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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Feb 15. 2021

장르가 아닌 서사의 문제

아 그리고 캐릭터도 문제

한국영화에서 오랫동안 예산 문제로 도전하지 못했던 장르가 sf다. 배경이 우주가 되는 순간 CG예산이 겉잡을 수 없이 늘어나는데 유독 <스타워즈>가 고전하는 국가의 투자사들이 sf를 제작할 예산을 편성해줄 리 만무하다. 투자자들을 어떻게 꼬신 건지 모르겠지만 조성희 감독이 드디어 한국 최초의 우주배경 영화를 내놓았다. 코로나로 인해 개봉 날짜를 미루다가 결국 넷플릭스행이 된 <승리호>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배경만 우주인 전형적인 한국영화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점이 한가지 있다면 투자를 받기 위해 서사를 전형적으로 꾸민 것일까, 아니면 투자자들이 전형적인 서사를 요구한 것일까. 미래의 우주세계를 배경으로 한 <승리호>는 배경만 미래적이고 서사는 과거를 답습하는 수준에 머물러 환상적인 CG를 아깝게 만들었다. 조성희 감독의 전작이자 스타성을 안겨 준 <늑대소년>도 사실상 한국판 <가위손>에 가까운 이야기였기는 하나 <탐정 홍길동>은 나름의 객기(?)가 엿보였었는데 <승리호>는 <늑대소년>보다도 과거로 회귀한 느낌이다. 작년도 한국영화 기대작이었던 <반도>와 <승리호>는 배경만 다를 뿐 대부분의 서사와 감성이 일치한다. 두 영화 모두 흥행작을 보유한 감독의 기대작이었고 흥행 배우가 합류했으며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두 영화 모두 가족을 잃어버린 이들의 새로운 가족에 관한 이야기다.


내친 김에 <반도>와 <승리호>가 공유하는 실패의 지점들을 함께 살펴보자. 두 영화는 놀라울 만큼 유사한 캐릭터 라인업을 자랑한다. <반도>의 정석(강동원 분)과 <승리호>의 태호(송중기 분)는 모두 자신의 실수로 가족을 잃은 트라우마가 있는 군인 출신이다. 이 과거 때문에 언제나 냉소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고 삶의 목적이 돈이 되어버렸다(근데 둘다 와꾸와는 달리 돈을 드럽게 못 번다는 것도 동일하다). <승리호>의 캡틴 장(김태리 분)은 <반도>에서 민정(이정현 분)과 유사한 역할을 수행한다. 승리호를 이끄는 캡틴이자 과거 정부를 위해 일하다가 반감을 느껴 도망친 캡틴 장은 631부대에서 비인간적인 군인들과 일하다가 도망쳐 자신만의 은신처를 차린 민정밑에서 자란 준이(이레 분)와 유진을 지운 캐릭터에 가깝다. 업동이(유해진 분)와 타이거 박(진선규 분)을 합친 캐릭터가 김 노인(권해효 분)쯤 될것이다. <반도>에서는 애초부터 있었던 준이와 유진이를 대체하는 것이 꽃님이다. 이래저래 메인 프로타고니스트들이 이 정도 싱크로율을 자랑하면 안타고니스트라도 좀 달라야 할 텐데 한국영화에서 빌런이란 거기서 거기인지라 크게 비교할 것도 없다. 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 <승리호>의 빌런은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사기를 치고 자신의 철학에 나름의 신념이 있지만 <반도>의 빌런들은 디스토피아에서 생존만이 목적이라는 점 정도다. <반도>와 <승리호> 중 누가 더 낫냐를 가르는 것이 별 의미는 없어 보이지만, <반도> 쪽이 좀더 신파적인 데다가 민정 캐릭터가 모성으로 움직이는 면이 지나치게 크다는 점에서 <승리호>의 손을 들어줄 수는 있을 것 같다.



