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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Nov 22. 2021

무대와 스크린은 달라요

<디어 에반 핸슨>은 왜 스크린에서 마력을 잃었나

이번 글은 사적인 고백으로 시작하려고 한다. 뮤지컬은 나에게 있어 기분전환이 되지만 돈이 많이 드는 취미라 자주 즐길 수 없다. 유명한 뮤지컬 곡은 대부분 들어라도 봤고 유명한 대극장 뮤지컬은 실제로 보기도 했으며 뮤지컬로 유명한 여행지(뉴욕 등)에 가면 현지에서 뮤지컬 공연을 즐기고 오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관람이 더 주된 취미인 이유는 가격적인 면도 있지만 신규 서사의 생산 여부에 따른 영화와 뮤지컬의 근본적인 차이 때문이다. 영화는 끊임없이 신작이 생산되며 한번 생산되면 영원히 박제되어 변하지 않는다. 반면 뮤지컬은 상대적으로 신작이 자주 생산되지 않고 구작이 반복 상연되지만 매번 연출과 배우는 조금씩 달라진다. 영화팬들은 새로운 서사를 찾아 나서지만 뮤지컬 팬들은 기존의 서사가 어떻게 다르게 연출되는지를 궁금해한다. 따라서 영화는 시류에 따른 서사 변경이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또한 영화에서는 실수란 있을 수 없다. 문제가 될 만한 실수들은 CG작업을 거쳐 완벽에 완벽을 기해 스크린으로 배송되며 그럼에도 남은 실수들은 꼼꼼한 영화팬들에 의해 오점이라는 오명이 씌워진다(사실 생각보다 영화 속 옥의 티는 눈물나게 많은 편이다). 뮤지컬은 매 공연이 라이브인 까닭에 어느 정도의 실수는 감안되며 녹화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에 오히려 팬들은 해당 공연의 관람자만이 볼 수 있는 자잘한 실수담을 남기며 즐거워한다. 무엇보다도 영화는 갈수록 현실적으로 진화한다. 화질이 좋지 않고 무성이었던 과거의 영화에서는 과장된 연기가 주를 이루었지만 아주 작은 소리도 녹음하며 인간의 시력을 뛰어넘는 수준의 기술을 구가하는 현대 영화에서 과장된 연기는 우스꽝스러워 보일 뿐이다.


그런데 연극과 뮤지컬은 뒷자리에 앉은 관객에게도 대사를 전달하고 동작을 보여주어야 하기에 과장된 연기가 필수적이다. 한국의 라이선스 뮤지컬에서 종종 발견되는, 이지나 연출가와 엄기준 배우가 TV프로그램 <더블캐스팅>에서 '외화 더빙 연기'라 명명하고 나는 주접연기라 부르는 콧소리 섞인 연기들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애초에 일상에서 갑자기 상황에 맞는 노래를 부른다는 것 자체가 연극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현실성을 강조하는 영화 매체에 뮤지컬이 등장할 때 세심한 연출 없이는 위화감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위화감이 그나마 덜한 사례는 애초에 뮤지컬 영화로 기획되는 경우다. <위대한 쇼맨>, <라라랜드>는 처음부터 영화 매체에 맞는 뮤지컬 장면을 기획했기에 과장된 연기도 없고 오히려 CG라는 영화의 장점마저 가져가는 영화들이었다. 반면 <캣츠>는 뮤지컬에서만 허용되는 인간 고양이들을 CG로 어색하게 재창조해내면서 재앙에 가까운 결과물을 내놓았다. 어색한 인간 고양이는 무대적 허용으로 관객을 즐겁게 하지만 그것이 스크린으로 왔을 때는 공연 실황만도 못한 존재가 된다. <디어 에반 핸슨>은 상대적으로 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영화화에 용이한 뮤지컬일 것이라고 제작자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20대 후반의 나이로, CG작업 없이는 10대로 보이기 힘들지만 무대에서는 그가 10대라면 10대라고 믿어주는 관객들만을 봐온 까닭에 뮤지컬 무대에서 에반 핸슨을 연기해온 벤 플랫을 영화 매체에 그대로 투입하며 영화화는 진행되고말았었다.



