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글을 오래 써왔다 생각했습니다만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찾는 일은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남의 글(외주)만 써왔기 때문일까요?
경제적 결핍은 해결되었지만
내면의 결핍은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와중 은유 작가님이 쓰신 <글쓰기의 최전선>을 읽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난 ‘사유를 연마하고 감응하는 신체를 만들어 삶을 옹호하는’ 글을 쓰고 싶은 것이구나.
불투명하던 관념을 선명한 단어로 이름 붙여준 것이 얼마나 고맙던지요.
하지만 이것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사유를 연마하고 감응하는 신체를 만들어 삶을 옹호하는 글쓰기’가 하루아침에 되는 건 아닙니다.
사유 연마, 감응 신체, 삶 옹호… 딱 봐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 외유내강 단어들입니다.
그러해서 이제 시작입니다. 이런 글을 쓰기 위한 노력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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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쓰기란 무엇인지 은유작가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존재를 닦달하는 자본의 흐름에 익사당하지 않고 제정신으로 오늘도 무사히 살아가기 위한 자기 돌봄의 방편이자,
사나운 미디어의 조명에서 소외된 내 삶 언저리를 돌아보고 자잘한 아픔과 고통을 드러내어 밝히는 윤리적 행위이자,
이야기가 사라지는 시대에 이야기를 살려내고 기록하는 곡진한 예술적인 작업으로서의 글쓰기.
그게 돈이든 교양이든 지식이든 학점이든 스펙이든
앞뒤 돌아보지 않고 쌓고 축적하고 평가받기 바쁜 세상에서,
왜 그런 것들을 가져야 하는지 잠시 멈추어서 사유하고 따져 묻는 자리가 되어주는 글쓰기 말이다.”
모든 글쓰기는 내면의 산물입니다.
좋은 글쓰기는 노력의 산물일테고요.
매번 느꼈지만
요즘 또 한번 절감하는 것은
글쓰기에 왕도란 없다는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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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에서 밑줄쳤던 문장 일부를 소개합니다.
18p
무엇에든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자가 어디에도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법이다.
50p
글쓰기는 삶의 지속적 흐름에서 절단면을 만들어 그 생의 장면을 글감으로 채택하는 일이다.
84p
내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저자의 의도에 맞추려 낑낑대지 말고 자기 삶의 구체적인 정황을 떠올리고 접목시키면서 ‘주관적’으로 읽어달라고 했다. 이게 생각보다 어려운 모양이다. 지식 따로 생활 따로의 교육 풍토 탓일 게다.
124p
자기의 입장에서 구성한 상식, 내가 본 것에 대한 기록이다. 그래야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글, 그 사람만 쓸 수 있는 고유한 글이 나온다.
128p
뛰어난 관찰자여야 한다. (…) 평범한 대사에서 비범한 그 무엇을 찾아내는안목,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비틀어 보고 뒤집어 생각하는 훈련이 요구된다.
131p
이 세상에는 나보다 학식이 높은 사람, 문장력이 탁월한 사람, 감각이 섬세한 사람, 지구력이 강한 사람 등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많고도 많다. (…) 이미 훌륭한 글이 넘치므로 나는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내 삶과 같은 조건에 놓인 사람,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 나의 절실함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169p
벤야민은 이렇게 말했다.
“좋은 산문을 쓰는 작업에는 세 단계가 있다. 구성을 생각하는 음악적 단계, 조립하는 건축적 단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짜 맞추는 직물적 단계다.”
음악적 단계는 대략적인 글의 주제와 톤을 정하는 게 아닐까 싶다. 실연당한 이야기를 덤덤하게, 혹은 청년 실업의 이야기를 밝게 써볼까. (…) 조립하는 건축적 단계는 레고 블록처럼 생각과 정보를 모아놓는 것이다. 직물적 단계는 별자리를 연결하듯 촘촘히 이음새를 엮고 모양새를 지어 완성하는 것이다.
174p
계몽, 곧 도덕적 마무리는 위험하다. 상황을 단순화시켜버린다. 감정을 평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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