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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Oct 11. 2021

국가성에 대한 무지

갓블레스 아메리카, 국가라는 사건

 영화 <스틸워터>는 제목을 포함해 지명이 여러 번 언급되고 지역만큼이나 국가성, 특히 미국에 대한 특성이 간접적으로 묘사되는 영화다. 아만다 녹스 사건을 모티프로 차용한 이 영화는 공개 후 실화와 다르게 각색된 부분으로 인해 비판받았다. 토마스 매카시 감독은 이에 대해 나름의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영화로 인해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는 납득되지 않았는데 영화에 관한 비판조차 미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국가성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스틸워터 지역에 거주하며 프랑스 마르세유의 감옥에 갇힌 딸 앨리슨(아비게일 브레슬린 분)을 옥바라지하는 아버지 빌(맷 데이먼 분)의 시선을 따라간다. 시골지역에서 나고 자라며 건축 현장에서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빌은 스스로도 자신이 무식해서 뭘 모른다는 말을 되풀이하는데 이는 무지에 대한 인식보다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변명으로 기능한다. 뭘 모른다면서도 철저하게 자신의 딸을 석방시키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빌은 미국이라는 국가 자체를 상징한다. 그에게 사건에 대한 진실을 중요하지 않고 그저 앨리슨이 감옥 밖으로 나오는 것만이 중요하며 "내 딸은 결백하다"는 말을 끊임없이 중얼거린다. 자국민의 이득을 위해서는 어떤 일도 서슴지 않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인물인 빌은 영화 말미에서는 국가성에 대한 회의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런 빌과 대척점에 놓인 공간은 프랑스 마르세유다. 실화의 배경은 이탈리아인데 각색 과정에서 프랑스로 변경되었다. 마르세유를 대표하는 인물은 빌이 사랑에 빠지는 버지니(카미유 코탱 분)다. 콧대높기로 유명해 영어가 통하지 않는 지역도 많다는 프랑스의 악명(?)을 고려할 때 마르세유는 프랑스 국가의 특성을 드러내는 공간이라기 보다는 빌로 대표되는 미국의 대척점에 해당하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평생을 교육 수준이 낮은 동네에서 성장하며 상대가 누구든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데에만 익숙한 빌은 인종차별주의자와 대화하기를 거부하는 버지니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미 딸의 옥바라지를 5년째 하는데도 빌이 프랑스어를 거의 할줄 모른다는 사실은 빌의 미국성을 확연히 드러내준다. 그런 빌의 대척점에 놓인 버지니는 영어로 빌과 대화하며 이 곳은 마르세유이니 이 곳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런 귀한 조언을 듣지 않던 빌은 홀로 아킴을 찾아다니다가 험한 꼴을 당하고 그토록 찾던 아킴마저 눈 앞에서 놓치며 딸과도 연락을 끊게 된다. 강대국인 미국 출신이니 어디서든 미국의 방식이 통할 거라 믿었던 빌은 마르세유에서 처음으로 언어도 방식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마르세유에 동화되기 시작한다. 프랑스어를 익히고 현지 건설현장에서 일하며 심지어 축구 경기마저 현지 팀을 응원하는 빌은 잠시 출신지인 미국 스틸워터를 잊은 것처럼 보인다.



한편 스틸워터에서 멀어지고 싶어 프랑스 유학을 선택했다는 앨리슨은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현지에 녹아든 것처럼 묘사된다. 특히 빌이 고향을 잊지 않길 바라며 앨리슨에게 선물한 스틸워터 목걸이의 행방을 고려했을 때 앨리슨은 그 누구보다도 미국, 그 중에서도 출신지인 스틸워터를 잊고 싶어한 것만 같다. 스틸워터에서 비행기를 타고 앨리슨을 만나러 갈 때조차 선물로 오클라호마 맨투맨을 구입하는 빌과 가장 좋아하는 현지 피자 식당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앨리슨은 부녀 관계임에도 정 반대인 인물들로 보인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마르세유에 스며들어 앨리슨에게서 현지인이 다 됐다는 말을 듣는 빌과 여전히 미국적인 가치를 잊지 않는 앨리슨은 영화의 후반부에 들어서서 교차되는 국가성을 보여준다. 감옥에 들어가기 이전의 프랑스를 사랑했던 앨리슨은 하루의 외출에서 아무데나 주차하고 이 곳에 주차해도 되냐는 빌의 물음에 그들이 날 체포라도 하겠냐고 대답한다. 반면 당당하게 자신의 무지를 과시하며 영어를 할 줄 아는 현지인들에게 통역과 번역을 부탁하던 빌은 버지니의 딸인 마야에게서 프랑스어를 배운다.


