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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Nov 08. 2021

나는 왜 표적이 되었나요?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할 때의 부작용

영화 <세버그>가 세기의 여배우를 그리는 방식은 낯선 듯 익숙하다. 마릴린 먼로가 <마릴린 먼로와 함께 한 일주일>에서 묘사된 것과 같이 연애담만을 중심으로 그려지지 않은 것은 낯설다. 여배우 이외에도 직업을 가진 역사적인 여성(직업이 없었어도 마찬가지일 것..)이 영화에서 묘사될 때 상당히 높은 확률로 연애사와 결혼사가 서사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데 반해 진 세버그(크리스틴 스튜어트 분)는 <세버그>에서 혁명가로서의 면모가 더욱 부각되어 나타난다. 하지만 주디 갤런드가 <주디>에서 그려진 방식과 같이 <세버그>는 그의 커리어가 정점일 때 배우로서 빛나는 순간이 아닌 사회적으로 공격당해 무너지는 순간이 서사의 주를 차지한다는 점에서 익숙하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남성에 비해 여성이 사회적 약자의 위치를 점해온 시기가 훨씬 크기 때문에 사회가 성평등했다면 응당 가져갔어야 할 몫을 주장한 여성들은 높은 확률로 비극적인 삶을 살기는 했지만 찰리 채플린의 말대로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역사적인 여성 인물들은 자신의 생애를 마감한 지 한참이 지나 멀리서 볼 수 있는 시점이 도래했음에도 그들의 성취를 조명받지 못한다. 대신 현대의 작가들은 그들의 삶에 굳이 현미경을 들이대어 수많은 비극적인 에피소드들을 끌어내고 그들의 성취마저 지워버린다. <비커밍 제인>이 그랬고, <아스트리드>도 마찬가지였다. 와중에 세버그는 있지도 않은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는 비극은 피할 수 있었다(제인 에어의 실제 연애사를 보면 <비커밍 제인>은 제인 에어를 주인공으로 한 팬픽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버그>의 성취를 현미경을 들이대 조명한다면 진 세버그라는 세기의 여배우가 겪은 비극적인 에피소드와 함께 국가라는 집단(정확히는 기득권자들로 이루어진 정부)이 거슬리는 소수자 집단을 제거하기 위해 개인을 공격하는 방식을 묘사했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하여 세버그의 비극은 개인사의 불행이 아닌 국가적인 실책으로 결론지어진다. 더군다나 국가는 그 과정에서 목표로 했던 가정뿐 아니라 자신들 가정마저 파탄낼 뻔했다. 영화 <주디>에서 주디 갤런드의 비극적인 삶은 아동의 노동에 대한 인식이 없고 자본주의의 끝판왕이었던 헐리우드의 불합리한 시스템이 아닌 단순히 어린 나이에 커리어를 시작하고 복수의 결혼을 했던 선택의 결과처럼 보인다. 반면 <세버그> 속 비극은 자신의 가정을 이루고도 불륜을 저지르고, 아이는 프랑스에 두고 커리어는 미국에서 이어가고자 했던 세버그의 선택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물론 두 가정을 파탄낸 세버그의 불륜은 도의적인(어쩌면 법적인) 책임을 피할 수 없지만 국가가 이런 세버그의 약점을 가지고 한 집단을 몰살시키려 했을 때 렌즈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시스템을 조명한다. 세버그의 불륜은 당사자들끼리 갈무리지어야 할 일이었으며 더군다나 흑표당을 향하는 실탄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가십이었다. 



영화 초반 세버그가 <성 잔다르크>를 촬영하는 장면은 굳이 잔다르크가 화형당하는 장면이 재현된다. 세버그가 앞으로의 사건에서 마녀사냥을 당할 것을 직접적으로 은유하는 이 장면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부수적인 피해를 마다하지 않는 당시 미국 정부에 대한 간접적인 은유로도 활용된다. 세버그는 이 장면을 촬영하며 화상을 입었고 이후 인터뷰에서 프레민저와의 작업은 몸보다 마음의 상처가 컸다고 언급한다.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서라면 실제 불을 질러 배우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프레민저는 흑표당을 무너뜨리기 위해 백인인 세버그의 가정과 커리어가 무너지는 것을 괘념치 않는 미국 정부를 상징한다. 이 사건은 세버그와 하킴 자말(앤서니 마키 분)의 가정을 파탄냈지만 그 과정을 지켜본 요원 잭 솔로몬(잭 오코넬 분)의 가정에도 분란을 가져온다. 잭이 세버그를 도청하며 일에 회의를 느낀 이유는 단순히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 정부에 반하는 의견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과 같은 백인조차 쉽게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부수적인 피해를 마다하지 않는 것은 큰 사안뿐 아니라 작전 수행 중에도 소소하게 드러나는 모습들이다. 세버그의 호텔 방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던 한 요원은 세버그의 강아지가 짖어 작전이 들킬 위기에 처하자 거리낌없이 강아지를 죽여버린다. 잭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요원이었고 어쩌면 그로 인해 가정이 무너질 위기에 처한다.


