문이다. 이런 오드리의 주장에 더욱 힘을 실어주는 것은 버나뎃이 자신을 경외하는 건축학과 학생을 만났을 때의 장면이다. 버나뎃은 흥분한 학생의 모습을 보고도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않으며 그저 손만 내젓고 자리를 피한다. 타인의 눈에 비친 버나뎃은 사회성이 떨어지고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


타인의 눈에 비친 버나뎃을 묘사하는 다른 한 축은 엘진이다. 하지만 엘진이 보는 버나뎃과 실제 버나뎃이 얼마나 다른지를 직접적으로 비교해 보여주는 교차신이 있다. 엘진이 상담사를 만나 버나뎃을 묘사하기 시작하는 바로 그 시간 버나뎃은 과거의 동료인 폴 젤리네크(로렌스 피시번 분)를 만나 한탄을 늘어놓는다. 엘진이 묘사한 버나뎃은 상담사에게는 우울증 환자지만 젤리네크에겐 창조를 멈춘 후 답답해하는 천재 건축가다. 이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은 버나뎃이 섞어 놓은 약이다. 버나뎃에게 알약은 창조의 재료로서 색을 섞어 놓으니 그저 아름다웠고, 그러다 보니 무슨 약이 무슨 약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눈요깃감이 되고 말았지만 엘진의 입을 통해 상담사에게 전달되는 순간 버나뎃은 우울증 환자가 된다. 같은 사물을 버나뎃이 유독 다르게 바라본다는 점은 버나뎃이 과거에 설계했던 인테리어를 보면 알 수 있다. 안경을 엮어 만든 장식품이나 책과 연필 등을 이용해 만든 인테리어 소품들은 버나뎃이 세상을 보는 시각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창조의 재료인 버나뎃은 자신의 세상에 무언가가 더해지는 것이 항상 부담스러웠을테고 누군가를 대면할 필요가 없는 가상도우미 서비스를 이용한다. 세상과 동떨어져 지내다 보니 최신 사기수법에 대해 알 리도 없고 그러다보니 쉽게 범죄의 표적이 된다. 그리고 이런 버나뎃을 세상은 그저 우울증에 걸린 괴짜로 취급한다.



비가 이런 버나뎃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던 이유는 버나뎃과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비조차 버나뎃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버나뎃이 멀미에 시달리는데다 불특정 다수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비는 남극 여행을 가자고 조른다. 그리고 이로 인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버나뎃이 갑자기 사라지자 그 이유를 찾아 헤맨다. 그리고 그제서야 비는 뛰어난 건축가였던 버나뎃의 모습을 발견한다. 비에게 버나뎃은 좋은 엄마이자 친구였지만 위대한 예술가는 아니었다. 반면 젤리네크에게 버나뎃은 천재 건축가지만 엄마로서의 면모는 버나뎃이 한탄할 때까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스트레스에 미쳐가는 버나뎃에게 젤리네크는 창조를 하지 않으면 사회의 위협이 될 것이라는 위험한 충고를 한다(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다고 해서 위협이 된다는 말은 예술가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버나뎃을 지켜본 모든 이들은 그의 일부만을 알고 있었을 뿐이며 엄마이자 건축가로서의 버나뎃을 보지 못한다. 이를 봤어야 하는 이는 사실 남편인 엘진인데 엘진은 일을 하느라 아내와 딸을 모두 온전히 관찰하지 못했고 이제서야 버나뎃을 치료 시설로 보내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이행하려 하지만 그 전에 아내와 소통할 생각은 하지 못한다.


놀랍게도 버나뎃이 집을 뛰쳐나와 향한 곳은 그 자신이 각다귀라 부르며 경멸하던 이웃 오드리의 집이다. 그리고 오드리는 그제서야 버나뎃의 다른 면모를 발견하는데 동시에 버나뎃 또한 오드리의 다른 면을 발견한다. 우선 오드리는 도망다니던 버나뎃을 숨겨주었고 남극으로 갈 수 있도록 옷가지를 챙겨줌과 동시에 서로의 고충을 털어놓는다. 오드리가 버나뎃을 사회성 떨어지는 이웃으로 평가절하할 이유가 없는 만큼 버나뎃 또한 오드리를 참견하기 좋아하는 이웃으로 판단할 이유는 없다. 신형철이 말했듯 '우리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영화가 버나뎃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에 우리는 버나뎃이 복잡한 인물이라는 점을 이해하지만 엘진이나 오드리, 수 린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들 또한 각자 행동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엘진은 소통이라는 측면에서는 부족한 가족 구성원이지만 뛰어난 프로그래머이며 가족을 위해 한 달간 업무를 멈추고 남극을 가려고 하는 인물이다. 오드리는 간섭을 좋아하며 못난이 아들을 둔 이웃처럼 보이지만 마을의 화합은 오드리 없이는 힘들 것이며 오드리가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없다. 수 린 또한 가십을 즐기는 이웃처럼 보이지만 엘진이 없는 사이 업무를 대행해야 하는, 마이크로소프트에 입사한 재원이다.



버나뎃은 영화 말미에 이르러 본업으로 돌아가면서 정상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전의 버나뎃이 비정상이라는 근거는 있는가? 버나뎃은 그저 개인적인 삶을 즐기며 난임으로 고생했던 엄마이자 오드리와 친하지 않았던 이웃이었을 뿐이다. 건축가로 돌아온 버나뎃이 활력을 되찾은 것은 맞지만 그 전의 버나뎃을 약을 섞어 놓고 해야 할 일을 가상 도우미에게 맡겼기로서니 자살하려 했던 우울증 환자로 매도할 수는 없다. 그 또한 버나뎃을 이루는 일부분이며 하나씩 떼어놓고 본다면 누구나 할 법한 실수이자 경험이다. 우리 모두는 조금씩은 버나뎃인 게 아닐까. 때로는 혼자 있고 싶어하고, 일에 대한 열정이 있고, 그러면서도 가족의 따듯한 품이 필요한 누군가. 당신이 그렇듯이 버나뎃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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