이렇듯 영화는 미국을 대표하는 빌과 선량한 버지니로 대표되는 마르세유를 계속해서 비교하지만 버지니가 마르세유를 온전히 대표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간간이 보여준다. 영화 초반 빌과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던 이들은 교육받은 백인 미국 여성이 현지에서 시샘을 받는다는 현실을 알려주고 빌은 아킴을 찾으러 위험한 동네에 갔다가 구타당하기도 한다. 버지니와 대화한 인종차별주의자는 심지어 빌이 가져다준 사진들을 보며 아랍인 아무나 감옥에 가도 좋으니 한 명을 골라주면 그가 아킴이라고 증언하겠다고 발언한다. 아랍인에 대한 노골적인 증오는 놀랍게도 경찰들이 모인 자리의 대화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이쯤 되면 사건의 진실에 대해 진정으로 궁금해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교육받은 백인 미국 여성이든 이민자 출신 아랍인이든 증오할 대상이 필요한 이들에게 앨리슨은 덫에 걸린 동물에 불과하다. 사건의 진실이 중요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피해자조차 아랍인이기 때문이다. 한편 사건에 대해 가장 궁금해하는, 인종차별주의자를 배격하고 불법적인 행동에 진저리를 치는 버지니는 언론이 앨리슨에게 지나치게 가혹했다고 굳게 믿는다. 그렇게 버지니는 빌과 함께할 때는 마르세유에 대한 대표성을 획득하지만 그 이면이 드러나는 순간들에는 대표성을 잃어버린다. 어차피 마르세유는 빌과 앨리슨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국가성에 반하는 공간으로 상정되었기 때문에 실제 마르세유의 지역성이나 국민성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부성이라는 명목 하에 미국성을 유지하며 힘들게 살아가던 빌은 자신의 국가성을 잊으면서 서사에서 거의 처음으로 행복한 순간을 보여준다. 마야를 돌보며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축구 경기를 보고, 버지니와 데이트하며 이해하지도 못하는 연극을 보는 빌은 그 순간조차 자신이 무식하다는 말을 중얼거린다. 버지니의 연극을 본 빌에게 버지니는 어땠냐고 끊임없이 묻는데 대답을 회피하던 빌은 끝내 무식한 자신이 뭘 알겠냐고 반응한다. 이 무식하다는 발언은 결국 빌이 자신의 국가성을 놓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눈치채지 못한 버지니는 빌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마야를 축구 경기장에 데려가 현지인 코스프레의 절정에 다다른 빌은 아킴을 발견한 순간 잊었던 국가성을 기억해낸다. 앨리슨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빌에게 마야보다 중요한 것은 아킴을 잡는 것이다. 추후 이를 알게 된 버지니는 그제서야 빌이 결코 마르세유에 동화될 수 없으며 뼛속까지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빌과 버지니를 이어준 동시에 갈라놓은 것은 결국 지역성인 셈이다.


앨리슨이 스틸워터로 귀환하는 장면은 그래서 역설적이다. 미국성을 끝내 버리지 못한 부녀는 국가가 아닌 개인에 의해 구원받았지만 국가는 마치 자신의 공적인 양 생색을 낸다. 성조기 모양의 케이크, 영화 초반에는 듣도보도 못한 앨리슨을 데려올 거라던 약속을 이야기하는 이들. 스틸워터로 돌아온 앨리슨과 빌은 이제 국가에 대한 의구심을 품기 시작한다. 과정이야 어쨌든 앨리슨이 무사히 돌아왔으니 이는 자국민을 돌려받은 국가의 노력으로 곱게 포장되고, 그 과정에서 삶을 빼앗긴 앨리슨과 빌은 지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세유에서 거부당한 빌은 미국에 기댈 수밖에 없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이 곳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앨리슨과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보인다는 빌은 국가성의 실체를 알고도 모른 척하는 딸과 실체를 알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평생 무지라는 핑계로 자신의 국가에 대해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빌은 그제서야 자신이 딸에게 물려준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만 그 자신의 말대로 앨리슨은 자신의 딸이다. 각색에 대한 논란 역시 일단 돌아오기만 하면 됐던 앨리슨과 마찬가지로 영화로 제작되기만 하면 됐던, 피해자의 삶에 대해서는 무지로 일관한 감독을 향한다. <스틸워터>는 그렇게 미국의 국가성을 이중으로 폭로하지만 그 자신조차 미국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문제작이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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