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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Nov 01. 2021

진실의 상대성에 대한 반격

우리는 그것을 강간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같은 사건에 대한 상대성 혹은 주관성을 다루는 이야기들은 절대적인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거나 일개 인간은 알 수 없다는 전제를 암묵적으로 기반에 두고 서사를 전개한다.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영화 <라쇼몽>은 같은 사건에 얽힌 서로 다른 사람들의 시각을 보여주고 마지막에는 진실을 알려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마저도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암시를 남기고 마무리한다. 해석의 상대성을 다루는 영화들은 사건의 객관성은 뒤로 하고 개인의 해석이 전부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영상 매체가 발달하고 CCTV가 사방에 판을 치는 현대 시대에 사건 그 자체를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이하 <라스트 듀얼>)는 사건의 진위 여부를 논하기보다는 사건의 해석에 중점을 둔다. 자크 르 그리(아담 드라이버 분)가 장 드 카루주(맷 데이먼 분)의 아내 마르그리트(조디 코머 분)를 범한 것은 서사에서 기정 사실이며 행위의 실재 여부는 논의 대상이 아니다. 자크와 마르그리트의 관계가 합의에 의한 것이었는가 아닌가는 해석의 영역으로 남아 등장인물들을 괴롭히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은 그것이 해석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혹여 각각의 시선이 불러일으킬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영화는 친절하게 3장인 마르그리트 입장에서의 진실 편에서 진실이라는 자막을 오래도록 남겨 이것이 객관적인 사실임을 명확하게 알려준다.


자크와 장의 시선에서 본 사건의 전말은 서로의 관계에서부터 시작된다. 장이 마르그리트와 결혼하기 전부터 장과 자크는 전우 사이였지만 서로에게 내보이지 않는 속내가 있다. 자크의 입장에서 장은 무모하고 무식한데다 재산도 없이 남은 거라곤 명예뿐인 가문이다. 장의 입장에서 자크는 어쩌다 성주의 눈에 들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잘난척하며 여성편력이 심한 기사다. 이들은 마르그리트가 사이에 끼어들기 이전에도 서로를 무시하거나 질투했고 이런 시각들이 마르그리트 강간 사건에 대한 시각을 달리하게 해준다. 즉 장과 자크가 강간 사건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이유는 실상은 독립사건에 해당하는 이들의 전사가 해석에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실상 마르그리트를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들(심지어 마르그리트의 시어머니인 자크의 어머니와 마르그리트의 친구를 포함한 서사에 등장하는 다른 여성 캐릭터들마저도)은 사건과 무관한 독립사건들을 사건을 해석하는 데 끼워넣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자크는 장과 춤을 추던 마르그리트가 자신을 몇 번 눈짓했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마음이 있었을 거라 멋대로 생각하고 장은 마르그리트의 지참금이었어야 할 영지를 돌려받으려 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자상한 남편이라 여긴다. 심지어 마르그리트의 주변 여성들은 마르그리트가 결혼 후 자크를 잘생겼다고 평가했다는 이유로 마르그리트가 자크를 유혹했을 것이라 해석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제목 그대로 <라스트 듀얼>, 자크와 장이 치르는 최후의 결투야말로 실제 사건과는 무관한 독립 사건이다. 이 대결에서 누가 이기는가는 강간 사건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정작 사건의 당사자인 마르그리트는 둘의 결투에 전혀 영향을 줄 수 없으며 오히려 결투의 결과로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진정 이들의 대결이 진실의 여부를 가릴 수 있다면 군중은 대결이 끝나기 전까지 마르그리트를 판단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마르그리트의 친구조차도 마르그리트의 읍소 후 마르그리트를 의심하며 멀리한다. 장과 자크가 치르는 대결은 서사의 절정에 위치해 사건을 둘러싼 이들의 운명을 가르지만 발단에 위치한 사건과는 별 연관이 없는 독립적인 사건으로서 대결의 허무함을 극대화한다. 대결에서 각 기사를 응원하는 이들은 사건의 진실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어느 기사가 이기냐에 따라 자신들의 손익이 갈리기에 군중은 자신의 이득이 걸린 쪽을 응원할 뿐이다. 한편 진실을 알고 있는 마르그리트는 자신의 남편을 응원하지만 진실이 밝혀지길 기대하기보다는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고 싶을 뿐이다. 심지어 결투의 결과에 따라 자신이 화형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마르그리트는 자크를 고소하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이야기한다(자크가 무고하기 때문이 아니라 장이 졌을 때 자신이 감수해야 할 손해가 지나치게 크기 때문이다). 


