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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Nov 29. 2021

당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쓰는 순간

장르는...

윤계상이 1인 7역을 소화한다고 홍보했지만 <유체이탈자> 속 윤계상은 정확히는 1인 7역이 아니라 7인에 빙의된 강이안을 연기한다. 기억 상실을 소재로 한 영화도 많고 빙의나 신체강탈을 소재로 한 영화도 많지만 기억을 상실한 채 빙의가 된 이야기는 드물다(솔직히 처음 본다). 기억을 상실한 채 타인의 몸에서 깨어난 강이안이 교통사고 현장에서 정신을 차리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하는데 이 때 강이안의 얼굴을 아는 것은 관객뿐이다. 여기저기에 비친 얼굴을 본 강이안은 그것이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강이안은 자신의 집에 도달해 문진아(임지연 분)와 함께 찍은 자신의 사진을 보고도 낯설어하며 강이안이라는 이름을 끊임없이 듣고서야 주민등록증을 확인하지만 여전히 자기 자신이 누군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강이안은 자기 자신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12시간마다 신체가 바뀐다는 사실만으로 그 신체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신체가 지속적으로 바뀌는 강이안에게 일관성을 부여하는 것은 본인이 아니라 타인이다. 강이안이 우연히 알게 된 행려(박지환 분)는 "당신이 당신이 아니라는 건 어떻게 아냐"며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데 그가 강이안의 신원을 확인하는 단어는 핫도그라는 단어다. 하지만 이 핫도그는 강이안이 선택한 물건이 아니다. 행려가 정체성에 대한 설명을 하다가 예시로 들며 강이안에게 쥐어준 물건인 핫도그는 스스로도 모르는 불확실한 정체성을 상징한다.


<유체이탈자>는 7인에 빙의된 강이안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빙의된 역할과 빙의한 역할이 번갈아가며 화면에 나타나는 방식을 취했는데 강이안이 화면에 등장하는 분량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관객은 강이안이 빙의한 7인에게서 일관성을 어렵지 않게 획득한다. 강이안이 빙의한 7인의 신체는 강이안에게 자신의 과거를 밝히거나 정체성에 대한 단서를 주기보다는 강이안이 누구인가를 밝히는 데 장애물로 기능한다. 12시간마다 신체가 바뀐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강이안은 12시간이 지나면 신체의 주인이 어떻게 되든 신경쓰지 않는다. 서사의 초점은 강이안이 빙의한 이들에게 강이안이 어떤 존재였을까가 아닌, 강이안 자체가 누구였나에 있다. 강이안에게 일관성을 부여하는 것이 본인이 아닌 타인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본인이라고 선언하는 셈이다. 강이안은 기억하지 못한다면서도 무의식과 직감에 기대어 생존을 도모하는데 이운산(지철호 분)의 목에 흉기를 겨누며 경동맥을 공격할 것이라고 협박하는 장면이나 다른 이들은 신뢰하지 못하면서도 문진아에게만은 (연인이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도) 상냥하게 대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유체이탈자>는 모든 이야기의 오랜 주제인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끈질기게 답하려 노력하는데 결국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결정한다고 우기는주장하는 듯한다.



다시, 행려가 이부장(유승목 분)에게 빙의한 강이안에게 하는 질문으로 돌아가면 강이안은 자신의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지만 자신이 이부장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이 때 강이안은 이한(변요한 분)의 신체에서 단 1회 빙의를 옮겼을 뿐이다. 즉 강이안의 시점에서 본인이 이부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 만한 단서는 극히 적다. 이 장면에서 강이안이 빙의한 이부장이 이부장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관객에게는 윤계상의 얼굴로 인해 명확하지만 그 자신에게는 기실 본인이 아니라고 정한 것, 혹은 자신이 아니라고 믿는 것에 가깝다. 그렇다면 정체성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의식적인 기억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영화 내내 강이안은 자기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사람이 아닌지는 아는 것처럼 보인다. 안타깝게도 정체성은 소거법으로 알아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에 강이안은 자신이 빙의한 사람들의 주변을 샅샅이 뒤진다. 그리고 강이안이라는 인물이 사건의 중심에 놓여 있으며 실종 상태라는 것을 알아내고 자신이 강이안일지 모른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육체와 정신의 관계는 과학적으로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신체 상태가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강이안은 수많은 신체를 옮겨 다니면서도 놀라울 만큼의 일관성을 유지한다. 그 어떤 신체에서도 강이안의 신체가 가지고 있던 민첩함은 사라지지 않는데 관객에 이 설정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언급한 대로 빙의한 신체보다 빙의한 강이안이 등장하는 분량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매일 신체가 바뀌는 주인공을 토대로 한 <뷰티 인사이드>는 100명이 넘는 배우가 한 인물을 연기하는 바람에 캐릭터의 일관성을 잃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신체 변형이 실제로 가능하다면 <뷰티 인사이드>쪽이 현실적일지도 모른다. 강이안이 기억하는 것은 단순한 이미지 기반의 기억인가, 물리적인 신체의 근육에 새겨졌어야 할 신체 기반의 기억인가. 강이안은 신체 기억을 토대로 이미지 기반의 기억을 찾기 시작한다. 자신의 직업은 모르지만 사람 하나 정도는 쉽게 제압할 수 있는 민첩성을 가지고 있고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신체 부위에 기반한 의학적 지식을 지니고 있는 자. 그리고 모든 사람이 무슨 이유에선지 찾고 있는 실종된 인물인 강이안이 자신일 거라는 데 강이안은 너무나 쉽게 도달한다.



