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 Feb 01. 2021

너랑 비슷한 애 하나쯤은 있겠지

다르지만 결국은 같은

일반적으로 너드nerd라는 단어를 듣고 떠올리는 이미지는 안경을 끼고 타자기를 두드려대는 지루한 개발자의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그 개발자는 십중팔구 남성일 가능성이 높다. 여성 너드를 쉽게 떠올리지 못하는 이유는 사회적으로 여성 너드보다는 남성 너드가 살아남기가 더 쉽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디어에서 여성 너드를 거의 그리지 않기 때문이다. <분노의 질주:더 익스트림>에 등장했던 여성 개발자는 너드의 모습이 아니라 섹시한 모습이었다(실제 영화에 등장하는 남성 캐릭터가 한 말이다). 해리 포터가 등장하며 해낸 위대한 일(?) 가운데 하나가 안경잡이에 대한 이미지 개선이었다니 애초에 안경에 대한 서구 세계의 이미지 자체가 그닥 좋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특히나 안경을 쓴 여성 캐릭터는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공식 석상에도 노령의 일부 배우를 제외하면 여배우들은 대부분 안경 없이 등장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의 흑역사를 묘사할 때 가장 많이 보이는 과거 사진은 안경을 끼고 교정장치를 한 모습이다. 너드로 시작했지만 너드 이외에도 주로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캐릭터는.. 그냥 대부분이다. 천재, 괴짜, 빌런, 살인마, 신, ...그만하자 바로 떠오르는 배역은 대부분 남자다. 셜록 홈즈, 조커, 4885, (<브루스 올마이티>의)모건 프리먼, ... 특히 이런 캐릭터들이 떼로 등장할 경우 배역의 대부분은 남성에게 할당된다. 올리비아 와일드의 <북스마트>는 흔한 하이틴 영화처럼 보이지만 여고생들에게 다양성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눈에 띈다. 드디어 스크린에서 여자 너드를 찾았다. 여성 관객들은 이 다양한 캐릭터들 중 한 명쯤은 나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북스마트>가 흥미로웠던 건 이렇게 다양한 여성들을 등장시키면서도 전형적으로 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에이미(케이틀린 디버 분)와 몰리(비니 펠드스타인 분)는 전형적인 모범생처럼 등장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놀 줄 모르는 건 아니며 나르시시즘에 취하는 대신 사회적인 학습을 통해 성장하기도 한다. 트리플 에이(몰리 고든 분) 또한 전형적인 퀸카처럼 보이지만 몰리와 함께 예일에 입학할 수재인 동시에 정 많은 모습을 숨기고 있는 캐릭터다. 남성 캐릭터들 또한 곁가지로 등장하는데 영화 초반에 보여주는 모습과 후반에 보여주는 모습에는 꽤 차이가 있다. 하이틴 영화들은 주로 프로타고니스트를 선인으로, 안타고니스트를 악인으로 규정하고 선인이 외모 변신을 통해 달라지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거나 악인이 선인으로부터 사회화되는 과정을 묘사하곤 한다. <북스마트>에는 절대 선인도 절대 악인도 없다.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 모두 장단점을 지니고 있고 영화 말미 모두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물을 전형적으로 그릴 경우 관객들에게 캐릭터를 설명할 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서사의 구조를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는 장점이 있다. 단점은 원형에 가까운 인물상과 서사는 지루할 뿐더러 실제 사람들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의외로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악한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천사이기도 하다. 충분한 시간이 있는 드라마와는 달리 러닝타임이 부족한 영화 장르는 이런 부분에 있어서 취약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북스마트>는 이런 단점들을 커버하고 다양성을 성별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분배한 이야기다.



인물의 다양한 면모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성인 캐릭터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 낮에는 교장선생님이지만 밤에는 우버 택시기사를 하고 있는 조던(제이슨 서디키스 분)이 대표적이다. 학교에서는 몰리를 매몰차게 대하던 조던은 택시기사가 되자 몰리에게 충전기 케이블을 건네고 이름으로 부르라는 등 다정한 모습을 보인다. 물론 사회적인 지위가 일상생활에서도 이어지는 동양 문화권에서는 인물의 다중성에 관계없이 하극상으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크지만 그럼에도 권위적인 인물이 자신의 타이틀을 내려놓는 순간에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어떤 인물에게 붙는 타이틀은 영화 내내 거의 모든 캐릭터에게 따라붙는 주제다. 정해진 별명이 없더라도 대부분의 등장인물에게는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이미지가 있다. 제러드는 성매매를 하는 부잣집 아들, 지지는 또라이, 트리플 에이는 긴급대기차roadside system.. 심지어 트리플 에이의 본명은 영화의 후반부에 가서야 밝혀진다. 적어도 대학에서는 이름으로 불리고 싶다는 트리플 에이의 소망은 타이틀이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학교라는 한정된 공간과 이 공간을 벗어났을 때 인물들이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타인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 수 있다. 지지를 그저 특이한 소녀로만 보던 몰리는 파티에서 제러드에게서 지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시각을 달리하게 된다(개인적으로는 지지같은 친구가 하나 있으면 재미있을 것 같다).


