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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Sep 06. 2021

직선과 곡선의 만남

뭔가 그들이 헷갈린 것 같지만..

<샹치: 텐 링즈의 전설>(이하 <샹치>)은 제대로 된 솔로 코믹스도 없던 캐릭터 샹치를 주인공으로 만든 마블 최초 아시아인 히어로 솔로 무비다. 원작이 없는 탓에 없는 샹치의 서사를 만들어 내느라 서사가 단순해진 느낌이 들지만 아시아인에 대한 그간의 인식을 반성하는 듯한 부분들이 종종 눈에 띈다. 중국계인 샹치(시무 리우 분)가 고등학교 시절 전학오자마자 "강남 스타일"이라고 불리자 한국인이 아니라고 반박했다는 대사나, 웬우(양조위 분)가 텐 링즈가 미국의 적인 양 누군가가 흉내낼 때 지었다는 이름이 고작 귤이라는 뜻의 만다린이라고 밝히는 등의 내용이 그렇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동양 무협지가 기묘하게 섞인 듯한 <샹치>는 겉 포장은 동양, 특히 붉은 색을 강조하고 중국어 대사를 사용하며 중국에 초점을 맞춘 것처럼 보이지만 서양적인 세계관이 묘하게 녹아든 서사를 내보인다. 희한한 건 천 년이 넘는 세월 인생의 대부분을 동양에서 보낸 것만 같은 웬우는 직선으로 대표되는 서양적인 액션을 구사하는 데 반해 반평생 이상을 미국(심지어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낸 샹치는 곡선, 특히 원으로 대표되는 동양적인 액션을 구사한다는 점이다. 


정확한 직선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자연에서 구불구불 이어지는 곡선은 자연스러움을 상징하며 동양의 미술은 이 곡선을 가능한 한 살리는 데 중점을 둔다. 샹치의 어머니 잉 리(팔라 첸 분)가 구사하는 액션은 인공물인 텐 링즈를 다루는 웬우의 액션과는 달리 자연의 힘을 이용한다. 불어오는 바람과 움직이는 숲은 웬우를 감싸고 웬우는 자연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나가 떨어진다. 잉 리의 액션은 곡선, 특히 원 모양의 움직임이 주를 이룬다. 영화 중반부에 드러나는 잉 리의 마을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처럼 보이는 데 반해 웬우의 집은 자연의 기운을 막는 것처럼 보인다. 직선으로 이어지는 집의 기둥들이나 집 안에 들여놓은 인공적인 자연은 웬우가 자연을 거스르며 수명을 이어온 것을 상징한다. 음과 양의 조화를 강조하는 동양의 사상과는 다르게 웬우는 여성 제자를 두지 않으며 딸인 샤링에게도 무술을 가르치지 않았는데 결국 동양적인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는 <샹치>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암시하기도 한다(암시라기엔 뻔한 서사지만).



영화 초반 샌프란시스코의 버스에서 샹치가 구사하는 액션은 아버지 웬우에게 훈련받은 대로 직선의 액션이다. 샹치와 텐 링즈의 움직임은 상대방의 힘을 이용하기보다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방향에 가깝다. 이들의 액션은 현란하고 신기하지만 상대방에게 해를 입히는 액션이다. 샹치의 기본 자세는 주먹을 쥐고 상대방에게 그 주먹을 들이민다. 활동 무대가 버스이기에 활용할 자연이 없음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이 신은 웬우의 액션이 자연과는 등을 돌렸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샹치가 텐 링즈를 이기는 건 웬우의 아들로서 타고난 유전자도 있겠지만 단순히 수련 기간이 더 길기 때문이기도 하다. 1대 다로 붙으면서도 운전을 맡은 케이티(아콰피나 분)를 적절히 이용하여 텐 링즈를 막아내는 샹치는 액션 기지가 뛰어나지만 펜던트를 빼앗긴다. 샹치와 텐 링즈의 가장 큰 차이점은 버스의 승객을 보호하려고 하는가의 차이다. 샹치는 홀로 텐 링즈를 상대하면서 케이티와 승객들을 구해야 하지만 텐 링즈의 목적은 샹치의 펜던트 하나뿐이다. 이용할 자연이 없는 버스 안에서 샹치는 승객들을 구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텐 링즈의 목적을 저지할 수는 없다.


