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 Nov 15. 2021

마블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터널스>가 마블 사상 가장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

<이터널스>는 올해 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아시아 여성 최초, 여성으로는 두번째로 감독상을 수상한 클로이 자오 감독의 마블 데뷔작이다. 화려한 출연진들 사이에서 유독 감독에게 사람들이 주목한 이유다. 마블은 클로이 자오 감독이 <노매드랜드>로 주목받기 이전에 이미 그를 알아보고 감독직을 제안했는데 이름값에 비해 <이터널스>의 평점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고 급기야 로튼토마토닷컴에서는 썩은 토마토까지 평점이 추락했다. 코믹스로 이미 유명세를 떨치거나 이전에 영화화 혹은 드라마화가 된 전적이 있어 유명세에 기댈 수 있는 다른 히어로들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데다 역대 솔로무비 가운데 가장 많은 히어로를 등장시켜야 했다는 취약점을 고려하면 자오 감독이 연출에 실패했다고 보긴 어렵다. 오히려 <이터널스>의 만듦새는 등장인물 수가 더 적은 DC의 <저스티스 리그>(조스 웨던 버전, 잭 스나이더 버전 모두)보다도 완성도있고 짜임새도 나쁘지 않은 편이다. 특히 열 명이 넘는 이터널스의 개성을 살리고 와중에 인종할당(?) 및 성 소수자 할당(?), 장애인 배우 기용으로 PC함마저 놓치지 않은 <이터널스>는 단순히 영화의 재미를 넘어서도 평가받을 지점들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마블 시리즈에서 볼 수 있었던 특유의 유쾌함이 없어 관객들이 아쉬워하는 상황인데, 최대 다수의 최대 흥미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마블은 왜 1기 어벤져스들이 퇴장한 지금 <이터널스>와 클로이 자오 감독이라는 변수를 감수했던 것일까.


마블의 수장 케빈 파이기는 당신이 죽을 때까지 마블 사가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 공언했지만 마블은 현재 전성기이자 과도기다. 이미 슈퍼히어로 장르에서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이야기들은 너무나 낡아 리부트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고(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은 아마도 이런 연유로 탄생 과정이 생략됐다) 어벤져스가 정치에 얽히는 사건도 무려 5년 전인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이미 다룬 전적이 있다. 멀티 캐릭터를 가장 잘 활용한 작품이기도 한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는 마블이 작품성과 대중성에서 갈 수 있는 최고치를 경신한 작품이었다. 이후 마블이 내놓은 작품들은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았던 1기 어벤져스가 퇴장하면서 맥이 빠지는 동시에 시대의 변화로 피할 수 없는 PC함도 동시에 챙겨야 하는 난관에 부딪혔다. 1기 어벤져스 소속이었던 블랙 위도우의 유일한 솔로 무비인 <블랙 위도우>는 다행히도 이런 문제들을 어느 정도 피해갈 수 있었지만 <샹치: 텐 링즈의 전설>은 최초의 동양인 히어로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서사의 빈곤과 동양에 대한 이해 부족이라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샹치: 텐 링즈의 전설>은 동양인 히어로를 데뷔시킨다는 명목 하에 슈퍼히어로 장르 초기의 단순한 서사에 화려한 현대의 CG가 덧입혀져 액션과 단순한 재미를 원했던 관객의 구미에는 맞았던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꼼수는 지속적으로 쓸 수 없다. 마블은 이제 백인 남성이 현실 세계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빌런을 물리치는 단순한 서사에서 벗어나야 하는 특이점에 도달했다.



즉 PC함과 서사의 진화라는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한 소수자를 캐스팅할 수 있는 멀티 캐릭터가 등장하는 시리즈에 아트영화 감독(인 동시에 소수자에도 해당하는)을 고용하는 것이라고 마블은 생각했던 것이다. 더 안전한 방법으로는 이터널스 대신 엑스맨이 있지만 판권을 회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데뷔시키기는 어려웠다(파이기는 엑스맨이 MCU에 합류하려면 10년은 걸릴 것이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 특히 마블민국이라 불리는 한국에서는 (국적상 미국인이지만) 한국 배우로 여겨지는 마동석이 캐스트에 합류하면서 더욱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때 아마도 마블이 고려하지 못한 것은 국내 관객에게 마동석은 액션 배우로 익숙해 스크린에서 그의 화려한 액션을 길게 보고 싶어하는 관객이 많다는 점이다. 마블+마동석이라면 당연히 화려한 액션을 선보일 것이라고 기대했던 관객은 액션이라곤 주먹질 몇 번에 심지어 분량마저 얼마 되지 않는 마동석을 보고 당황함을 금치 못했을 공산이 크다. 특히 코로나로 인해 수많은 기대작들이 개봉을 연기하던 와중 오랜만에 개봉한 <이터널스>에서 관객들이 기대했던 것은 시원시원한 액션과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빌런 퇴치였다.


