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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Nov 16. 2020

서사의 주체와 지분

<힐빌리의 노래>의 진짜 주인공은 누구인가

영화의 주인공과 화자가 별개의 인물인 경우는 흔하다. 1인칭 시점이 아닌 경우 종종 나레이션이 영화 초반 잔잔하게 깔리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영화가 이런 경우다. <텔 잇 투 더 비즈>의 경우 실제 주인공은 리디아(홀리데이 그레인저 분)지만 화자는 성인이 된 찰리(목소리 출연 빌리 보이드 분)다. 하지만 화자가 서사상의 주인공임에도 존재감이 미약한 경우는 어떨까. 넷플릭스 신작인 <힐빌리의 노래>는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체이자 주인공인 JD(가브리엘 바쏘 분)보다도 JD의 어머니 베벌리(에이미 아담스 분)와 할머니(글렌 클로즈 분)의 존재감이 훨씬 강한 영화다. 실제 크레딧에도 에이미 아담스가 먼저 등장하고 포스터에는 대놓고 에이미 아담스와 글렌 클로즈 이름밖에 없다. 심지어 차기 오스카 시상식에서 두 배우는 강력한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후보로 떠오르기까지 했다(현재로서는 후보조차 발표되지 않은 상태다글렌언니 드디어 오스카타나요). 한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베벌리는 최소한 극 중에서는 그다지 입체적인 인물도 아니며 스스로 변화하는 입지전적인 인물은 오히려 화자인 JD라는 점이다. 전형적인 폭력가정 극복실화이기는 하나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서 성공한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JD는 그다지 매력적이지가 않다. <힐빌리의 노래>는 JD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 베벌리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


마약 오남용과 가정폭력이 담긴 서사는 헐리우드에서 생각보다 흔하다. 마약에 찌든 인물이나 마약 카르텔을 때려잡는 형사 이야기도 많고 배우상 수상자 중 해당 캐릭터들을 연기해본 이들도 실제 비율로 환산해보면 꽤 많은 지분을 차지할 것이다. 이는 미국이 마약과 총기가 어느 정도 허용되는 국가임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또한  실화 기반이든 아니든 극적인 요소가 다분한데다 관객에게 시각적인 충격을 주기에 적합한 소재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한국에서는 마약이 금지되어 접할 기회가 제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객들이 영화를 보며 하얀 가루가 나오면 마약일거라 쉽게 짐작하기도 한다. 미국에서 가장 많은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3대 요소를 꼽는다면 마약, 가정폭력, 총기가 아닐까. 하지만 그만큼 영화나 드라마 상에서 흔하게 다루어지고 있어 피로감을 불러일으키는 소재들이기도 하다. 때문에 <힐빌리의 노래>는 JD 밴스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한 실화 기반의 영화임에도 기시감으로 가득하다. 마약으로 인해 정신을 못 차리는 캐릭터는 <뷰티풀 보이>에서 티모시 샬라메가 이미 눈물겹게 연기한 바 있다. 가난에서 탈출한 개천용 스토리는 지겹도록 많은데 예를 들자면 <행복을 찾아서>가 있다. 다만 <힐빌리의 노래>가 흥미로움과 아쉬움을 오가는 이유는 베벌리의 활용이 2% 부족하기 때문이다. 극중 베벌리는 마약 오남용과 가정폭력으로 얼룩진 삶을 보내는데, 에이미 아담스의 표현력은 눈이 부실 정도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베벌리의 재활은 극적인 요소가 아니었던 걸까.



