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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Sep 13. 2021

책임은 누가 지나요

여성이 책임을 떠안는 과정

중국 개봉 당시 여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영화 <내가 날 부를 때>는 쾌감을 주는 영화는 결코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가족 내에서 여성이 어떻게 부양의 의무를 떠안는지를 기록해 보는 이를 답답하게 만드는 영화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관객의 지지를 받았던 건 부양의 책임이 여성에게 어떤 심적 부담과 현실적인 제약을 함께 건네주는지를 생생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안란(장쯔펑 분)이 동생 안쯔헝(김요원 분)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이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영화는 안란을 중심으로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여성들의 인생을 차분하게 그리는 와중에 중국의 한자녀 정책에 대해서도 슬그머니 문제를 제기한다. 1980년 시행된 한자녀 정책은 중국 사회 내 수많은 부작용을 초래했고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문제를 불러일으키면서 2015년 폐지되기에 이른다. 성인이 된 안란에게 생긴 다섯 살짜리 동생은 한자녀 정책 폐지 시기쯤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안란은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시자 평생 거의 본 적도 없는 남동생을 떠맡는 신세가 된다. 

자기들이 낳아 놓고
왜 나보고 키우래요?


가족이 안란에게 기대하는 역할을 꽤나 모순적이다. 여자로 태어난 안란은 낙태당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로(실제로 한자녀 정책의 부작용 중 하나는 여아낙태로 인한 극심한 성비 불균형이다) 어린 시절 장애인으로 살 것을 종용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란에게는 무수한 책임이 주어진다. 의사가 되고 싶었던 안란은 의대에 지원하지만 여자아이는 빨리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부모님은 몰래 간호대로 바꿔 지원한다. 가족이 제공해야 하는 정서적 안정성과 양육은 받지 못한 채 가족 부양의 의무만 부여받는 것이 딸이다. 1차적으로 가정 부양의 책임을 짊어지는 안란은 일찍부터 독립할 결심을 한다. 간호사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돈을 모아 대학원에 진학해 그토록 원했던 의사가 되려 한 안란은 부모님이 돌아가시며 2차적으로 동생 부양의 의무를 떠안는다. 안란의 친척들은 동생을 입양보내려는 안란에게 비난을 퍼붓지만 본인들이 그 책임을 떠안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나마도 일부나마 양육의 책임을 나눠안으려는 것은 고모를 비롯한 여성이고 외삼촌과 같은 남성 친척들은 말만 얹을 뿐 책임에서 자유롭다.



가족 부양에 있어 여성과 남성의 책임이 동등하지 않다는 것은 여러 장면에서 드러난다. 가장 단적인 예는 고모와 외삼촌의 차이인데 하룻밤이지만 안쯔헝을 맡아주는 고모는 댓가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안란이 바로 입양보내겠다고 하자 고모는 자신의 집에 안쯔헝의 침상을 마련한다. 반면 이혼한 외삼촌은 안란에게 동생을 키워줄테니 양육비 명목으로 집을 판 돈의 절반을 달라고 요구한다. 그마저도 안쯔헝을 데려가 도박장에서 어린이 도박을 시키는 외삼촌은 양육의 책임에 대해 상당히 무지하다. 이는 딸이 있지만 이혼한 것으로 묘사되는 외삼촌이 평생을 살아오면서 양육의 의무를 제대로 진 적이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도박장에서 밤을 새고 딸의 결혼식에 줄 축의금을 마련해온 외삼촌에게 양육이란 정서적인 안정감의 제공이 아닌 경제적 뒷받침만을 의미한다. 심지어 이혼 후 딸과 데면데면해지자 조카를 데려와 키우면서 자신의 노년에 조카가 양육해줄 것을 바라기도 한다. 남성들에게 가정 부양은 사랑을 바탕으로 한 무한한 희생이 아닌 남아선호사상을 바탕으로 노후 부양 혹은 성을 물려주어 가문을 존속시키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여성의 가정 부양은 이와 정 반대의 지점에 위치한다. 젊은 시절의 고모는 러시아어를 공부해 러시아에서 사업을 하는 것이 꿈이었지만 러시아어과에 합격하자 남동생의 전문대 진학을 위해 대학 입학을 포기한다.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 고모는 아마도 혼자서 러시아어를 공부한 것으로 보이는데 사업을 위해 러시아에 도착하자 이번에는 조카 양육을 빌미로 소환당한다. 이 과정에서 고모가 듣는 말은 조카가 자신을 부양해줄 것이기 때문에 양육을 도우라는 말이 아닌 누나이기 때문에 양육의 의무를 나눠야 한다는 말이다. 즉 고모는 양육 노동의 댓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고도 가정 부양의 의무를 맡는다. 하지만 조카 양육을 제공하고도 고모에게 돌아온 것은 고모의 집에서 자랐지만 좋지 않았다는 안란의 답변이다. 안란은 사촌은 자신을 때렸고 고모부는 자신이 샤워할 때 훔쳐보았다는 사실을 털어놓는다. 안란이 고모의 양육에 대해 고마워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장면은 여성의 가정 부양이 댓가가 마이너스인 무급 노동으로 기능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제서야 평생에 걸친 가문에 대한 희생이 무용지물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고모는 안란에게 원하는 삶을 살도록 격려한다. 여성이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어떻게 이용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는 또 있다. 자신이 근무하던 병원에서 임신자간증으로 치료받지 못하고 다른 병원에 실려가는 임산부는 가정에서 여성이 어떤 위치를 갖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의료적으로도 산모와 태아가 모두 위험에 처했을 경우 1순위는 산모임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남편은 아내를 희생해서 아들을 살리겠다고 말한다. 이 과정을 지켜본 천 선생은 안란과 반목하다가도 일순간 안란과 같은 감정을 공유한다. 가부장제에 의해 희생당한 안란은 이로 인해 천 선생과 반목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여성이 똑같이 가부장제에 의해 희생당하는 장면 앞에서는 동료가 될 수밖에 없다. 이는 한편으로 안란의 미래를 암시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실려가는 임산부는 자신이 죽더라도 아이를 살리겠다고 힘겹게 대답하지만 이 대답이 정녕 자신의 의지인지 사회적인 압력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내 인생에는 너만 있는 게 아냐
나에게도 우주가 있어

안란의 마지막 결정은 결국 책임감으로 귀결된다. 자신에 앞서 수많은 여성이 가정이라는 공동체에 자신의 삶을 헌납하는 것을 목격하고 남자친구의 집에 초대받은 후 자신도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을 직감한 안란은 자신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 안쯔헝에 대한 책임감은 안란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동생을 지하철에 놓고도 가보고, 외삼촌에게도 맡겨보고, 입양 결정도 내렸던 안란의 마지막 결심은 그래서 가슴아프지만 이해할 수 있는 결정이다. 영화는 내내 가정에 대한 여성의 희생과 그 결과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안란의 발자취를 따라가지만 신세대인 안란조차 온전히 그 울타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묘사하기도 한다. 영화가 끝난 후 자막으로 가사가 제공되는 노래는 안쯔헝의 입장에서 안란을 부르지만 안란에게 몰입한 관객에게는 철없는 메아리일 뿐이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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