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정수를 경험하게 될 거예요. 이 깊은 자의 쓰는 과정 엿보기는 덤
넓고 얕게 알기를 좋아하고 찍먹 하듯 경험한 후 빠르게 변화하는 걸 선호하는 세상에서 무엇 하나를 오래, 깊게 파는 일은 어쩐지 고루해 보입니다. 그런 신념은 낡은 것처럼 말해지기도 하고요.
물론,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꿔 대응하는 유연함도 필요하겠으나 흐름에 따라 매번 길을 달리하기보다는 뚝심 있게 밀고 나가는 힘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깊이를 만드는 유일함은 집요함이기 때문이지요.
얕기로는 저도 웬만한 이들 못지않습니다. 금방 싫증 내버리는 이 못난 성향 탓입니다.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언제까지고 이럴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넓고 얕은 것이 경험의 미덕으로 치환될 수 있는 건 젊은 시절 한정인 것 같습니다. 얕고 가벼운 어른, 중년, 노인이 되고 싶진 않기에 고루하다 할지라도 저는 깊이 있게 나이 들도록 해야겠습니다.
집요함이 만들어낸 깊이, 그 멋짐을 볼 수 있는 책 아니 작가가 있습니다. <생의 이면>과 <사랑의 생애>를 쓴 이승우 작가입니다.
그의 책은 전자책으로 처음 읽었는데요. 저 같은 분들은 공감하겠지만, 종이책보다 전자책을 읽을 때 집중력이 떨어집니다. <생의 이면>을 밀리의서재로 읽었지요. (지금은 내려갔습니다. 왜 내렸어 밀리..) 그럼에도 집중력이 한 톨도 흩어지지 않던 책입니다. 처음에 읽을 때만 해도 ‘무슨 이런 지독한 책이 다 있지.’ 했는데 이상하게 끌리더라는 겁니다. 굉장히 지독하고 때로는 고약하기까지 했지요.
초반에는 ‘뭘 이렇게까지….’ 쓰나 싶었는데, 남은 페이지의 두께가 얇아질수록 ‘이렇게까지’ 써야 하는구나 연신 감탄사가 터져 나왔습니다. 삶이란 단 한 문장으로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주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것이지요. 그 복잡다단한 삶에 대해 수십 겹의 사유를 응축해 문장으로 뱉어낸 느낌이었지요. 괜히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꼽히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도대체가 어떤 사고의 흐름일까, 당연히 그 과정이 궁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산문집을 찾아보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지요. 아무래도 소설보다는 좀 더 직접적인 육성을 들을 수 있을 테니까요.
2020년에 나온 <소설가의 귓속말>과 올해 9월에 예약 판매로 받은 <고요한 읽기>입니다. 전자는 글을 쓰는 일에, 후자는 읽는 일에 무게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읽기와 쓰기라고 했지만 사실상 유기적으로 얽힌 책입니다. 읽기와 쓰기를 어떻게 떼어놓을 수 있을까요. 이 두 가지를 묶는 건 역시나 사유(생각)입니다. 이 전체를 묶는 건 ‘나’이고요.
읽기는 나를 확대하는 돋보기이고
사유는 그런 나를 열고, 찢고, 들쑤셔 중심부 즉 알맹이에 가닿는 일입니다.
쓰기는 깊은 곳에 틀어박혀 있던 그 알맹이의 먼지를 털어내고, 정갈하게 다듬고, 가지런히 펼쳐놓는 일이지요.
돋보이는 건 단연 ‘사유’입니다. 지구 내핵까지 뚫고 들어가는 집요함이지요. 그의 글은 한번 물면 놓아주지 않는 미친(그러나 점잖은) 개와 닮았습니다. (오해하실까 말하는데, 절대 나쁜 의미 아닙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미아 되기 십상입니다. 아주 치열하고, 밀도가 높은 글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새로운 이야기는 이미 있는 이야기에 대한 이의 제기이다. 이야기는 부모 없이 태어나지 않는다. 부모가 너무 많을지는 몰라도 아예 없지는 않다. 이미 있던 이야기의 속편이나 덧붙임, 혹은 변주 아닌 이야기가 없다. 이야기 앞에 이야기가 있었다. 이야기 뒤에도 이야기가 있다. 뒤 이야기는 앞 이야기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렇지만 부모에게서 나온 자식이 고유한 것처럼, 앞 이야기에서 나온 뒤 이야기 또한 고유하다. 고유한, 자기 삶을 산다.
<고요한 읽기> 190p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는 바울의 문장 다음에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문장이 이어진다. 아는 사람,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모르고 있는 것, 마땅히 알아야 함에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모르는 부분이 남겨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모르는 부분을 남겨두어야 한다. 모르는 부분이 없이 다 아는 것이 문제라는 사실을 마땅히 알아야 한 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것을, 마땅히 알아야 함에도 모른다.
<고요한 읽기> 63p
이런 사람이 본인의 업인 쓰는 일에 관해서는 뭐라고 했을까요? 가장 많이 고민했을 그 일을 무어라 풀어놓았을지 너무 궁금했습니다.
