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 Sep 28. 2020

승자독식의 부작용

한국에서 예체능의 재능은 저주인가

브런치를 시작할 때 제일 처음 쓴 리뷰는 <패왕별희>였다. <패왕별희>에 대한 리뷰는 대부분 데이와 샬루의 관계가 극중극인 패왕별희 내에서 초패왕 항우와 연인인 우희의 관계에 어떻게 비추어지는지에 대해 논한다. 지난 리뷰에서 이미 논했듯이 필자는 데이와 샬루의 관계보다는 이들이 왜 그런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가 더 관심사였고 그 원인으로 폭력으로 물든 경극학교의 교육방식을 꼽았었다. 그리고 정지우 감독의 영화 <4등>과 연결하여 왜 그런 교육방식이 문제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 논의와 영화들을 떠올리게 하는 다른 한 편의 영화가 개봉했다. 다이빙 선수들의 경쟁과 질투, 성공과 실패를 다룬 <디바>다. 전반적으로 공포영화의 연출을 어느정도 흉내내고 있기 때문에 <여고괴담3-여우계단>을 자연스럽게 연상시킨다. 1등이 되고자 하는 욕망과 시기, 질투를 다루고 있고 이를 위해서는 친구조차 배신할 수 있으며 심지어 금지된 수단에까지 손을 댄다는 점이 닮아있다. <디바>와 <여고괴담3-여우계단>은 승자독식의 한국식 예체능 사회의 문제점을 의도치 않게 함께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함께 되짚어볼 만하다. 한국 사회에서 예체능의 재능은 선물인가 저주인가.


많은 한국 학부모들이 우리 아이에게 예체능의 재능이 있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을 하는 모습을 많이 보아왔다. 그 이유는 우선 예체능 교육을 시키려면 돈이 든다. 김연아 선수는 자신에게 맞는 스케이트화를 찾기까지 여러 스케이트화를 거쳤다고 한 바 있는데 선수용 스케이트화 한 벌에 150만원 정도라고 한다. 대여섯벌만 신어봐도 몇백이 훌쩍이다. 제대로 그림 한번 그려본 이들이라면 알겠지만 붓부터 시작해서 물감, 종이까지 제대로 마련하면 이 또한 최소 몇십만원에서 몇백만원까지 소요되고 붓 종류도 세필붓이며 빽붓까지 수십가지인데다 물감과 종이는 주기적으로 떨어진다. 음악은? 성악을 제외하고는 비싼 악기값이 기초비용이고 성악은 뭐 방에서 혼자 소리지르나.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를 본 이들이라면 경우에 따라 연습 한 번에 풀오케스트라가 필요한 것을 알 것이다. 이러한 제반비용과 더불어 레슨비가 든다. 그리고 예체능을 하면 공부는 안해도 되나? 그리고 두번째로 국력이 약하고 천연자원이라곤 없으며 인력으로 먹고사는 이 국가에서는 예체능의 경우 축구와 같은 단체경기를 제외 1등이 아니면 대부분의 국민이 기억하지 못한다. 수영선수? 박태환 말고 기억나는 사람 있나? 역도? 장미란 선수 말고 누구 아세요? 피아니스트도 조성진 외에 손열음 정도나 들어봤을까. 바로 이 승자독식의 구조가 예체능을 하는 학생과 학부모의 가슴에 피멍을 들게 하는 근본 원인이다.



<디바> 속 최이영(신민아 분) 다이빙 선수는 이 승자독식의 구조에서 가장 상위에 있는 포식자지만 이영의 절친한 친구인 박수진(이유영 분)은 한때 잘나가던 주니어 시절을 뒤로하고 실적 부진으로 은퇴를 앞둔 선수다. 이영은 친구인 수진을 어떻게든 끌고 가기 위해 싱크로나이즈드 다이빙을 제안한다. 이영은 모든 것을 가진 것만 같다. 아름다운 외모와 금메달, 범국민적 인기, 광고 제안(으로 돈도 벌었을듯)까지. 거기다 동료 선수들 사이에서 성격도 좋기로 유명해 교통사고로 입원하자 후배들이 바로 병문안을 올 정도다. 겉보기에 이영은 자신이 독식한 것을 어떻게든 수진에게 나눠주려는 것처럼 보인다. 수진과 함께 지내기 위해 낡은 숙소에서 생활하고,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디자인의 팀복을 맞추고, 개인전에 집중해도 모자랄 시간을 수진과 함께하는 싱크로나이즈드 다이빙에 할애한다. 이영의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수진은 갑자기 실력을 올려 이영만큼, 아니 이영보다도 다이빙 실력이 좋아졌다는 평마저 듣는 와중에 이영과 수진은 교통사고에 휘말린다.