JD의 자서전에서 시작한 영화이기에 서사의 주인공이 JD가 될 수밖에 없긴 하지만 활용도가 떨어짐에도 기실 극중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는 베벌리다. JD는 그 자신을 지켜줄 이들이 많았다. 베벌리가 저지르는 가정폭력을 목격한 이웃과 경찰들은 JD를 구하고자 하고, 누나 린지(헤일리 베넷 분)는 그 자신도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JD를 가정폭력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하는 데 죄책감을 느낀다. 결국 린지의 죄책감을 본 할머니는 베벌리에게서 JD를 떼어내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고 자신을 위해 복지사 앞에서 비굴한 모습까지 보이는 할머니를 본 JD는 변화하기 시작한다. 반면 베벌리는 그 자신이 겪어야 했던 가정폭력에서 지켜줄 이가 전무했다. 본인이 저지르는 가정폭력보다도 강도높은 가정폭력을 보고 자란 베벌리는 그로 인해 린지가 가엾게 여기는 대상이 된다. 400명 중 차석으로 학교를 졸업할 만큼 머리가 좋았지만 대학을 가라고 말해주는 이가 없어 18세부터 아이들 걱정을 하며 간호사 일로 생계를 유지해 온 악바리이기도 하다. 심지어 베벌리는 결국 약물을 끊어내고 간호사로 복귀하는데 이 모습은 왜 스크린에서 볼 수 없는 것일까.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JD보다도 베벌리는 어쩌면 훨씬 뛰어난 성취를 이룩해냈을지 모른다. 믿어주는 이 하나 없는 환경에서 스스로를 다독이며 남편 없이 두 아이를 키우며 직장을 유지하고 약물로부터도 극복한 베벌리의 서사는 왜 JD의 역경으로만 치부되는가.


미안한 얘기지만 결국 JD는 집안 여성들의 희생을 자양분삼아 성장한 남성에 불과하다. JD는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가장의 역할을 떠맡은 어머니로부터 생계를 보장받았고 어머니라는 틀이 무너져 내리며 누나의 죄책감으로 인해 양육자의 역할을 할머니에게로 옮겼다. 심지어 JD가 장성하여 마을을 떠난 이후에도 가족을 돌보는 책임은 누나에게로 돌아갔고 JD는 마음편하게 로스쿨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다. 심지어 JD가 베벌리의 입원 스케줄로 인해 마을로 돌아오자 베벌리의 책임소재는 여자친구인 우샤(프리다 핀토 분)에게까지 옮겨갈 뻔한다. JD는 하루동안 어머니를 돌보며 과거를 돌아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JD의 커리어를 위해 희생하는 건 결국 누나다. 애초에 린지는 왜 JD에게 죄책감을 갖는가? 린지는 JD의 누나일 뿐 양육자가 아니며 남자친구의 집으로 도망쳐 자신의 생존을 보장받아야 했던 또 하나의 희생자다. 역설적으로 도망칠 곳이 있었기에 할머니라는 양육자를 얻지 못한 린지는 JD처럼 학업에 매진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 카드 게임에 능하고 영화 대사를 술술 외는 할머니를 볼 때 밴스 집안의 뛰어난 두뇌는 모계유전으로 보이는데 기회만 있었다면 린지도 전문 직종에 도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남편과의 불화로 가정폭력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동시에 그로 인한 피해자인 딸의 망가진 모습을 보고 손자를 데려와 직접 양육할 결심을 하는 할머니 또한 대단히 입체적인 인물이다. 쓰러져 입원한 병원에서 린지의 한탄을 듣고 몸에 꽂힌 각종 링거를 뽑고 결연하게 병원을 나서는 할머니의 모습은 정장을 입은 JD보다도 위풍당당하다. 성별의 문제로 볼 수도 있겠지만 종국에는 이 서사는 화자인 JD와 서사의 대상이 되는 여성들로 나뉘는 것처럼 보인다.