브로드웨이에서 티켓이 없어 보지 못한다는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은 국내에는 아직 소개된 적이 없다. 앞서 언급한 뮤지컬 오디션 프로그램 <더블캐스팅>에서 나현우 배우가 앙상블 미션에서 'Waving through a window' 무대를 선보인 적이 있을 뿐 정식으로 국내 무대에서 풀 버전이 상연된 적은 없다(참고로 이 무대는 꽤 볼만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V7JTzNdJs2c). 유튜브에서 검색해봐도 동영상용으로 재촬영된 영상 정도가 있을 뿐이라 국내 관객은 원작 뮤지컬과 비교해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영화 버전만을 봤을 때 <디어 에반 핸슨>은 영화화에 적합한 뮤지컬처럼 보인다. 특히 인스타그램, 이메일이 영화에 주기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뮤지컬보다 오히려 영화에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어 에반 핸슨>은 스크린으로 옮겨 오면서 현실성의 벽에 부딪힌다. 뮤지컬을 관람하는 관객들은 서사의 현실성보다는 라이브로 감상할 수 있는 좋은 노래들과 배우의 퍼포먼스에 집중한다. 40대 배우가 본인이 10대라고 우겨도 그러려니 하고 본다(때문에 더블, 트리플 캐스팅의 경우 같은 배역이라도 배우들의 나이차가 열 살이 넘는 경우가 허다하다). 테나르디에 부부가 백인인데 에포닌이 흑인이라도 뮤지컬 관객들은 인종다양성이 확보되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뮤지컬 관객들은 퍼포먼스의 평가에서만 엄격할 뿐 이외의 영역에서는 놀라울 만큼의 포용성을 보여준다.


영화 매체는 다르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기술은 영화 관객들에게 확인사살의 무기가 된다. 뮤지컬의 내용을 가지고 역사 고증을 하려 드는 이들은 없지만 영화에서 묘사되는 직업이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오류를 지적하는 유튜브 영상들이 따라붙는다. 무엇보다도 매주 새로운 작품이 수십편씩 개봉하는 영화 시장에서는 PC함을 지키는 것이 중요해졌다. <디어 에반 핸슨>은 여기서 삐끗한다. 에반 핸슨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시아인도, 흑인도, 라틴계도 될 수 있는 뮤지컬과 달리 영화 매체에서는 백인 남성인 벤 플랫으로 영원히 고정된다. 또한 사회 불안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 그렇구나 하고 인정해주는 뮤지컬 관객과는 달리 영화 관객은 러닝타임 대부분을 노래하고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에반 핸슨을 보며 진정 사회 불안 장애가 맞는지 의심한다. 에반이 학교에 가길 두려워하며 홀로 노래하는 'Waving through a window' 장면과 죽은 코너(콜튼 라이언 분)를 위해 연단에 올라 헌사를 하려다가 실수한 후 'You will be found'를 부르는 장면을 제외하면 에반은 사람들과 별 문제없이 어울리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You will be found'를 부를 때조차도 처음 더듬거리며 마이크를 넘어뜨리는 장면까지를 제외하면 에반은 자신감있게 노래한다. 뮤지컬에서는 에반 핸슨에게 자신을 투사하던 관객들은 영화 매체에서 만난 에반 핸슨을 보며 당황한다.