FBI가 흑표당을 무너뜨릴 실탄으로 세버그의 가십을 이용했다는 점은 짚어볼 만한 측면이 있다. 특히 흑표당의 수많은 흑인들을 제쳐두고 굳이 백인 여성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물론 세버그는 단순히 백인 여성이라기엔 당시 헐리우드의 라이징 스타로서 쉽게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흑표당에 타겟이 될 만한 인물은 얼마든지 있었으며 세버그를 이용하지 않더라도 흑표당을 무너뜨릴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버그가 굳이 표적이 된 이유는 명확하다. 흑표당 구성원보다도 세버그가 타겟으로 조준하기 쉬운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즉 웬만한 흑표당 구성원보다도 세버그가 약자였다는 뜻이다. 라이징 스타로서 LA와 프랑스에 각각 저택을 둘 만큼 자산이 있었던 세버그는 표적이 되는 순간 서사상의 최약자로 추락한다. 이는 하킴의 아내인 도로시(재지 비츠 분)가 남편의 불륜 사실을 알고 난 후 세버그의 집에 찾아와 공격하는 장면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도로시는 함께 불륜을 저지른 남편을 추궁하고 그와 헤어지는 대신 세버그와 절연하고 총까지 가져와 직접적인 위협을 가한다. 세버그가 흑인 여성인 도로시보다도 약자가 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세버그의 도덕성 때문이다. 거듭 지적하듯 불륜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은 피할 수 없지만 세버그는 비행기에서 차별당하는 흑인을 보고 자신을 노린 것임을 알고도 자리를 양보할 만큼 인권감수성을 지닌 인물이다. 그렇기에 자신을 찾아와 유리창을 깨고 총으로 위협하는 도로시를 보고도 되받아 공격하는 대신 집 안에 숨어버리고 이를 지켜본 FBI에게 무너뜨리기 쉬운 타겟이라는 인상을 확고히 하고 만다.



FBI가 세버그를 무너뜨린 방식은 꽤나 비열한데 세버그를 조준하는 동시에 주변 인물들을 함께 표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 세버그의 복중태아마저 가십거리로 만들어 공격의 대상으로 만드는 장면은 높은 위치에 올라간 이들의 도덕성에 의문을 품게 만든다. 세버그가 약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공격자의 위치로 가고자 마음먹은 계기가 되기도 한 그들의 복중태아 공격은 하킴의 가족을 향한 2차 공격인 동시에 세버그가 자살 시도를 하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기능한다. 무엇보다도 이는 잭이 FBI의 활동에 환멸을 느끼는 주된 원인이 된다. 특히 잭의 아내가 의대생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의를 실행하려 입사했을 FBI가 오히려 소수자 집단을 탄압하고 부수적인 피해를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잭에게 회의감을 주기 충분했을 것이다. 공익적인 목적이라 할지라도(흑표당 탄압이 공익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게 되면 이렇듯 수많은 부작용을 낳는다. 뜻하지 않게 과녁이 되어 수많은 화살을 맞던 세버그는 자살시도 후 아이를 잃고 나서야 스스로 화살 시위를 당기기로 마음먹는다. 철저하게 백인 남성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 FBI는 여성에 대한 몰이해와 소수 인종에 대한 편협한 시선으로 끝내 내부고발로 인한 비난을 면치 못한다.


이렇게 본다면 <세버그>는 세버그라는 인물을 빌려 인권탄압에 대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하는 영화라고 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흑인 탄압의 역사를 그리기 위해 뛰어난 배우였던 진 세버그의 삶이 어느 정도 가려질 것을 감수한 셈이기도 하다. 역시나 비극적으로 그려진 세버그의 삶은 헐리우드가 염원했던 만인의 연인으로서의 역할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역할에 도전하려 했던 모습을 스쳐 지나가듯 보여주지만 불륜에 대한 도의적 책임과 흑인 인권에 대부분 가려지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버그>를 통해 관객은 기득권자들로 이루어진 집단이 잘못된 목표를 향해 맹목적으로 나아갈 때 발생하는 부작용과 그로 인해 무너지는 개인들의 삶에 주목할 수 있다. <세버그>는 크리스틴 스튜어트 이외에도 많은 뛰어난 배우들을 기용하고도 아쉬운 지점들이 있지만 동시에 생각할 거리들을 남겨주는 작품이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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