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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Oct 05. 2020

인간적인 탐정을 찾아서

홈즈의 진화 혹은 변화

셜록 홈즈는 매력적인 탐정이다. 스크린이든 브라운관이든 탄생 이래 호출이 멈춘 역사가 없다. 셜록 홈즈의 이야기는 다양하게 변주되어 왔고 특히 CG기술이 극한으로 발전한 현재 화려한 연출과 함께 더 정교하고 복잡한 이야기로 보는 이를 매혹시킨다. 작금의 관객 혹은 시청자들에게 가장 유명한 셜록 홈즈는 아마도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고기능 소시오패스일 것이다. 언제나 성으로 불리던 과거와 달리 이제 그는 이름으로 불리며 풀네임 혹은 성이 아닌 오직 이름, 셜록으로 드라마의 제목까지 장식하며 자신의 특이한 이름을 전세계에 광고했다. 이름만큼이나 독특한(컴버배치, 셜록 모두 독특한 이름이다) 컴버배치의 셜록은 역대 셜록 홈즈 가운데 가장 특이한 성격을 자랑했다. 오만하고 자신감이 넘치고, 동료(라고 부르지만 누가 봐도 똘마니조수인) 존 왓슨 박사 이외에는 인간관계가 없다시피 하며 심지어 그것을 자랑스러워 하는 듯하는 동시에 발전된 CG기술로 인해 그의 두뇌가 풀가동하는 모습을 브라운관에서 시각적으로 구경할 수 있게 한 재수없는 셜록 홈즈. 그런 셜록마저도 시즌 3와 시즌 4에서는 부드럽고 정이 많은 모습을 종종 보여주었다. 신기한 것은 그럴수록 전세계의 <셜록> 팬들은 이런 설정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셜록은 실제 그과 같은 이들이 주위에 있다면 인간적으로 매력적이라고 느끼진 않(는 정도가 아니라 뒤에서 욕하)겠지만 멀리서 구경하기엔 참 재미있는 캐릭터였다. 하지만 시즌 3와 4를 거치며 인간적으로 변모하면서 그의 매력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주연의 <셜록 홈즈> 시리즈가 부활 소식을 간간이 들려오고 있는 가운데 넷플릭스가 택한 넥스트 홈즈는 셜록이 아닌 여동생 에놀라 홈즈다.


탐정 하면 떠오르는 실루엣을 만들어 낸 셜록 홈즈를 대체한 인물이 이와는 전혀 닮지 않은 여동생 에놀라(밀리 바비 브라운 분)라는 점은 넷플릭스다우면서도 당황스럽다. 에놀라는 셜록(헨리 카빌 분)이나 마이크로프트(샘 클라플린 분)처럼 비범한 두뇌를 가지고 있지만 가만히 앉아 생각하기보다는 발로 뛰며 증거를 모으고, 미성년인 여성이라는 한계로 행동반경이 자유롭지 않다. 존 왓슨 이외에는 타인에게 지독히도 관심이 없던 셜록과는 다르게 에놀라는 위기에 처한 듀크스베리 자작(루이스 패트리지 분)을 돕기 위해 찾아 나서기도 한다. 신기한 점은 헨리 카빌이 연기한 진한 인상의 셜록은 컴버배치의 셜록보다는 그나마 인간적으로 보이지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셜록보다는 딱딱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꼰대오브꼰대를 자처하는 마이크로프트 옆에서는 자상한 오빠처럼 비친다는 점이다. 차갑고 냉정하며 인간미 없는 컴버배치의 셜록에 모두들 익숙해진 탓인지, 아니면 원작에서 셜록 홈즈가 키카 크고 호리호리한 체형으로 묘사된 탓인지 아서 코난 도일의 후손들이 셜록 홈즈의 이미지와 (슈퍼맨을 연기한 전적이 있는) 헨리 카빌이 전혀 맞지 않는다며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놀라울 만큼 헨리 카빌의 셜록 또한 셜록 홈즈의 새로운 버전처럼 보인다. 관객들은 이제 인간적인 셜록 홈즈를 원하는 것일까, 아니면 겨우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뿐일까.