개인적 경험의 영역을 참고할 때 글쓰기의 기원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프다'이다. 이 아픔은 지극히 사적인 영에 속해 있어서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받을 수도 없다. 아픔 겪고 있는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고 표현하려면 똑같은 아픔을 경험해야 하는데,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아픔은 고유하고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픔은 표현할 수 없는데도 표현되고자 한다. 아니, 어떤 식으로든 표현될 수밖에 없다. 표현될 수 없는 아픔을 표현하려는 욕구가 무조건적 무의지적으로 만들어낸 표현, 그것이 손을 뻗는 동작이고,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에게는 소설을 쓰는 것이다. 나에게는 소설 쓰기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그러나 표현되고자 하고 표현되지 않을 수 없는 지극히 사적인 아픔을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손을 내미는 동작이었다.
<소설가의 귓속말> 70p
중요한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절실한 것을 쓴다.
<소설가의 귓속말> 90p
일하기 좋은 날은 없다. 일하기 좋은 날은 놀기에도 좋은 날이기 때문이다. 일하기 좋은 날이 따로 없는 것은 그런 날 만 일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좋겠지만 그러면 안 되기 때문이다. 모든 좋은 날은 실은 놀기 좋은 날이다. 어떤 좋은 날도 글쓰기에 좋은 날일 수 없다. 어떤 시간도 글쓰기에 좋은 시간일 수 없다. 가령 밤은 글쓰기에 좋은 시간일까? 설마! 영화 보기 더 좋은 시간이고, 잠을 자기에 더 좋은 시간이고, 술 을 마시기에 더 좋은 시간이 밤이다. 글쓰기에 좋은 시간은 없다. 대개의 경우 글쓰기는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아니라 해야 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소설가의 귓속말> 98p
그러니까 진지한 작가는 글이 술술 잘 풀려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술 취한 운전자와 같은 상태에 있지 않은지 자기를 의심하고 자기 글쓰기를 돌아보아야 한다. 혹시 익숙해진 근육으로 쓰고 있는 것이 아닌지. 기술자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러일으켜진 것 없이, 없는데도 태연하게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만일 그렇다면, 그것이 가장 비참하다.
<소설가의 귓속말> 130p
이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 작가는 ‘나’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쓰기는 물론이고 읽기에서도 말이지요.
'나'를 발견하게 해주기 때문에 책은 중요합니다. '나'를 읽게 하지 않는다면 책을 읽을 이유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아니, 이렇게 말해도 되지 않을까요? '나'를 읽게 하지 않는 책을 도대체 왜 읽는단 말입니까? 책을 통해 '나'를 읽을 때, 나는 '나'를 통해 타인과 세상을 같이 읽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타인과 세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통해 읽는 사람과 세상만이 진실합니다.
<고요한 읽기> 7p
작가의 읽기와 쓰기는 모두 ‘나’를 통과합니다. 그것만이 진정한 읽기이고, 진실한 쓰기인 것이지요.
글쓰기는 내면을 꺼내는 일인 것 같습니다. 참다 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뱉어지는 ‘나의 무언가’이죠.
그래서 쓰는 과정이 고통인가 봅니다.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커다랗고 단단하고 때때로 날카로운 모양의 무언가를 물리적으로 꺼내려하는 일이니 말이지요. 하지만 괴로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해도 결국에는 ‘나의 무언가’이기에 글을 보고 애착이 생기기도, 나를 용서하기도, 뭉클한 감정이 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나의 무언가’인 글은 내가 읽은 것, 생각한 것, 경험한 것, 감각한 모든 것의 총체입니다.
이를 풍요롭게 하는 건 결국 내면을 넓히고, 내 세계를 확장하는 일이겠지요.
사유의 정수를 경험하고 싶은 분, 이 깊은 자의 (집요하고 치열한) 읽기와 쓰기의 과정을 엿보고 싶은 분이라면 분명 <고요한 읽기>와 <소설가의 귓속말>을 재미있게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글 쓰는 태도 외에도 살아가면서 경계해야 할 것들에 대한 본문의 구절을 가져오며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세계를 떠도는 나그네인 신호들을 맞아들일 기회가 줄어들고 불러일으키는 능력이 쇠퇴하는 것은, 나이가 아니라 감동의 실종과 관련이 있다. 웬만한 일에 흥분하거나 크게 설레지 않는 상태는 일상의 평온과 정신의 안정을 위해 유익하나 그 밖에 무슨 좋은 점이 있는지 의문이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라는 진리를 구체적으로, 그러니까 체험적으로 터득하고 나면 만사가 시들해진다. (...) 모든 것이 익숙하고 누구를 만나도 설레지 않고 무엇에 대해서도 기대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면 세계는 빛을 잃고 삶은 사물처럼 무미건조해진다. 비슷한 경험이 반복되면 유형화하여 틀에 가두려는 유혹이 찾아온다. 유형화의 과정을 통해 비슷한 것은 같은 것으로 규정된다. (...) 그러니까 요구할 것은 익숙해지지 않는 것, 섣불리 규정하고 넘겨짚고 유형화하고 관성에 넘어지지 않는 것. 벼르고 깨어 있는 것. (…) 모든 것을 지금 처음 접하는 것처럼 대하는 것. 모든 사람을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만나고 모든 소식을 처음 듣는 것처럼 듣는 것. 해질 무렵의 하늘이 나 특정한 방향으로 구부러진 나무의 자태나 골목길에 매달린 간판이나 그 간판에 덮인 먼지들이나 책상 위에 놓인 커피잔 바닥의 커피 찌꺼기나, 무엇이든 마치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처럼 경이로움을 가지고 보는 것. 그런 것.
<소설가의 귓속말> 131-13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