서사의 주체인 JD가 서사의 꽤 많은 지분을 할당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나 베벌리에 비해 병풍처럼 보이는 데는 에이미 아담스와 글렌 클로즈의 연기력도 한몫한다. 특히 아이들을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비관하고 훈육이라는 명목 아래 가정폭력을 저지르는 베벌리를 연기한 에이미 아담스는 약물 중독자의 감정선이 극과 극을 오갈 때에도 설득력이 있다. 대선배인 글렌 클로즈와 맞붙는 장면에서도 결코 지지 않는 에이미 아담스는 <컨택트>에서 나긋나긋한 언어학자를 연기한 이가 맞나 싶을 만큼 드세다. 마찬가지로 <더 와이프>에서 평생 말없이 희생을 감내한 조안과는 외양과 억양 모두 완전히 다른 인물을 글렌 클로즈는 위화감없이 스크린에 펼쳐놓는다. 크레딧에도 에이미 아담스의 이름이 가장 먼저 소개되는 만큼 <힐빌리의 노래>의 실질적 주인공은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은 쉽사리 가시지 않는다. 이는 정녕 폭력가정에서 역경을 딛고 극복한 JD의 서사인가? 아니면 가정폭력을 겪고 스스로 이를 대물림하면서도 변호사가 된 아들을 키워내고 약물중독을 극복한 베벌리의 서사인가? 혹은 시궁창 개천에서 끊임없이 삶을 살아가며 JD라는 아웃풋을 산출해 낸 밴스 집안의 여성들인 할머니, 베벌리, 린지의 서사인가? 관객이 JD가 화자임을 잊을 때쯤 영화는 한 번씩 JD의 과거로 돌아가 역경을 풀어놓지만 극이 마무리된 후 관객의 뇌리에 남는 것은 병원에서 자유롭게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돌아다니던 베벌리의 모습 혹은 병실을 결연하게 나서던 할머니의 모습이다. 


힘겹게 개천을 탈출한 JD가 전형적이라고는 하나 입체적인 인물 확립에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JD의 구원 대상이 언제나 그 자신이었으며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이 구원하고자 하는 이는 JD 혹은 베벌리다. 더군다나 JD는 역경에 부딪힐 때마다 다른 누군가에게로 언제나 도망친다. 기댈 곳이 없었던 베벌리는 그 자신을 구원하고자 했지만 방법을 알지 못했고 어느샌가 책임질 대상마저 떠안는다. 반면 JD는 아버지의 부재 후 어머니, 어머니의 양육 실패 후 할머니, 그리고 독립한 이후에도 여자친구 우샤 등 기댈 곳을 끊임없이 찾아나선다. 심지어 마지막으로 우샤의 도움조차 청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누나가 최후의 보루가 된다. JD는 분명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서 꿋꿋하게 자란 인물이지만 그 어려운 환경에 남겨진 모든 단물을 빨아먹은 인물이기도 하다. 때문에 JD의 서사는 알바를 3개나 하며 학업을 이어가는 와중에도 불구하고 안락하게 느껴진다. 반면 베벌리의 인생은 극 내내 가정폭력과 약물중독으로 가득한 것으로 그려지지만 안타까운 전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약물중독을 극복하려는 의지로 인해 입체적인 인물로 비춰진다. 좋든 나쁘든 베벌리는 언제나 스스로 선택한다. 결혼할지 말지, 이사갈지 말지, 그리고 요양원에 들어갈지 들어가지 않을지. 하지만 JD는 언제나 타인의 선택에 끌려다닌다. 남자친구의 집으로 도망친 누나와는 다르게 할머니가 데려갈 때까지 베벌리와 머물고, 할머니가 맘에 들지 않으면 나가라고 하자 끝내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계산기를 주워온다. 베벌리를 모텔에 남겨두고 면접을 보러가는 것 또한 스스로가 아닌 누나 린지의 선택에 의한 결과다. JD는 입체적일지 몰라도 수동적인 인물로 그려지며 때문에 인물의 매력을 놓치고 만다.



<힐빌리의 노래>에 등장하는 이들을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 혹은 성별을 기준으로 나누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서사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사연을 지니고 있고 종국에는 모두의 해피엔딩을 향해 달려가기 때문이다. 이들을 성별로 나누기보다는 성별에 의해 등장인물들이 겪어야 했던 삶이 영화의 기반이 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 그럼에도 매력적인 서사의 주체가 될 수 있었던 여성들이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해 고학력 남성 서사의 객체로 전락한 점은 아쉽다. 하지만 이들을 놀라울 만큼 반짝이며 생생하게 살아 숨쉰다. JD가 자신을 중심으로 풀어놓은 썰에서도 그것만은 가리지 못한 이유가 있으리라.


*모든 이미지는 네이버영화 출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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