<북스마트>가 재밌었던 점은 몰리와 에이미를 마냥 비주류로만 묘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스스로를 주류 사회로부터 절연시켜 공부에만 몰두했던 몰리와 에이미는 학교 친구가 많지 않아 닉의 파티가 벌어지는 장소를 전달받지 못한다. 졸업식 전날 화끈하게 놀아봐야겠다고 다짐한 에이미와 몰리는 엉뚱한 파티들을 거쳐 닉의 파티에 도달한다(대체 몇 시에 도착한거니..?). 기존의 하이틴 영화였다면 몰리와 에이미는 닉의 파티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끝무렵에 도착하거나 혹은 파티에서 파티가 별것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예상과는 달리 몰리와 에이미는 천신만고 끝에 닉의 파티에 도착하고 그 곳에서 천대받기는커녕 신나는 시간을 보낸다. 파티의 후반부는 예상대로 흘러가는 감이 있지만 그럼에도 에이미와 몰리를 공부벌레로만 보던 이들은 에이미와 몰리가 1차원적인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몰리는 파티 게임에 능하고 위트가 넘치는 매력인이었으며 에이미는 뛰어난 노래실력을 가지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사교인이었다. 몰리와 에이미의 색다른 모습은 이들이 변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면모를 드러낸 것에 가깝다. 에이미와 몰리를 좋지 않게 말하던 트리플 에이, 태너, 테오 또한 파티에서는 이들을 맞아들이며 새로운 모습을 환영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10대들의 성장은 자신조차 몰랐던 모습을 발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지고 타인의 다중성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몰리는 자신이 준비했던 설교적인 졸업 연설을 버리고 겸손한 모습으로 연단에 선다.



동양 사회보다는 서구 사회에서 외향적인 성격이 각광받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파티가 중시되는 만큼 인물들의 의외성을 외향적인 모습에서만 드러내는 점은 조금 아쉽다. 기실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외향성을 지니고 있고 내향적인 인물들은 거의 등장하지 않아 내향성에 대한 긍정적인 면모는 부각되지 않는다. <북스마트>를 논함에 있어 외향성에 대한 찬양은 다소 평가가 엇갈릴 수 있다. 긍정적인 점으로는 영화의 대본을 작성하는 시나리오 작가들 대부분이 내향적인 면모를 더 지니고 있기 때문에 외향의 긍정성에 대한 이야기를 의외로 영화계에서 보기가 쉽지 않은데 <북스마트>에서는 외향성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다소 아쉬운 점은 내향적인 관객들이 이입할 여지가 적다는 점이다. 에이미나 몰리에 이입해서 보다 보면 미국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파티에 참석하고, 재치가 있어야 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술도 몇 잔씩 드링킹할 수 있는 체력이 필수인 것처럼 느껴진다. 결국 <북스마트>는 에이미도 몰리도 공부를 잘했을 뿐 내향인이 아니라 외향인이었다는 반전을 기저에 깔아두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관객은 내향성과 외향성을 모두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신도 알아채지 못했던 외향성을 깨닫는 내향적인 관객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북스마트>는 전형적인 하이틴 우정 서사(친구 > 다툼 > 다시 친구)를 그려내고 있지만 전형적인 선인도 악인도 없이 모든 캐릭터에게 서사를 부여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궤를 달리한다. 동시에 인간에게는 다양한 면모가 있기에 누군가를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안겨주기도 한다. 많은 서사에서 인물을 묘사할 때 성장배경과 가정환경을 언급하는데 <북스마트>에서는 이를 생략하고 인물의 성격에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음으로써 성격이란 각자 다르게 타고난 것이며 환경에 의해서만 구애받지 않음을 살그머니 역설하기도 한다. 크로켓 고교를 졸업한 이들은 각자 다른 인생을 살겠지만 졸업식 전날의 파티 소동으로 인해 모두 한 단계 성장했을 것이며 설령 다시 모이지 않더라도 서로에 대해 새로운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세상의 주류를 향한 교훈적인 설교를 하려고 했던 몰리는 나나 여러분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졸업 연설을 통해 인정하고 세상 밖으로 나선다(과연 몰리와 에이미는 비주류였을까?). 비주류가 세상에서 인정을 받는 방법에는 주류를 전복하는 방법도 있을 테지만 주류와 소통하고 서로의 공통점을 인식하는 방법도 있다는 점을 보여준 셈이다. 팬데믹으로 인해 소통이 단절되고 서로에 대한 혐오가 커지는 현재 <북스마트>는 서로의 다른 면을 보고 우리는 결국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노래 한 곡으로 세상이 바뀔 거라 믿었던 <프롬>과 다른 점은 실제로 이들이 부딪히며 소통했다는 점이며, 의도치 않게 격리 해제를 기원하는 이야기가 된 건지도 모른다.



*모든 이미지 출너는 네이버영화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