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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Nov 09. 2020

머글의 시선을 끄는 서로 다른 방법

동서양의 음악영화는 어떻게 다른가

관객은 음악영화에 등장하는 음악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위플래쉬> 속 재즈 음악들의 이름은 물론이고 극중 언급되는 재즈 뮤지션의 이름조차 생소한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재즈뿐만 아니라 특정 분야를 깊숙이 다루는 이야기의 딜레마는 여기서 발생한다. 관객의 절대 다수가 재즈 덕후가 아닌 (머글이라 불리우는) 재즈알못이기에 이들의 시선까지 스크린에 고정시켜 두려면 색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박겉핥기 식으로 재즈를 다루기엔 의미도 없고 연출자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최근 개봉한 일본 클래식 음악영화 <꿀벌과 천둥>, 그리고 재개봉한 <위플래쉬>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곳에서 해답을 찾았다. <꿀벌과 천둥>은 클래식 음악을 다루면서 경연에 참가한 참가자들의 사연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위플래쉬>는 자극적인 연출과 스승-제자 사이의 알력 경쟁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어느 쪽이 정답이라거나 더 낫다고 볼 수는 없지만 연출 방식에 있어서나 다루는 정서에 있어 동서양의 차이점이 보이는 점은 흥미롭다. 음악 분야에서 경쟁이 과열된 건 동서양이 마찬가지일텐데 <위플래쉬>가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를 치열하게 다룰 수 있는 건 나이에 관계없이 상대방을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해온 서양 문화 기반에서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꿀벌과 천둥>이 (최소한 겉으로나마) 경쟁자 간에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고 종국에는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과의 경쟁으로 이야기를 갈무리하는 것은 내면을 파고드는 동양 문화에 기반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본다면 <위플래쉬>는 음악영화인가, 스승과 제자의 관계 혹은 음악인의 고충을 다루는 영화인가. 분명 <위플래쉬>는 재즈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는 영화인 동시에 재즈 음악인들의 고충을 슬쩍 드러내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는 영화 중반 앤드류(마일즈 텔러 분)의 가족식사 테이블에서 오가는 대화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앤드류는 미국 최고의 음악학교라는 셰이퍼 음악학교에 입학해 그 중에서도 들어가기 힘들다는 플레처 교수(J.K. 시몬스 분)의 스튜디오 밴드에 입성하고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다. 식구들은 사촌들의 별것 아닌 근황도 추어올리기 바쁘지만 앤드류의 성과에는 관심도 없고 들어도 잘 모른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관객들은 앤드류의 친척들과 비슷한 입장일 것이다. 이는 비단 재즈인뿐만 아니라 순수예술을 하는 대부분의 직업 예술인들이 겪는 고충이기도 하다. 대중들은 아이돌 음악이나 팝에는 훤하지만 클래식이나 재즈 음악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앤드류의 친척들은 직접적으로 '밥벌어먹고 살기 힘든 분야'라고 언급하고 <꿀벌과 천둥> 속 아카시(마츠자카 토리 분)는 나이가 들어 직장과 병행하며 음악인의 삶을 이어나간다. 20살 전후의 다른 참가자들과는 달리 20대 후반으로 참가 자격에도 간신히 포함된 아카시는 가정이 있는 직장인으로서 전문 음악인이 아닌 생활인의 음악에도 어떤 경지가 있을 것이라 믿지만 2차전에서 장렬하게 탈락한다. 앤드류 또한 플레처 교수와 사이가 틀어지자 제적당하고 드럼을 방에 밀어넣은 뒤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의 삶으로 일시적으로나마 옮겨간다.



<위플래쉬>는 플레처 교수의 화법처럼 끊임없이 관객을 몰아붙이며 숨가쁘게 달려가는 영화처럼 보이지만 윗문단에서 지적한 대로 음악인들의 삶을 보여주며 한 템포씩 쉬어가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렇게 강약중강약을 완급으로 조절한 덕분에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이 불후의 입봉작으로 단연 업계의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이런 연출이 가능한 것은 앞서 언급한 대로 스승과 제자 사이라 할지라도 앤드류가 플레처 교수에게 하듯 고개를 빳빳이 들고 대드는 것이 가능한 서양 문화에 기반한다. 플레처 교수는 처음에는 학생들에게 다정하게 대하며 가정사를 물어보고 개인 정보를 수집하는데 이는 그들과 친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몰아붙일 때 공격하기 위해서다(앤드류는 편부 가정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흘리는데 이는 결국 플레처 교수의 "그러니까 네 엄마가 도망가지 " 공격으로 돌아온다). 플레처 교수가 결국 영화 후반 셰이퍼 학교에서 해고당하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이는 인신공격에다 인격 모독이라 교육자로서 바람직한 태도는 결코 아니다. 거기다 자세히 보면 플레처 교수의 스튜디오 밴드 멤버는 전원 남성 연주자들이고 이후 JVC 페스티벌의 밴드도 대부분이 남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다 대사 또한 여성혐오적인 표현이 은연중에 튀어나오는 것으로 보아 성차별주의자로 보이며 반유대주의적인 대사 또한 만만치않게 등장한다. 학생들을 공포감으로 다루는 만큼 연습 중 눈물을 흘리며 뛰쳐나가는 연주자도 등장하는데 이에 반격을 아마도 처음으로 개시한 사람이 앤드류일 것이다.


