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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Aug 30. 2021

물 속에 갇힌 기억들

님아 그 물 속으로 들어가지 마오

일반적으로 물의 이미지는 생명, 탄생과 연결된다. 태어나기 전의 양수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생명체의 존속을 위해 물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구온난화로 해수면 상승이 국제사회의 주요 환경 이슈로 부각되면서 대중예술계는 이제 물을 조금씩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테넷>에서도 해수면 상승을 스쳐 지나가듯이 다루었고 <레미니센스>에서 근미래는 해수면 상승으로 디스토피아가 되었다. 재벌들이 거주하는 건조지역을 벗어나면 대부분의 인구는 약간의 수면을 감수하고 살아가거나 주요 운송수단이 배인 지역에서 살아야 한다. 인구를 둘러싼 물은 그 자체로 생명을 위협하는데 이는 영화 중후반부 닉(휴 잭맨 분)이 부패경찰 부스와 무너진 건물에서 결투하는 장면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의 기억을 되살려 주는 닉의 기계 안에도 물이 있다는 사실이다. 기계 안의 물 속에 드러누워야 기억을 볼 수 있다는 설정은 메이(레베카 퍼거슨 분)가 닉을 유혹하기 위한 장치로서도 기능하지만 물이 서사 안에서 죽음 혹은 유사 죽음을 상징한다는 측면에서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죽음과도 같다는 비유로서도 기능한다.


닉의 레미니센스 사업에 찾아오는 대부분의 손님들은 행복한 기억을 다시 경험하길 원한다. 그리고 심리학적 지식이 없이도 많은 관객들은 이들이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않을 것이라 짐작한다. 고객들이 과거의 기억에 머물고 싶어하는 이유는 현재가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엘사는 같은 기억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경험하길 원하고, 와츠(탠디 뉴튼 분)가 메모리 카드를 건네줘도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며 거절한다. 같은 기억을 지나치게 여러번 재생하면 뇌가 망가져 기계가 없이도 기억을 스스로 반복하며 살게 된다는 설정은 결국 기억 속에서 산다는 것이 현재의 삶을 희생한다는 것, 나아가 죽음을 비유한다. 과거의 기억을 수도 없이 반복하던 엘사는 결국 이로 인해 최후를 맞이하는데 하필 엘사가 죽는 곳 또한 항구다. 와츠가 서사의 주요 인물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아 건강한 미래를 맞이하는 이유는 필요에 의해서였을 때를 제외하고는 레미니센스를 이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와츠는 닉도 손님들도 레미니센스를 이용하지 않길 바라며 닉의 사업을 운용하는 데 있어 가장 현실적이다. 과거를 묻고 현재만을 살아가려 했던 와츠는 닉의 조언으로 묻어둔 과거를 찾아가지만 레미니센스가 필요하지는 않다.



<레미니센스>에서 물이 사용되는 방식은 독특하지는 않지만 눈여겨볼 만하다. 영화가 시작되면 닉은 물 속에서 카드 한 장을 집어든다. 물은 닿는 대상을 즉시 변형시키지도 않으며 투명하게 대상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매개체지만 물이 많아지면 잃어버린 대상을 찾기란 쉽지 않다. 레미니센스를 가동시키는 매개체인 물은 결국 기억을 매개하는 물질이다. 물을 통해 기억에 닿으면 기억이 손상되지는 않지만 오래 머무르면 기억을 가진 인간의 뇌는 손상된다. 물을 통해 기억을 볼 수 있지만 기억이 많으면 많을수록 오래 뒤져야 한다. 사라진 메이의 귀걸이가 건물 계단도 아닌 물 속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메이의 운명을 암시하는데 닉은 심지어 귀걸이를 바로 발견하지도 못한다. 레미니센스 기계 안에 갇힌 부스는 흥미롭게도 물 안에서 불을 만난다. 대상의 속성을 변형시키는 불은 물을 통해 부스에게 고통을 가중시키지만 부스가 살아남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사실 부스가 가장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을 보면 부스는 살아있지만 죽은 것과도 같은 상태다. 반대되는 속성을 가진 두 물질은 부패 경찰인 부스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며 그에게 어울리는 최후를 선사한다.