마블의 수많은 히어로들은 현실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누가 봐도 악당인 이들을 히어로의 대척점에 놓고 히어로가 자신을 희생해 가며 빌런을 물리치는 서사에서 출발했다. 때로는 현실의 정치적인 상황을 결합시키거나 다소 철학적인 주제들을 다루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곁가지에 불과했다. 여기서 곁가지라 함은 이들이 다루고자 했던 주제들이 얕았다는 뜻이 아니라 관객이 마블 시리즈를 즐기는 데 있어 메인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블랙 위도우>는 여성 연대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은 나타샤의 액션과 레드룸이 무너지는 과정, 특히 화려한 공중 액션 시퀀스를 시각적으로 즐기기 위해 극장에 간다. 지금까지 마블 영화들은 상업성을 기반으로 하면서 보다 복잡한 철학적인 요소들을 군데군데 녹여넣는 데 아주 능했고 머리아프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면 단순한 서사와 액션 시퀀스만을 즐기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웬만큼 이름을 들어본 배우들이라면 대부분이 마블 영화에서 역할 하나씩은 했을 정도로 화려한 캐스팅 군단 또한 마블의 매력이었다. 헌데 <이터널스>는 이런 마블의 매력을 반대로 뒤집었다. 액션 시퀀스는 있지만 화려하지 않고 서사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적은 편이다. 이제까지의 빌런들이 수적으로 우세하거나 막강한 능력을 지녔던 것에 비해 <이터널스>의 빌런은 화려한 스턴트 액션을 끌어내기가 어렵거나 대부분의 이터널스와 능력치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말로는 그렇다고 하지만). 그 액션의 빈 자리에 자오 감독은 (CG가 섞인)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각 캐릭터들의 매력과 보다 깊은 서사를 채웠고 비교적 인지도가 낮은 배우들이 함께했다.



<이터널스>를 보러 간 관객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을 것이다. 마블에 집중한 관객과 클로이 자오라는 이름에 집중한 관객. 자오 감독에 주목한 이들은 <노매드랜드>를 떠올리며 <이터널스>를 관람했을 것이다. 출세작인 <노매드랜드>는 집없이 떠돌며 노동을 이어가는 펀(프란시스 맥도먼드 분)을 가까이서 지켜보지만 노동 노마드족을 통해 미국 사회를 비판하지는 않았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여주면서 새로운 삶의 방식에 적응해가는 전에 없던 새로운 노동 인구를 그린 이 영화는 관객마다 다양한 반응을 이끌어냈다. 마블 영화 가운데 가장 흥미롭지만 자오 감독의 영화 가운데 가장 흥미롭지 못하다는 한 외신의 평은 여기서 비롯된다. 인류 구원이라는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하는 마블 영화는 다양한 감흥을 일으키는 자오 감독의 연출과 불협화음을 낸다. 캐릭터를 다변화하면서 자오 감독은 나름 주제를 다양화하려고 했지만 이터널스의 목표는 결국 인류 구원이며, 그 기반에는 인간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사랑이 자리한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는 캐릭터들도 있긴 하지만 인류의 성장을 믿고 아낌없이 사랑을 쏟아붓는 이터널스에 의해 빌런으로 획일화되고 만다. 인류가 발전하고 있다고 믿는 이터널스는 전쟁조차도 발전을 위한 희생이라 믿으며 이 과정에서 희생되는 인류에 서글퍼하는 이터널조차도 의견의 다양성을 견지하는 대신 결과적으로는 인류를 보호하려는 이터널스로 돌아선다.


<이터널스>에서 깊이 다룰 만한 소재는 사실 생각보다 많다. 인류를 대하는 이터널스의 다양한 모습들, 인류의 발전에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지에 대한 토론, 미래에 탄생할 수많은 생명체를 위해 현재의 생명체들을 희생해도 되는지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 어느것 하나 정답이 없고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 있는 주제들인데 반해 <이터널스>는 정답을 정해두고 그 지점까지 착실하게 나아간다. 자오 감독은 영화를 전개하는 과정에서는 자신의 색깔을 최대한 드러냈지만 결말에 있어서는 마블의 벽을 넘지 못한다. 거기다 긴 러닝타임으로 인해 관객들은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원하던 액션신을 맞닥뜨릴 때쯤 이미 지쳐 있는데 심지어 그 액션이 마블의 전작들에 비해 크게 화려하지도 않다. 자오의 액션은 화려하기보다는 아름다운 쪽에 속한다. 특히 창과 방패를 만들어 내 상대방을 공격하는 테나(안젤리나 졸리 분)의 액션은 예술로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손가락을 사용하는 킨고(쿠마일 난지아니 분)와 주먹을 사용하는 길가메시(마동석 분)의 액션은 크게 달라보이지 않고 분량마저 적다. 세르시(젬마 찬 분)는 액션이라고 할 만한 장면이 별로 없고 가장 많은 액션신을 차지하는 이카리스(리처드 매든 분)의 액션은 슈퍼맨을 닮은 데다 투박하다. 즉 실제 액션을 사용하는 캐릭터들의 비중은 적고 서사를 이끌어가는 캐릭터들은 꽤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결말에 이르러서는 진부하게 마무리할 뿐이다.



이제 첫 발을 내디뎠을 뿐인 <이터널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티 캐릭터 무비에서 각 캐릭터들을 훌륭하게 소개하고 두 개의 쿠키영상으로 새로이 등장할 캐릭터들까지 안내했다. 지구라는 영역 안에서 지금, 현재의 삶을 살아가며 눈앞에 보이는 빌런들을 처치하던 마블은 이제 더 멀리 바라본다. 단순히 우주 저 먼 곳의 존재로서 개똥철학을 가지고 우주를 좌지우지하던 악당 타노스는 이제 없다. 미국을 구원하던 영웅에서 시작한 마블의 서사는 어느새 가상의 국가를 통해 소수자의 권리에 대해 논하고, 전 세계에 흩어진 여성들을 불러모아 연대하고 서로를 구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미국의 대자연을 탐구하며 그 안에서 적응하며 살아가는 개인을 관찰함으로써 오스카 감독상을 거머쥐었던 자오 감독은 지구를 하나의 생명체로 바라보고 인류에 대한 희망에 관해 이야기한다. 자오 감독은 어쩌면 마블이 품기에는 너무 큰 감독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블과 첫 발을 맞춘 자오 감독은 거대한 우주를 통해 새로운 주제를 다루며 마블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마블의 새로운 세계가 열린 지금 이터널스가 어디로 향할지 궁금해진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왜 표적이 되었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