다만 <승리호>가 더 취약한 점이 하나 있다면 메인 프로타고니스트들인 캡틴 장, 태호, 타이거 박 모두가 캐릭터성이 지나치게 비슷하다는 점이다. 셋 다 출신성분이 비슷한데다 냉소적이지만 내면은 따듯(제발 이거 좀 버릴 수 없니?)하다. <반도>에서 민정이나 김 노인이 지니고 있었던 모성과 부성을 표면적으로 보여줄 캐릭터가 없어 업동이가 생겨났는지 모른다. 아마도 이런 연유로 유해진이 목소리를 연기했을 텐데 문제는 유해진의 목소리가 sf장르와 도통 어울리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업동이는 표면적으로 <스타워즈> 시리즈의 R2D2, C-3PO를 연상시키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업동이가 굳이 로봇이어야 할 이유가 없어보인다. 업동이는 CG의 우수성을 자랑하는 것 이외에는 큰 역할을 하지 못하며 참으로 안타깝게도 유해진이 주로 해온 코믹 감초 역할로서도 별 메리트가 없다. 캡틴 장이 업어와서 업동이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캡틴 장과 업동이 사이의 친밀감도 그닥 보이지 않고(스카이워커 가문이 C-3PO를 얼마나 아꼈는지를 생각해보면 더더욱..) 업동이가 주로 하는 건 결국 승리호 팀원들에게서 부재한 꽃님이에 대한 양육자 역할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승리호 팀원들이 결국엔 부모 혹은 양육자의 역할을 자처한다는 점으로 미루어 업동이는 더더욱 무쓸모하다. 승리호 팀원들은 각자의 서사와 역할을 바꿔도 별 문제가 없으며 그렇다고 팀으로서 대단한 팀워크를 보여주지도 못한다. <반도> 팀은 그나마 나름의 역할이 있어 팀워크는 나쁘지 않았는데 승리호의 선원들은 애초에 어쩌다 팀원이 됐는지도 의문이다.


<반도>와 <승리호>를 어쩌다 보니 비교하게 됐지만 배경공간이 망한 한반도와 우주라는 것 말고는 사실 비교하는 의미가 있나 싶을 만큼 별 차이가 없다. 언제나 그렇듯 세상을 구원할 희망은 어린 여아에게 있지만 아직 생존 능력이 부족한 여아는 우리의 주인공들에게 보호를 받는다. 하지만 여성 캐릭터들을 나약하게만 그리는 건 대략 PC하지 못하므로 여전사 캐릭터도 하나씩 넣어주는데 이 역할을 맡은 것이 캡틴 장과 민정이다. 또한 여아들은 세상의 희망이지만 동시에 아이다움으로 어른들에게 기쁨조 역할 또한 수행해야 한다. 그래서 유진은 준이와 함께 좀비들을 뚫고 달릴 만큼 씩씩하지만 김 노인의 쿵짝에 맞춰주고, 꽃님이는 납치당하는 상황에서도 그림을 그린다. 한국 영화는 서사도 문제지만 대부분의 캐릭터가 정해진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눈물없이 들을 수 없는 사연을 가진 냉소적인 주인공과 보호해야 할 대상이 되는 천진난만하며 해맑은 아이 그리고 남성의 역할을 자처하는 여성, 여기 어디선가 부재하는 모성의 짐을 짊어지는 캐릭터 하나와 웃음을 담당하는 조연. 헐리우드로 떠나기 전까지 주로 마동석이 연기해온 무섭지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나약해지는 근육맨은 덤이다(<부산행>이 생각나지 않니?). <반도>와 <승리호> 모두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린 sf 혹은 액션물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장르물이라 캐릭터가 유사하다고 핑계댈 수도 있겠지만 타 장르도 실상 별반 다르지 않다. 그나마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나 새로운 시도를 하는 독립 혹은 예술영화 정도에서 새로운 캐릭터들이 발견된다. 코로나 19로 많은 영화의 개봉이 미뤄지긴 했지만 작년 한 해 수많은 독립영화가 약진한 데는 이제 새로운 서사와 캐릭터를 원하는 관객들의 목마름에 부응한 까닭도 크다.