닉의 레미니센스 기계가 기억을 불러오는 방식은 대상자의 눈으로 본 광경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대상자가 상상한 자신의 모습을 비추기 때문에 일견 비현실적이다. 메이의 기억은 메이가 노래할 때 본 관객 대신 노래하는 자신을 보여준다. 이 또한 물의 속성과 연계해 설명할 수 있는데 물을 바라보면 물 속을 보는 동시에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까지 볼 수 있다. 그렇다곤 해도 메이의 기억이 마치 자기 자신을 CCTV로 본 것처럼 보여주는 점은 영화의 맹점으로 작동하는데 경찰서의 레미니센스 기계는 대상자의 시선을 정확히 비추기 때문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레미니센스는 메이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어쩌면 영화 전체가 닉의 레미니센스라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기억은 안타깝게도 왜곡되게 마련인데 영화 전체가 닉의 레미니센스라면 닉이 본 레미니센스들도 메이에 초점 맞추어 왜곡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레미니센스가 기억의 왜곡을 반영한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지만 닉이 엘사의 레미니센스를 보는 자신의 레미니센스를 보면서 단서를 찾을 때 레미니센스의 레미니센스는 증거 채택이 되지 않는다는 점으로 미루어 레미니센스에 왜곡이 반영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레미니센스>에서 그리고자 한 표면적인 디스토피아는 해수면 상승이지만 그 이면에는 희망을 잃고 과거에 머물고자 하는 인류의 모습이 있다. 양극화가 심해질수록 상류층은 오프라인에, 하류층은 온라인에 머물게 될 것이라는 예상과는 조금 다르게 실반의 미망인은 과거에 머무르길 택하기도 한다. 그리고 닉이 실반 부인에게 물이 가득한 레미니센스 기계 대신 거울을 비춰 기억 대신 자기 자신을 보여줄 때에야 그는 현실로 돌아온다. 닉이 속이 비치는 물 대신 거울을 사용했다는 점은 그만큼 물이 파괴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실반 부인이 거울대신 물을 봤다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는 대신 물 속에 든 허구의 기억을 보려 했을지도 모르며 이는 실반 부인의 뇌 파괴를 가속화했을 것이다. <레미니센스>는 현실을 살아가는 대신 과거에 머물러 유사 죽음 상태로 머물고자 하는 인류의 모습을 통탄하듯 보여주는데 해수면이 점점 상승해 결국 닉의 사업장도 잠기게 될 것이라는 데서 암울한 관점을 드러낸다. 감독인 리사 조이는 드라마 <웨스트 월드>의 제작자이기도 한데 현실 대신 인공지능 로봇이 돌아다니는 웨스트월드에 머물러 평생을 낭비하기도 하는 인간들을 그렸던 시선이 여실히 비치는 대목이다.


<레미니센스>의 제작자는 익히 알려진 대로 크리스토퍼 놀란의 동생인 조너선 놀란이다. 레미니센스 기계 안에 눈을 감고 누운 고객들의 모습은 <인셉션>에서 꿈에 취한 이들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인셉션>에서도 해변가가 주요 배경 중 하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놀란 형제가 다루는 물에 대한 이미지는 기억이나 추억 혹은 공포에까지 다다르는지 모른다. 자신의 사업장이 잠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도 최후의 선택을 내린 닉의 마지막 모습은 여러가지로 씁쓸하지만 그런 닉을 바라보는 와츠에게서 인류의 희망이 보이기도 한다. <레미니센스>의 결말은 <인셉션>의 결말과 얼마간 겹쳐 보이지만 메이와 닉은 과거를 선택하는 대신 다른 이들이 현재를 살아갈 수 있도록 장려했다는 점에서 결을 달리하기도 한다. 메이가 구원한 이가 숨은 장소는 서사 내내 죽음을 의미해온 물 한가운데 있는 곳이라는 것, 그리고 메이가 이미 구원받은 경험이 있는 곳이라는 것은 메이와 닉이 다른 이들만큼은 인류를 구원하길 바랐다는 걸 암시하는 게 아닐까.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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