반면 <꿀벌과 천둥>에는 스승-제자 관계는 배경으로서만 제시되고 이야기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참가자들의 사연에 집중하다 보니 불가피한 선택일 수도 있겠지만 스승들은 대체로 제자들을 돕기 위해서만 존재할 뿐 플레처 교수처럼 몰아붙이는 이들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위플래쉬>처럼 자극적인 요소가 상대적으로 적다. <꿀벌과 천둥>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주인공 에이덴 아야(마츠오카 마유 분)의 과거사와 고뇌에 집중한다. 아야는 어린시절 천재소녀로 불렸지만 한동안 잠적했다가 스무살이 되어서야 클래식 음악계로 돌아온다. 아야의 사연을 모르는 다른 참가자들은 아야에 대해 멋대로 추측하고 심지어는 아야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그리고 여전히 음악을 이어갈까 고민하는 아야에게 심사위원 미에코(사이토 유키 분)는 이번이 음악을 그만둘 기회일 수도 있다며 점잖게 조언한다. 의자를 집어던지고 소리를 지르며 관두라고 윽박지르는 플레처 교수와는 영 딴판이다. 동양, 그 중에서도 민폐끼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일본 문화에서 만들어진 영화라 가능한 연출이다. 아야에게 유일하게 대놓고 화를 내는 건 일본계 미국인인 제니퍼 챈(후쿠시마 리라 분)뿐이다. 플레처 교수에게 대들고 친척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할 말은 다 하고 나오는 앤드류와는 달리 아야는 답답할 정도로 혼자 고민한다. 그러다보니 마지막 순간 아야가 마음을 바꾸어 다시 대회에 출전하기로 마음먹는 장면에서 개연성이 부족해 보이는 감이 있다. 이를 커버하기 위해 <꿀벌과 천둥>은 자연적인 자극에 집중한다. 비가 오는 소리, 풍경 소리 등에서 아야의 과거 기억을 연결시키는데 여전히 억지스러운 감은 있지만 애초에 과거의 기억으로 인해 피아노를 그만둔 아야에게는 어느 정도 타당해 보이는 연출이기도 하다.



반면 <위플래쉬>가 집중하는 자극은 보다 선정적이다. 드럼을 치며 튄 앤드류의 피, 연주자들의 땀으로 젖은 귀 그리고 악기에 얹어진 (때로는 밴드가 칭칭 감긴) 손 등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며 자극을 극대화한다. 여기에 앤드류가 경연장으로 오며 난 차사고로 인해 앤드류의 이마와 정장에도 선혈이 추가되어 선정성을 한층 높인다. 애초에 앤드류의 악기가 드럼인 이유는 선혈이 낭자하는 악기여서일지도 모른다. 트럼펫을 아무리 불어봤자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는 새빨개진 얼굴이나 토한 피 정도일 것이다. 드럼은 드럼스틱을 가지고 다루는 악기이기에 연주자의 얼굴 표정을 전부 보여줄 수 있으며 손에 난 상처들과 그로 인해 튄 피의 흔적이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플레처 교수와 연습할 때는 찡그린 표정으로 경쟁하듯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드럼을 치던 앤드류는 영화 말미에 이르러 활짝 웃으며 드럼을 연주한다. 이는 단순히 원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드디어 플레처 교수에게 장대한 엿을 먹이는 동시에 연주의 주도권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앤드류는 지휘자의 신호 없이 카라반 연주를 시작하고 스스로 지휘자의 자리에 올라선다. 결국 플레처 교수는 앤드류의 드럼 소리에 맞추어 지휘하고 빼앗긴 주도권에도 어딘가 흐뭇해 보이는 표정을 짓는다. 앤드류는 포스트 찰리 파커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포스트 플레처는 될 수 있을 것이다.


<꿀벌과 천둥> 속 마지막 경연에서의 연주자들은 이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오케스트라와의 합주로 최종 순위를 정하는 마지막 경연에서 이들은 나름의 이유로 갈팡질팡하지만 지휘자의 뜻을 거스르지는 못한다. 업계에서 악명이 높다고 일컬어지는 오노데라에게 그나마 자신의 연주에 맞춰 달라고 요구하는 건 역시나 일본계 미국인인 마사루(모리사키 윈 분)뿐이지만 그마저도 거절당한다. 결국 마사루는 자신의 연주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고 연주를 마무리할 수 있게 된다. 지휘자의 눈치를 보며 피아노를 치던 아야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피아노를 치는 즐거움을 기억해내고 자유롭게 연주한다. 지휘자 오노데라는 아야의 피아노 소리를 듣고 활짝 웃으며 지휘하고 아야 또한 세상 즐거운 표정으로 경연을 마무리한다. 참가자들은 오케스트라의 주인공임에도 연주의 주도권을 가져오지는 못하며 그저 피아노 연주를 통해 스스로의 장벽만을 격파해 나갈 뿐이다(사실 지휘자가 존재하는 건 전체 음악을 조율하는 역할 때문이니 이게 맞긴 하다..). 하지만 어쩌면 오히려 수직적인 선후배 문화가 아직까지 존재하는 동양이기에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피아니스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놀랍게도 일본어에도 '하극상'이라는 단어가 존재한다). 앤드류는 자신이 왜 드럼을 치고 싶은지 혹은 드럼을 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지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 플레처 교수 또한 음악인 이외의 삶을 꿈꿔본 적이 없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인간관계에서의 수직성과 수평성이 개인의 고뇌를 다루는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오랜만에 재개봉으로 모습을 드러낸 <위플래쉬>는 재즈음악의 세계로 머글들을 이끄는 놀라운 음악영화인 동시에 음악인들의 고충을 보여주고 이들 사이에 권력이 오가는 모습을 보여준 수작이다. 반면 만듦새는 범작에 가깝지만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꿀벌과 천둥> 또한 음악인들의 고뇌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위플래쉬> 쪽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고 해서 양 영화에 반영된 문화적 기반마저 우열이 나뉜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두 영화는 동서양의 정서가 영화적으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비교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사례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 관람 직후 귀에 맴도는 음악은 덤이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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