헐리웃 못지않게 화려한 CG를 자랑하는 <승리호>가 어쩐지 캐릭터와 이질적인 느낌을 주는 건 서사의 기시감 때문이다. <반도>의 CG가 진부한 서사와 맞물려 폐허가 된 대한민국을 패망으로 조명했다면 <승리호>는 서양인 배우인 리처드 아미타지까지 캐스팅하고도 배우와 배경이 유리된 느낌을 준다. 외국인 배우들의 연기가 재연배우들의 발연기처럼 느껴지는 건 배우들 본인의 탓도 있겠지만 대사와 상황이 지나치게 진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일하게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드니 빌뇌브의 <컨택트>가 굳이 우주까지 나가지 않는데도 세련된 sf영화로 느껴지는 건 언어학자를 주인공으로 설정해 운명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루이스(에이미 아담스 분)는 전사도 아니고 sf영화에서 그 흔한 액션장면 하나 없는데다 결과적으로 엄마 역할을 하고 있지만 운명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누구보다 강인한 역할임을 알 수 있다. 캡틴 장은 거대한 승리호를 이끌며 남자들 사이에서도 거칠게 싸우지만 김태리가 아니었다면 이 진부한 역할을 그나마 맛이라도 살려냈을지 의문이다. 루이스와 이안(제레미 레너 분)은 성별 이외에도 역할이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어 캐릭터의 개성을 확실하게 살려냈고 로맨스 서사가 전체 서사의 부속으로서만 다루어졌을 뿐 주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승리호>에 로맨스 서사는 없지만 캡틴 장은 피에르로부터 연애 대상으로 치부되는 장면이 불필요하게 지속된다. 로맨스 서사가 지워졌다고 해서 전체 서사의 진부함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며, 캡틴 장이 가진 수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남성의 시선으로 바라본 여성 캐릭터라는 드럽게 진부한 특성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승리호>가 안타까운 점은 조금만 더 서사를 깊게 팠더라면 다룰 수 있었을 다양한 지점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는 것이다. <엘리시움>의 흔적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승리호>의 기본 배경은 계급화가 극대화된 사회다. 부 혹은 재능을 가진 자들은 화성으로 이주해 UTS에서 편안한 삶을 영위하지만 이주할 능력이 없는 이들은 지구에 남아 멸망을 기다린다. 부의 대물림에 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한가지 흥미로웠던 설정은 재능을 기반으로 UTS에 입양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태호는 그 자신이 가진 재능으로 설리번(리처드 아미타지 분)에게 입양된 군인이지만 정작 본인은 정서적인 교감으로 아이를 입양하고 그로 인해 UTS에서 방출된다. 오이디푸스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법한 이 서사는 좀더 자세하게 풀었더라면 부로 계급화된 현대 사회를 그리스 신화적으로 풀어낸 묘한 서사가 되었을지 모른다. 이와 함께 환경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도 최근의 한국 영화에서 보기 어려웠던 부분이다. <테넷>에서도 스치듯 지나가는 환경에 대한 쟁점은 <승리호>에서 세상을 구원할 소녀라는 지극히 미야자키 하야오스러운 포인트와 맞물려 진부한 서사로 자리매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애초에 (아마도 UTS에 들어올 자격이 안 되었을) 죽을 예정이었던 딸에 대한 사랑에서 지구를 구원할 물질이 탄생했다는 흥미로운 서사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자세히 다뤄지지 않아 아쉬웠던 부분이기도 하다.



<승리호>의 기술적 성취는 역대 CG를 사용한 한국영화 가운데 탑급이라고 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두운 극장에서 봤더라면 정말 우주에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초반 우주 쓰레기를 거두는 액션신은 장관이었다. 하지만 진부한 서사와 캐릭터는 <승리호>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영화가 고집해온 가족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는 영화 후반 리뉴얼하고 나타난 승리호처럼 새로운 단장이 필요하다. 한국 영화가 선체와 선원을 유지하길 고집부린다면 우주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대신 꽃님이를 만나기 전의 승리호처럼 우주 쓰레기를 주우며 빚만 쌓아야 할 것이다. 관객의 감성은 <승리호>가 보여주는 서사보다 훨씬 진일보했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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