이후의 이야기는 이영과 수진이 평생에 걸쳐 어떻게 서로를 사랑하고 질투했는지에 대해 풀어나간다. 수진과 이영은 주니어시절 1, 2등을 다툴 만큼 치열하게 경쟁했지만 수진은 불의의 사고로 다이빙에 공포심을 갖게 되어 이영이 압도적인 1등 자리를 유지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사실 수진은 다이빙을 그만두었어야 한다(아니면 김 코치 말대로 치료를 받든가). 중학생의 나이에 그 시점까지 다이빙을 평생의 꿈으로 안고 살아온 소녀에게 이제와서 다이빙을 그만두라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적절한 시기에 누군가가 개입하여 수진의 공포를 없애주거나 다른 길을 제시했더라면 비극이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한국의 국민들은 많은 스포츠 영웅들이 국제 사회에서 국격을 드높이고 승리한 순간을 기억하지만 이들이 그 뒤에서 어떻게 훈련했는지, 그리고 영광의 순간 이후에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반면 북유럽 선진국의 축구선수들은 본업이 별개로 있는 경우가 많다. 평소에는 교사나 소방관 등으로 살아가다가 올림픽이나 월드컵 시즌에는 축구선수로 활약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이들은 축구경기에서 부상을 입더라도 돌아갈 자리가 있다. 이들에겐 아마 국제경기 출전이 인생의 재미있는 경험 중 하나쯤으로 치부될 것이며 이들이 경기에서 실수한다고 하더라도 범국민적 질타를 받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내 운동선수들은 스포츠가 삶의 전부이며 단 한번의 실수로도 일반 사람이 평생 들을 욕을 하루에 다 먹을 수도 있다(대부분이라 표현한 이유는 라크로스와 같이 비인기 종목인데다 국가 지원마저 부실한 스포츠의 경우 투잡 선수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진은 한국에서 태어났기에 다이빙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이영도 마찬가지다. 교통사고 이후 전처럼 다이빙을 할 수 없게 되어 실적이 부진해지자 이영 또한 히스테릭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코치와 싸우고, 스폰서에게 소리를 지르고 빗길에 무모한 운전을 한다. 수진은 이영에게 "네가 나였으면 나처럼 하지 않았을 것 같냐"고 질문하고 이영은 본인과 수진이 다르다며 애써 분리하려 들지만 결과적으로 이영과 수진의 선택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이는 이영과 수진 개인들의 문제가 아니며 여성들의 질투 문제도 아니다(다행히 영화에서 성별의 문제로 질투심을 풀어내지는 않았다). 성적을 강요하며 오직 1등에게만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한국 사회의 문제다. 수진이 불의의 사고를 겪지 않았다면 1등은 수진, 2등은 이영으로 이영이 받았던 스포트라이트와 지원은 모두 수진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단순히 주목도나 금전의 문제라고 하기엔 무명 선수들은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한다. 예체능을 시키고 싶지 않아하는 학부모들도 결국 이 문제를 걱정한다. 2, 3등을 해서 인지도는 없더라도 평생 먹고 살 돈을 벌 정도가 된다면 모를까 결국 이도저도 아니게 되는 케이스가 많기 때문이다. 운동선수들은 결국 체육코치 등의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이마저도 (특히 현 코로나 사태를 볼 때) 불안정하다. 미술이나 음악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미술계는 연예인들이 진출하여 전시회 자리마저 빼앗아 가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고 대중들은 클래식을 점차 멀리한다.


<여고괴담3-여우계단>의 진성(송지효 분)이 지젤을 연기하고 싶어했던 건 단순히 주인공 욕심이 아니었다. 콩쿠르 우승에 따른 수많은 혜택, 그리고 주변인들의 선망 섞인 시선을 원했던 것이다. 소희(박한별 분)가 출전하지 못한 콩쿨에서 진성이 우승을 했다는 사실은 결국 진성과 소희 또한 1, 2등을 다투는 발레 수재였음을 의미하며 혜택 또한 충분히 나눠가질만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수진이 말하듯 "아무리 얼굴이 일그러지고 추해도 멀리서 보면 아름다우면 되는" 다이빙처럼 발레리나들도 발 끝으로 서며 아름다운 춤을 보여주지만 그들의 발은 하이힐을 신기 어려울 만큼 망가진다고 한다. 평생을 바쳐 신체로 승부하는 것에 목숨을 걸어온 이들의 삶은 발레리나들의 발처럼, 다이빙 선수의 표정처럼 일그러져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들은 평생의 친구가 될 수도 있었던 이들조차 승자독식의 경쟁구조로 인해 잃고 만 게 아닐까. 결국 예체능인들은 국격 상승과 국민 단합을 위해 삶을 희생당하고 있는 것이며 1등이 아니면 희생의 댓가조차 돌려받지 못하는 현실이 이들을 벼랑까지 내모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나타난 망령이 주해령 귀신과 여우계단이다.



민주주의가 발전한 선진국에서는 발전하지 않는 손끝 동작 하나까지 일일이 맞추는 복사 붙여넣기식 발레가 왜 공산주의 국가인 러시아에서는 극단으로 발달한 것일까. 서구화된 사회에서는 같은 뮤지컬을 하더라도 배우 개개인에 따라 다른 해석을 중시하지 않는가. 같은 동작으로 정해진 횟수만큼 회전하여 추락해야 하는 다이빙을 스크린을 통해 지켜보면서 어쩌면 한국 사회도 별다를 바가 없는 건 아닐지 의구심이 들었다. 이들이 추락한 자리에 있어야 하는 물이라는 안전망은 한국 사회에 정녕 존재하는가. 아니면 다이빙 선수들은 물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면서도 선택권이 없어 다이빙대를 걸어서 내려가지 못하고 최선을 다해 추락하는 건 아닐까.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스크린이라는 현미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