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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Dec 06. 2021

객체가 주체의 옷을 입을 때

모델에서 디자이너로

한때 한국 버전까지 만들어졌던 리얼리티쇼 <프로젝트 런웨이>는 스타 디자이너를 탄생시키면서 화려한 패션업계의 이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디자이너들은 밤을 새서 디자인을 하고 옷을 만들며 모델에게 입혀볼 때까지도 초조해한다. 그리고 런웨이 당일 모델이 나타나지 않거나 지각하면 디자이너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하기도 한다. 디자이너에게 초점을 맞추었던 <프로젝트 런웨이>에 등장한 모델들은 입으라면 입고, 화장을 해주는 대로 화장을 받고 무대에 등장해 워킹한 후 무대 뒷편으로 사라지는 존재들이었다. 이후 여러 시즌이 지나면서 <프로젝트 런웨이>에 등장하는 모델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스핀오프 리얼리티쇼가 함께 제작되기도 했는데 그제서야 모델들이 디자이너에게 얼마나 종속된 존재인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즈음 함께 인기를 끌었던 다른 리얼리티쇼 하나는 모델 출신의 방송인 타이라 뱅크스가 이끄는 신인 모델 선발 프로젝트인 <도전! 슈퍼모델>이었다. 이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모델들은 외모 관리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고 어떤 모델은 헤어스타일을 바꾸라는 타이라 뱅크스의 강요에 못이겨 탈락을 자처하기도 했다. 두 프로그램을 동시에 애청했던 나는 여성의 점유율이 높은 모델은 수동적인 위치에, 남성의 점유율이 높은 디자이너는 능동적인 위치에 놓이기 쉽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라스트 나잇 인 소호>의 주인공 엘리(토마신 매켄지 분)는 디자이너 지망생으로 런던의 예술학교에 합격해 들뜬 마음으로 고향을 떠난다. 유명 브랜드의 기성복을 입는 대신 스스로 만든 옷을 입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겠다는 당찬 포부로 런던에 도착한 엘리가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무례한 택시기사다. 이 택시기사는 엘리를 보고 다리를 보아하니 디자이너가 아니라 모델을 해야겠다며 농담을 건네는데 이는 성희롱이기도 하지만 주체적인 디자이너의 위치에 서고자 하는 엘리를 모델이라는 객체의 위치에 놓고자 하는 시도다. 엘리는 이 무례함에 당혹해하지만 런던 토박이가 아니며 신체적인 약자인 자신의 위치를 알고서는 택시에서 바로 내려 근처 가게에 숨는 수동적 대처로 런던에서의 첫날을 시작한다. 도착한 기숙사에서는 유명 브랜드의 기성복을 입은 동기들에게 시달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맞서는 대신 월세방으로 옮기는 수동적인 대처에 머무른다. 엄마의 환영을 보는 엘리는 정신과를 찾아가거나 주변인에게 도움을 구하는 대신 환영이 보이지 않는 척 연기하며 만사에 주체성을 견지하는 일에 힘겨워한다. 과거의 환영인 죽은 엄마에게서 벗어나는 대신 엘리는 60년대 음악을 듣고 유선전화가 있는 옛날식 주택으로 이사하는, 과거에 파묻히는 선택을 이어간다. 