이후 마카오로 건너가 샤링이 운영하는 파이트 클럽에 당도한 샹치는 다시 한번 텐 링즈와 맞붙는다. 건물 상공에서 아슬아슬한 액션을 선보이는 샹치는 이번에는 보호할 사람이 케이티 하나뿐이며 텐 링즈는 제거 대상에 가깝다. 직선으로 이루어진 현대식 건물은 직선으로 움직이는 이들의 액션을 닮았다. 웬우가 현대 시점에서 극 최초로 등장하는 곳이 이 홍콩의 건물이라는 점은 웬우의 파괴적인 액션을 암시한다. 웬우는 오랜만에 아들과 재회하면서 텐 링즈를 직선으로 사용해 샹치를 압박한다. 흥미로운 것은 파이트 클럽에 카메오로 등장하는 웡(베네딕트 웡 분)이 그리는 차원 이동 결계도 원 모양이라는 점이다. <닥터 스트레인지>에서 에인션트 원이 머물며 마법을 익히는 곳이 동양인 티벳인 만큼 제작진이 직선은 서양을, 곡선은 동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정리한 후 제작에 임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서양 캐릭터들은 대부분 전신에 달라붙는 부자연스러운 수트를 착용하는 데 반해 동양 마법을 수련한 닥터 스트레인지는 동양 복식과 선이 유사한 마법복을 착용한다. 샹치의 경우 하의는 다소 서양 복식으로 보이는 바지를 입지만 상의는 중국에서 선호하는 색이라는 붉은 색으로 디자인된, 어느 정도 타이트하긴 하지만 쫄쫄이 수트는 아닌 상의를 착용해 서양에서 자란 동양계 히어로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웬우를 막기 위해 타로를 방문한 샹치는 이모인 난(양자경 분)으로부터 타로의 무술을 배우며 주먹이 아닌 손바닥으로 상대방을 대하는 법을 배운다. 난의 액션은 리의 액션과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힘을 이용해 곡선으로 부드럽게 상대방을 제압한다. 상대방을 크게 해치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보호하는 난의 액션은 역시 자연의 힘을 이용하고 있다. 겉모양은 따라할 수 있지만 자연의 힘을 이용하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한 샹치는 웬우를 상대하며 패배하여 물 바닥으로 추락한다. 샹치의 추락 지점이 땅이 아닌 물이라는 점은 매우 중요한데 웬우의 집과 타로에서의 물이 사용되는 방식이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웬우의 집에서 등장하는 물은 자연 그대로가 아닌 어디선가 인공적으로 옮겨져 와 활용되는 물이다. 그런 웬우의 집에 리가 설치한 용의 목상을 통해 흘러나오는 물은 파괴적인 동시에 인공적이다. 타로에는 인공적으로 만든 연못조차 보이지 않으며 타로의 주민들은 물을 있는 그대로의 위치에서 활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자연스러운 물 안으로 샹치가 깊이 침투했을 때 샹치는 동양의 용을 만나 타로의 힘의 근원을 확인한다. 이제야 샹치는 어머니의 뿌리를 찾아 아버지를 대적할 준비가 된 것이다.


희한한 것은 타로를 지켜주는 수호신인 용은 동양의 전설 속에 주로 등장하는 용의 모습을 하고 있는 데 반해 드웰러라 불리는 악한 용은 서양 신화에 주로 등장하는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에 등장했던 용과 흡사한 형태를 띠고 있는 수호신 용은 구렁이의 진화 형태로 등장하는 동양의 용이다. 반면 이름부터 드웰러로 등장하는 영혼을 먹는 용은 해리 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용과 생김새가 유사하다. 수호신 용이 동양의 용인 점은 당연하지만 드웰러가 서양 용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마블이라는 서양의 문화를 대표하는 영화 시리즈에서조차 악인을 서방세계로 규정하려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웬우가 주된 악역을 표방하지만 그럼에도 <샹치>의 최종 보스는 드웰러다. 그리고 이 드웰러를 막고 있던 문 역시 원 모양을 하고 있으며 샹치가 웬우에게서 물려받은 텐 링즈는 직선으로 움직이다가 샹치에 이르러 원 모양으로 움직임의 형태를 바꾼다. 수호신 용이 물 속에 머무는 데 반해 드웰러가 지상에 갇혀있었다는 점은 결국 물은 자연을 표방하는 동양 세계를, 땅은 인공을 상징하는 서방 세계를 표방한다는 뜻이다. 마지막 전투 신이 물 위에서 진행되는 데는 샹치와 샤링이라는 동양인 영웅이 자연 파괴를 일삼던 서방 세계에 타격을 입힌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샤링의 헤어스타일이나 타로의 복식은 중국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동양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동양의 여러 국가를 그럴 듯하게 섞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 주연 배우들조차 대부분이 동양에서 자란 이들이 아닌 서양에서 성장기를 보냈기에 동양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샹치>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아이언맨이나 캡틴 아메리카 등 구 서양 히어로들이 전 세계에 내가 히어로요 라고 외치는 동안 샹치는 타로에서 세상을 구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못한다. <샹치>는 마블 세계관에 동양인 히어로를 입성시킴으로써 미국 사회에 아시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웠지만 아직까지 동양에 대한 이해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편 <미스 마블즈>에 박서준의 캐스팅은 한국에서 자란 한국인 배우가 마블 세계 안에서 얼마나 동양계의 입지를 더 넓힐 수 있을지에 대한 리트머스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동양계 히어로조차 첫 솔로 무비는 남성 히어로라는 점에서 아쉽기도 하지만 텐 링즈를 차지한 샤링이 여성 제자와 남성 제자를 동등하게 훈련하는 모습은 샤링과 케이티의 활약을 기대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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