강이안은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찾아 헤매는 것이다. 그리고 강이안의 대척점에 놓인 인물인 박실장(박용우 분)은 타인의 서사를 지어내는 인물이다. 이한을 죽이고 자살로 처리한 박실장은 부하들에게 적당한 이야기를 하나 지어내라고 지시하며 장르까지 정해준다. 인생이라는 서사에 단 하나의 장르만 적용되지는 않기 때문에 박실장은 타인의 이야기를 지어내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 강이안이 마지막으로 빙의한 인물인 백상사(서현우 분)에게도 박실장은 서사를 강제로 부여하려 하지만 빙의한 강이안은 이미 자신의 이야기를 되찾고 스스로 이야기를 쓰려는 참이다. 빙의한 신체가 바뀌는 시간, 그 이유, 빙의한 인물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서사의 주도권을 잡은 강이안은 박실장을 포함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다. 강이안은 서사의 주인공이자 필자이기에 다음 차례에 살고 죽어야 할 인물이 누구인지 서서히 깨닫는다. 하지만 이 서사의 구조를 모르는 박실장이 감히 서사의 필자에게 대적할 수는 없다. 강이안 스스로가 깨닫게 된 정체성은 자신의 직업이 무엇인지, 연인이 누구였는지에 국한되지 않고 앞으로 자신이 써내려갈 이야기에까지 확장된다.


강이안이 흩어진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찾는 곳은 자신의 신체가 숨겨진 곳이다. 빙의된 신체들을 이용해 자신의 과거를 찾기보다는 강이안은 우선 자신의 신체를 찾고자 하는데 육체와 정신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성질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혼수상태로 놓인 자신의 신체를 목격한 순간 강이안은 과거를 기억해낸다. 타인의 기억을 통해 정체성을 탐구하던 강이안이 정체성 찾기의 주도권을 잡는 순간이 바로 자신의 신체를 찾아내는 순간이다. 어쩌면 강이안은 빙의되어 온 인물들이 하는 불법적, 비도덕적인 행동을 보고 자신이 아닐 것이라 무의식중에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선한 인물이자 가해자이기보다는 피해자이길 원했던 강이안은 온전한 피해자로서 의식을 잃고 누운 자신의 신체를 보는 순간 자신의 직감이 맞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본래의 신체로 돌아가기에 앞서 연인인 진아를 보호하고 정의가 구현되길 원하는 (기억을 잃었다가 되찾은) 강이안은 기억을 잃기 전의 강이안과 일관성을 보여준다. 강이안은 신체를 되찾기보다는 진아를 구해내는 데 초점을 두고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진아가 '모두 한 사람이었다'고 진술하는 장면은 이런 연유로 타당성을 획득한다. 타인의 시각에서 행동의 일관성으로 정체성을 인정받았다가 정체성의 주도권을 잡았던 강이안은 다시 타인의 시선으로 되돌아간다. 여러 대의 cctv에 찍힌 서로 다른 강이안은 cctv를 보는 형사들과 진아에 의해 동일인으로 판정받는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본인의 신체를 일으키려 하는 강이안과 마주친다. <유체이탈자>는 정체성과 정체성 인식,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오랜 서사의 주제에 대해 윤계상의 신체를 빌려 나름의 대답을 보여준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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