엘리가 선택한 것이 의상디자인이라는 점은 60년대의 환영에 나타나는 샌디(안야 테일러 조이 분)와의 관계에서 미묘한 지점이다. 진한 화장을 하고 진홍색 원피스를 입은 채 당당하게 리알토에 등장해 가게의 오너를 찾아왔다고 주장하며 자신감있게 무대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샌디는 엘리와는 달리 주체적인 여성상으로 비춰진다. 하지만 그런 샌디를 동경하며 샌디의 헤어스타일과 의상을 흉내내고 샌디의 삶을 관음하던 엘리는 어느 순간 샌디가 그런 당당한 모습을 잃고 소호의 남자들에게 성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당당하던 샌디가 주체성을 잃었다는 것을 엘리가 깨닫는 순간은 무대에 성적으로 대상화된 의상을 입고 등장해 백댄서로 춤을 추는 순간이다. 샌디의 의상을 동경하던 엘리는 둔부가 보이는 의상을 입은 샌디를 보고 경악한다. 무대에서 꼭두각시 인형으로 등장하는 샌디는 현실 세계에서도 소호 거리를 지배하는 남자들의 인형이 된 셈이다. 엘리가 디자인하던 샌디의 의상은 동경이 아닌 공포의 대상으로 탈바꿈한다. 때로는 거울 속에서, 때로는 샌디 자신이 되어 60년대 런던을 활보하던 엘리는 이제 거울을 깨고 샌디를 구하려고 하지만 샌디는 끝도 없이 자신의 감옥 창살이 된 의상을 갈아입기만 할 뿐 엘리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진한 화장을 하고 신체를 드러내는 의상을 입고, 걷기도 힘든 하이힐을 신고 소호 거리를 활보하는 샌디는 당당하고 자유로워 보이지만 결국 남자들의 관음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샌디를 착취하는 남성들은 대부분 비슷한 턱시도를 입고 샌디의 퍼포먼스를 편하게 앉아서 구경한다. 남성들의 의상이 비슷하다는 것은 대부분의 남성들이 샌디에게 취하는 태도가 별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름 샌디에게 호의를 베풀려던 경찰 린지조차도 2021년의 엘리에게 잭(맷 스미스 분)으로 오해받을 정도로 익명성을 유지시켜주는 기능은 부차적이다. 재능이 많고 아름다운 샌디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많은 댄서와 가수들에게 파묻히는데 이는 너를 대체할 이는 많기에 성착취를 견디지 않으면 무대에 설 수 없다는 남성들의 가스라이팅의 결과다. 샌디를 괴롭히던 이들은 망령이 되어 2021년의 엘리의 뒤를 따라다니는데 영화 초반 엘리가 택시 기사에게서 성희롱을 당하는 장면과 연결되어 여성을 대하는 태도가 현대 소호 거리에도 남아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샌디의 의상을 디자인하던 엘리는 그 자신이 주체가 되어 객체인 모델에게 옷을 입히고 기장을 수선하며 주체성을 유지하려 하지만 모델이 입을 열어 의견을 피력하는 순간 샌디를 보고 주체의 자리로 돌아가는 데 실패한다. 엘리는 현실에서도 60년대의 망령을 보지만 경찰에 찾아가고 과거의 기사를 검색해도 샌디를 찾을 수 없다. 샌디로 대변되는 여성 착취의 역사는 환영으로 등장할 만큼 만연하지만 철저하게 남성들의 손에 지워져 왔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환영에게서 달아나면서도 샌디의 흔적을 찾으려는 엘리는 샌디를 착취하던 남성들과 비슷하게 무채색 혹은 검은색의 의상을 입고 달리기 편한 운동화를 신고 있다. 비가 내리는 어두운 소호 거리에서 엘리는 가로등 밑에 서지 않는 이상 어둠 속에 파묻힐 수 있는 존재다. 그런 엘리를 과거의 망령들은 끊임없이 찾아내 객체의 위치에 놓으려 들지만 엘리는 이제 현실에서 경찰서를 찾아가고 도서관에서 과거의 기사를 검색하며 주체의 위치에 서려 한다. 망령에 시달리다 못해 결국에는 고향으로 도망치는 결정을 내린 엘리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옥죄어 오던 하숙집으로 향하고 자신을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 여성에게 손을 내민다. 엘리는 자신을 시골뜨기라 무시하던 여성 동기들을 피해 남자친구인 존에게 기대려고 하지만 엘리를 구하는 자는 존이 아니라 엘리 자신이다. 그리고 엘리가 그 자신을 구하고 샌디를 구원하는 순간 주체의 위치에 올라서 오히려 존을 구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자기 자신을 구한 엘리는 샌디의 서사에서 벗어나 자신의 서사를 만들고 주연의 위치가 되어 자신만의 패션쇼를 완성한다. 엘리가 완성한 패션쇼가 결국에는 60년대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엘리가 온전히 주체가 되지는 못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동기들이 촌스럽게 여기던 60년대 스타일로 성공적인 쇼를 런칭했다는 점에서 엘리가 성공적으로 구원 서사에 방점을 찍었다고 볼 여지도 있다.


한편 객체의 위치로 전락해 반짝이던 눈을 잃고 술에 취해 춤을 추고 성착취를 당하던 샌디가 나름의 주도권을 되찾는 순간은 역설적으로 남성들이 샌디의 옷을 벗기는 순간이다. 신체를 구속하던 의상이 벗겨지는 순간 샌디는 정신을 차리고 주체가 된다. 샌디의 옷을 벗기려 하지 않았던 유일한 남성인 린지가 2021년까지 살아남은 이유는 역설적으로 샌디를 구원의 대상으로 여기고 객체의 자리에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샌디와의 관계에서 린지는 자신을 구원자로 설정하고 주체의 위치에 머물렀기에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는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르고 사회가 변했음에도 린지는 구원자 서사를 놓지 않고 소호 거리에서 샌디를 좇는다. 린지는 엘리가 샌디와는 다르다는 점을 간과하고 엘리와의 관계에서도 주도권을 쥐려 한다. 그리고 샌디를 찾는 엘리 앞에서 샌디의 구원자 행세를 하며 엘리를 괴롭히는 현실의 망령이 되는 순간 서사에서 그 자리를 잃는다. 린지의 서사는 세상이 변했기에 남성들도 함께 변하지 않는 이상 과거의 흔적이 남은 소호 거리에서조차 생존할 수 없을 것을 암시한다. 본의아니게 린지를 걷어차고 남성의 위치를 점유하게 된 엘리는 서사의 주도권을 잡았지만 스스로 깨닫지 못하지만 샌디를 구원하는 능동적인 행위로써 주연의 자리를 꿰차게 된다.



서사의 주연으로 온전히 자리잡은 엘리는 과거를 버리는 대신 과거를 끌어안는다. 자신의 무대에 60년대를 재현한 엘리는 여전히 죽은 엄마를 거울 속에서 마주하지만 모른척하거나 쫓아버리는 대신 미소지어 보인다. 보이지 않는 60년대의 흔적이 남은 소호 거리의 망령들은 엘리를 통해 자신들이 존재함을 과시하려 하지만 엘리를 지배하지 못하고 패션쇼에서 지워진다. 동경하던 샌디의 패션을 버리고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온 엘리는 과거에서 영감을 받는 디자이너가 되어 현재에서 자신만의 서사를 완성한다. 소호에서의 마지막 밤, 소호에서의 지난 밤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 제목 <라스트 나잇 인 소호>는 엘리가 변화함에 따라 다른 의미를 안겨준다. 소호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려던 엘리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 한층 성장함으로써 소호에서 보낸 샌디의 마지막 밤을 자신의 지난 밤으로 만든 셈이다. 소호 거리는 객체의 자리를 거부한 엘리에게 더 이상 공포감을 주지 못하고 엘리의 배경으로 머무른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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