<라스트 듀얼>은 이렇듯 명확하게 진실을 관객에게 전달하면서도 사건의 당사자들의 시선을 굳이 나누어 서사를 진행한다. 이는 같은 사건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기존의 관행에 도전장을 던지는 동시에 긴 러닝타임 동안 반복되는 장면을 전시하면서도 관객이 지치지 않을 수 있는 효과적인 장치가 된다. 사건의 진실을 보여주는 마르그리트의 시선을 가장 마지막에 위치시킨 의도는 명확하다. 장의 시선에서는 헌신적이지만 자신의 지참금으로 왔어야 할 토지에 집착하며 시어머니와 불편한 관계인 마르그리트는 자크의 시선에서는 학식이 높고 아름답지만 자신을 유혹한 요부로 묘사되어 관객을 혼란시킨다. 하지만 진실임이 명확하게 제시되는 마르그리트의 시선에서 그 자신은 몰락한 귀족으로서 아내의 지참금이 되었어야 할 토지를 탐내는 무지한 남편에게조차 헌신적이며, 여성편력이 심하고 남편을 무시하는 자크를 믿지 못하면서도 남편과 좋은 사이를 유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여성이다. 그리고 당사자들의 시선으로 본 사건이 끝나고 결투가 진행되는 현재로 돌아와 그 누구의 시선도 아닌 카메라가 그리는 마르그리트는 그 자신이 그린 모습과 가장 유사하다. <라스트 듀얼>은 어느 사건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지라도 객관적인 진실은 언제나 존재할 수 있다고 암묵적으로 주장하는 셈이다.



서사의 단초를 마련하는 강간 사건은 그래서 강간이라 명명될 수 있다. 상대방의 동의 없이 진행된 성관계가 강간이라면 정말 놀랍게도 그 누구의 시선에서조차 마르그리트는 자크와의 성관계에 합의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심지어 마르그리트가 자크에게 일말의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여졌던 자크의 시선에서조차 마르그리트는 성관계에 합의를 한 적이 없다. 자크 본인조차 강간은 없었다고 주장하면서도 마르그리트가 성관계에 저항했다고 인정한다. 자크는 성주와 함께 유흥을 즐기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이 때 묘사되는 유곽의 여성들은 저항하지 않고 자크와 성주를 유혹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즉 자크가 언급하는 '관습적인 저항'이라는 표현은 마르그리트가 관계에 합의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전까지 자크가 성매매를 하지 않는 여성들과 맺었던 관계의 대부분이 강간이었을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 누구의 시선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나는 마르그리트의 모습은 절대적인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함을 의미하며 주관적인 해석이 그것을 해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진실의 주관적인 해석을 다루었던 <라쇼몽>에서조차 여성의 정절을 소재로 다루었던 것과 비교한다면 <라스트 듀얼>은 14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대단히 현대적인 시각이 가미된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라스트 듀얼>은 14세기 프랑스에서 벌어졌던 최후의 대결 재판을 긴 러닝타임을 할애하여 왜 현대에 만들어져야 했는지를 당사자들의 시각을 빌려 말해준다. 특히나 남편에 대한 아내의 헌신과 정절이 중요하게 여겨졌던 시기에 남성들의 여성 신체에 대한 무지를 바탕으로(절정을 느껴야만 임신이 된다는 개소리발언이 대표적이다) 이성적이지 못한 사고가 한 가문을 몰살할 수도 있었던 이 사건은 현대에 새롭게 구성될 여지가 충분하다. 마지막까지도 아내를 온전히 믿지는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장은 신이 진실을 가려줄 것이라 외치고, 장과의 대결에서 수세에 몰리자 강간은 없었다고 호소하는 자크의 모습은 절대적인 진실은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일침을 날린다. 대결이 끝나고 마르그리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마치 비이성적인 시대를 살아가는 이성적인 인간이 느끼는 허망함을 형상화한 것처럼 보인다. <라스트 듀얼>은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이성적인 사고의 중요성을 설파하며, 잘못된 해석이 난무하는 가운데 절대적인 진실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이어져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는 작품이다.



"진실은 하나예요. 나머지는 다 거짓이죠. (Truth is singular. Its versions are mistruth.)"

 - <클라우드 아틀라스> 중에서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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