https://youtu.be/1d0Zf9sXlHk


원작에서는 볼 수 없었던 마이크로프트와 셜록의 여동생 에놀라가 홈즈 가문의 새로운 탐정 주역이 된 데는 아마 아직까지는 냉철한 셜록을 보고 싶은 관객들의 심리와 이제는 새로운 탐정, 특히 여성 캐릭터를 원하는 관객의 수요 사이에서 나온 넷플릭스의 판단이 있었을 것이다. 가장 고전적이고 딱딱한 마이크로프트와 자유분방한 에놀라 그리고 그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셜록, 세 홈즈 남매는 순서대로 변해가는 시대상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마이크로프트는 콧수염조차 깎지 않고 에놀라를 보자마자 모자와 장갑이 어딨냐며 호통을 친다. 셜록은 마이크로프트보다는 자상하지만 신부수업을 하는기숙학교에 갇힌 에놀라를 꺼내줄 생각은 없다. 하지만 에놀라가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고 머리좋은 오빠들을 피해 유유히 달아나자 마침내 마이크로프트에게 대항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에놀라는 단순히 여성 탐정으로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가치를 가지고 기존 남성성에 대항하는 동시에 이들을 변화시켜 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인물이다. 셜록은 극중 본인이 말하듯 정치에는 관심이 없는데 그 이유는 이디스(수지 워코마 분)가 말하듯 이 세상이 본인에게 편안하게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컴버배치의 셜록이 인간적으로 변모하려다 망테크를 탄 것을 의식한 탓인지 카빌의 셜록은 자상하지만 무심하다. 그리고 이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탐정이 바로 에놀라다.


셜록 이후 한때 차갑고 냉철하거나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이는 (남성) 캐릭터들이 스크린이나 브라운관에서 인기를 끌던 시절이 있었다. 셜록 홈즈의 미국 버전인 <엘리멘트리>가 성별 및 인종 쿼터를 맞춘 왓슨(조안 왓슨, 루시 리우 분)을 이끌고 등장하기도 했고 한국에서는 자폐인 의사가 등장하는 <굿 닥터>가 방영된 이후 미국에서 리메이크되어 아직까지 방영 중이다(참고로 드라마 <셜록>이 방영된 것이 2010년, 원작 <굿 닥터>가 방영된 것이 2013년이다). 실제 정신병력이 있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퍼셉션>이라는 미국 드라마도 있었다. 사회성은 떨어지지만 속된 말로 구경거리가 되는 천재성을 지닌 캐릭터들은 신선했기에 전 세계적으로 매혹적인 아이템이었지만 비슷한 캐릭터가 숱하게 등장한 데다 세계적인 경제 불황으로 인한 탓인지 이제 관객들은 세상을 구원하는 이들에게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관객들은 이제 세상사에는 관심이 없고 국지적인 살인사건만 해결한 채 자기 자리로 돌아가 평안한 삶을 영위하는 탐정보다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세상을 구원하려는 슈퍼히어로들에게 매혹되었다. 이들은 심지어 평범한 사람처럼 연인과의 관계로 고민하고, 집세 걱정을 하고, 동료들과 싸우기도 한다. 드라마 <셜록>은 냉철한 두뇌로 각종 사건들을 해결하던 셜록 홈즈가 자신이 아끼는 이들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방아쇠를 당기도록 함으로써 셜록이 가진 매력을 처참하게 부숴버렸고 미안한 얘기지만 그다지 멋있게 세상을 구하지도 못했다. 관객들이 스크린에서 보고 싶어하는 것과 셜록 홈즈에게서 원했던 것을 구분하지 못한 결과다. 시청자들이 보기를 원했던 셜록 홈즈는 방아쇠를 당기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천재적인 두뇌로 세상을 구한 후 유유히 베이커가 221B번지로 걸어갔어야 했다.