뮤지컬에 비해 서사를 중시하는 영화 관객들은 뮤지컬을 볼 때만큼 'You will be found'에 감동받지 못한다. 에반이 이 곡을 부르는 시점이 사람들이 아직 코너와 에반에 대한 진실을 알지 못할 때이기 때문이다. 에반은 어둠이 몰려올 때, 믿고 의지할 친구가 필요할 때 누군가가 당신을 찾을 것이라 노래하지만 코너에게 에반은 그런 존재가 아니었고 에반에게도 엄마 하이디(줄리안 무어 분)를 제외하고는 그런 존재는 없었다. 즉 에반이 부르는 노래는 서사 상에서 거짓말에 가깝다. 상대적으로 뮤지컬 관객들에게 이 장면의 진실성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에반 핸슨을 연기하는 배우가 이 장면에서 감동적으로 연기하며 노래만 잘 불러준다면 감동을 받는다. 반면 영화 관객에게는 장면의 진실성이 중요하다. 이미 에반의 노래에 거짓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영화 관객은 노래를 들으면서도 감동을 받기보다는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 특히 환호하며 박수를 치는 것이 허용되는 뮤지컬 극장과는 달리 (특히 한국의) 영화관에서는 다른 관객의 반응을 살피기가 쉽지 않다. 영화 관객은 노래가 불리는 분위기에 반응하지 않고 서사에 반응한다. 모든 진실이 밝혀지고 영화가 마무리되면 'You will be found'의 감동은 반감된다.


제작자들의 의도와는 달리 관객이 영화에 이입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요인은 코너다. 영화 초반에 잠깐 등장하며 그 장면조차 에반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 전부인(분노조절 장애가 의심되는) 코너는 적어도 영화 관객에게는 연민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코너를 그리워하는 것은 영화 전체에서 코너의 엄마 신시아(에이미 아담스 분)뿐이다. 코너의 새아버지조차도 코너를 정말 아꼈는지 재혼한 아내를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인지 애매하게 그려지며 사람들의 시선이 코너에게 집중되는 것이 불편하기만 한 여동생 조이(케이틀린 디버 분)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관객이 이입할 만한 대상은 평생을 코너 때문에 부모(특히 엄마)의 관심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코너를 대신해 사과하며 살아야 했던 조이다. 하지만 조이에게는 눈에 띌 만한 솔로곡이 주어지지 않으며 코너에 대한 시선 없이 살고 싶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곡마저 에반과의 듀엣으로 완성된다. 헐리웃 제작자들은 아마도 몰랐겠지만 특히나 남아 선호사상이 아직까지 잔존하며 특히 아들에게 자아를 의탁해온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전설처럼 떠도는 대한민국에서 코너를 잊지 못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는 반감을 살 수밖에 없다. (특히 여성)관객은 자식을 잃고 어떻게든 좋게 기억하고 싶어하는 신시아를 부모로서 이입하기보다는 딸에 앞서 아들을 편애하는 어머니로 받아들인다. 아들을 사랑하는 에이미 아담스의 연기는 절박하지만 그래서 영화 매체에서는 장점이 되지 못한다.



당신이 힘들 때 누군가가 당신을 찾을 것이라는 노래로 유명하지만, 실제 서사에서조차 희망으로 끝맺지 못하는 <디어 에반 핸슨>은 이렇게 스크린의 벽 앞에서 가로막힌다. 무대가 스크린으로 이동할 때 단순히 매체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기대도 변한다는 것을 몰랐던 제작자들은 <디어 에반 핸슨>을 과대평가한 셈이다. 뮤지컬을 스크린으로 옮기려는 시도는 계속되지만 <캣츠>와 같은 재앙, <디어 에반 핸슨>과 같은 아쉬움이 지속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 <디어 에반 핸슨>에 대한 아쉬운 반응은 한편으로 뮤지컬계도 마찬가지로 변화가 필요하다는 해석으로도 읽힌다. 남성 중심의 낡은 서사와 전형적인 캐릭터가 난무하는 뮤지컬계도 새로운 관객을 받아들이려면 구작을 반복하는 대신 시류에 맞는 신작 제작에 열과 성을 올려야 한다. 그렇게 뮤지컬계가 변화하는 날 영화 관객은 기쁜 마음으로 뮤지컬 극장으로 향할 것이다. <디어 에반 핸슨>은 이렇게 뮤지컬과 영화가 변화하는 오늘날을 그대로 반영한 작품이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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