그리고 처참할 만큼 악평을 받았던 시즌 4를 뒤로 하고 이제 드라마 <셜록>은 새로 제작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후로 나타난 브라운관 및 스크린의 주역들은 컴버배치의 셜록과는 정반대의 노선을 걸었다. 혼자 일하곤 했던 셜록과는 달리(존 왓슨이 셜록과 함께 '일'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벤져스 혹은 저스티스 리그를 결성해 동료들과 함께 세상을 구했고, 연인관계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셜록과는 달리 이들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거나 연인을 위해 과거로 돌아가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사건 해결에만 관심이 있던 셜록과는 달리 이들은 세상에 관심이 있었고 자신들이 행한 일의 결과가, 의도는 선했을지라도 세상에 해를 끼치지는 않는지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가장 셜록과 유사한 캐릭터이자 동일 배우가 연기한 닥터 스트레인지(믿거나 말거나 셜록 홈즈와 닥터 스트레인지는 동일한 MBTI인 INTJ로 분류된다)는 어벤져스 인기투표에서 상위권이 아니며, 그마저도 연인이 있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 일시적으로나마 스스로를 희생하기도 했다. 에놀라 홈즈는 홈즈 가문의 냉철한 판단력과 뛰어난 두뇌를 물려받았지만 슈퍼히어로의 시대상에 맞춰 걷는 캐릭터로 거듭났다. 홈즈 남매의 어머니인 유도리아 버넷 홈즈는 헬레나 본햄 카터가 연기했는데, 어느날 사라진 이유를 쫓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배우의 최근작 하나가 떠오른다. 그리고 유도리아의 발자취는 에놀라가 뜬금없이 튀어나온 탐정이 아닌 시대상에 발맞춰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탐정임을 알려준다.



발전한 것은 홈즈 가문만이 아니다. 에놀라를 사건에 휘말려들게 한 장본인인 튜크스베리 자작은 기존 서브캐릭터의 관행에서 과감하게 벗어난다. 기존 제작자들이 여성 캐릭터들을 남성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기에 부차적으로 혹은 단순히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기능적인 역할만을 맡긴 데 반해 성 역할이 반전되며 튜크스베리 자작은 지속적으로 관객을 놀래킨다. 아무것도 모르는 부잣집 도련님 같던 튜크스베리는 꽃 이름을 줄줄 외울 만큼 지식이 풍부하고 자신이 행사하는 투표권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곰곰이 고심해온 인물이다. 그럼에도 처음으로 혼자 나서는 런던에 겁을 먹고 에놀라에게 동행을 제안하지만 거절당하고도 에놀라에게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지 않는다. 에놀라만큼의 총명함은 덜하지만 마냥 멍청하지 않고 에놀라처럼 무술을 할 수는 없지만 스스로의 몸은 지킬 수 있을 만큼의 기지를 발휘하기도 한다. 기존 서브 여성 캐릭터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세상 천진난만한 캐릭터로 그려지거나 주인공의 비극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희생되어온 역사를 감안하면 튜크스베리는 얄미울 만큼 독립적이며 긍정적인 의미에서 기능적이다. 그런 동시에 에놀라의 의사를 언제나 존중하며 에놀라가 활약하는 자리를 결코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매력을 발산하기도 한다. 튜크스베리는 멀어져가는 에놀라는 아쉬운 듯 바라보지만 자신에게 묶어두려 하지 않으며 에놀라가 찾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영국은 신사의 나라로 이미지메이킹을 극대화한 국가이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암묵적인 신분제가 유지될 만큼 폐쇄적이며 전통에 얽매인 국가이기도 하다. 그런 영국에서 탄생한 수많은 문학 고전들은 세계의 스토리메이커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동시에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답답함을 안겨 주기도 했다. 아직까지 셰익스피어와 제인 오스틴을 재탕하는 이 국가는 이제 드디어 새로운 한 발을 내딛고 있는지 모른다. 남의 말이라곤 들을 줄 모르며 유일한 친구인 왓슨 박사조차 동등한 관계가 아닌 조수 취급(을 하지만 동료인 척)하는 셜록 홈즈는 영국 그 자체를 투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은 이제 헨리 카빌이 연기하는 어설프지만 자상한 오빠인 셜록 홈즈를 받아들이고, 그에게만 비춰지던 스포트라이트를 옮겨 어머니인 유도리아와 여동생인 에놀라에 주목한다. 그리고 유도리아는 에놀라에게 아주 특별한 아이라고 속삭인다. 유도리아가 폭력적이고 남성적인 방식으로 바꾸려던 세상을 에놀라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바꾸어 냈기 때문이다(유도리아의 방식이 반드시 문제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조금은 뻔한 이야기임에도 탐정 에놀라의 이야기가 더 듣고 싶은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어쩌면 다음 이야기에서는 에놀라가 마이크로프트의 수염조차 밀어버리는 건 아닐까.


*포스터는 네이버영화 출처이며 저작권 문제가 없는 넷플릭스 이미지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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