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 노바디일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

김영하,《여행의 이유》리뷰 - 내 첫 유럽여행의 기억

by 별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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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나는 특별한 존재가 되기를 바랐지만, 나의 인종이나 국적에 따라 ‘특별하게’ 분류되고, 일단 분류된 이후에는 사실상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경험은 그전까지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여행자는 낯선 존재이며, 그러므로 더 자주, 명백하게 분류되고 기호화된다. 국적, 성별, 피부색, 나이에 따른 스테레오타입이 정체성을 대체한다. 즉, 특별한 존재(somebody)가 되는 게 아니라 그저 개별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여행자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자’, 노바디nobody일 뿐이다.
- 김영하, <노바디의 여행>, <<여행의 이유>>, p.155.

*연관곡: Sting - Englishman in New York

I'm an alien, I'm a legal alien. I'm an Englishman in New York.


뉴욕에 간 영국 남자도 스스로를 'alien'이라고 느끼는데, 유럽 땅에서 홀로 아시아 여자였던 나는 오죽했을까.

스무 살 첫 유럽여행에서, 나는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변방의 끝에서 온 이방인이 된 기분을 느꼈다.


“How much? (얼마야?)”

“Pardon? (뭐라고요?)”

남자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나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고 되물었다. 잠시 두 귀를 의심을 했다. ‘얼마냐고? 대체 뭐가?’

“Fifty euros, OK? (오십 유로, 어때?)”

스무 살의 첫 유럽 배낭여행. 벨기에 브뤼셀의 길 위에서 만난 중년의 백인 남자는 능글능글한 웃음을 띄운 채 태연하게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머리로 채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나는 목소리를 떨기 시작했다.

“No, NO… I’m not a prostitute. (나는 매춘부가 아니에요.)”

남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골목 끝을 향해 잰걸음을 걸었다. 화창한 대낮이었는데도 왜 브뤼셀의 그 골목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없었을까.

“Why, Asian girls are pussy*. (왜, 아시아 여자들은 헤프잖아.)”

단호하게 거부하는 나에게 조롱 섞인 말까지 덧붙이며 남자는 나를 집요하게 따라왔다. 나보다 키가 머리 두 개는 더 큰 그가 혹시 나에게 물리력을 행사할까봐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너무 당황한 탓인지 힘껏 내달려 도망칠 수도 없었다. 다행히도 골목 끄트머리까지 내 뒤를 쫓아오던 그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광장에 다다르자 슬며시 발걸음을 돌렸다.

*남자는 영어를 잘 못했다. 'pussy'는 여성 성기를 뜻하는 말이지만, 직역하기 싫으니까 '헤프다' 정도로 의역한다.


브뤼셀에서 가장 큰 광장, 그랑플라스에는 광장 주위로 빙 둘러앉아 여유롭게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사람들 무리를 비집고 광장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자, 그제야 눈물이 터져나왔다. 위험을 모면했다는 안도감과 난생 처음 당해보는 취급에 대한 모멸감과 설움, 분함이 뒤섞인 눈물이었다. 손등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나는 여행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집을 그리워했다.

‘한국이었어도 이런 일을 당했을까.’

나는 내 고향 땅에서 ‘얼마에 네 성(sex)을 살 수 있느냐’는 따위의 모욕적인 발언을 듣는다는 걸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다.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단순히 여자로서 성희롱을 당했기 때문에 느끼는 모멸감 이상이었다. 한국에서도 성희롱은 당할 수 있지만, 방금 전 나에게 일어난 일은 내가 ‘아시아에서 온’ 여자이기 때문에 겪은 ‘인종차별 + 성희롱’의 느낌이 강했다. 평생을 나와 같은 피부색을 가진 한국인들 사이에서 살아오며, 인종이라는 측면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주류’에 속했던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험한 인종차별이었다. 모두가 커피나 맥주를 마시며 행복하게 햇살을 쬐고 있는 가운데 혼자 우두커니 앉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으니 곧 주위에서 의아해 하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저들끼리 속닥거리는, 내가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들 사이로 ‘취나, 취나(중국 여자)’라는 단어가 귀에 꽂힌다. 젠장, 이 백인들의 땅에서 나는 광장에 와서도 맘 편히 군중 속에 섞일 수가 없었다.


사회 내의 주류가 아닌 소수자 그룹에 속한다는 것은 몸소 겪어보면 꽤나 외롭고, 서럽고, 성가신 일이다. 한국땅에만 살면서 스무살이 되도록 알 길이 없었던 그 느낌을 나는 두 달간의 유럽 배낭여행, 그리고 그 이듬해에 떠난 1년간의 교환학생 생활을 통해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백인이 대다수인 동네에서 이질적인 외모의 아시아인은 눈에 띄기 때문에 무리 속에 위화감 없이 녹아들 수 없었고, 낯선 존재이기 때문에 선입견에 지배받았다. 예비 작가이자, 사회주의 운동 경력이 있는, 예리하고 복잡다단한 내면을 지닌 스물다섯 청년 김영하가 유럽의 기찻간에서는 그저 아시아인 남성이라는 이유로 ‘너디(nerdy)하고 무해한 존재’로 손쉽게 규정되었듯, 나 역시 유럽 사회에서는 한국에서 유지해온 나만의 정체성이나 개별성을 인정받기 어려웠다. 아시아인 또는 아시아인 여성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은 내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고, 서글프게도 그들의 머릿속에 있는 스테레오타입은 내 입장에서 썩 유쾌하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김영하처럼 이름만 대면 알만한 베스트셀러 작가도 아니건만, 나는 내가 고국에서 쌓은 알량한 업적에 대해 마음 한 편에 ‘부심’이라도 있었던 걸까. 상대방이 나를 ‘이제 좀 살 만해진 개발도상국에서 유행을 좇아 유럽 구경을 온 아시아인 관광객’ 또는 ‘백인을 좋아하는 수동적인 아시아 여자’로 바라본다고 느낄 때마다, 나는 굳이 자존심 상한 티를 내며 그의 선입견이 틀리다는 것을, ‘나는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했다.


이튿날, 나는 모욕당한 기분을 완전히 떨치지 못한 채로 암스테르담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내 기분이야 어떻든 기차는 목적지를 향해 무심히 달렸고, 두 시간 남짓이 지났을 때 나는 암스테르담 중앙역에 도착해 있었다. 예약해둔 역 근처 호스텔을 향해 모퉁이를 두어 번 돌았을까, 눈앞에 불쑥 낯선 광경이 펼쳐졌다. 붉은 불빛으로 가득한 쇼윈도 너머로 구릿빛 피부의 여자들이 속옷 차림으로 서 있었다. 여행 책자에 암스테르담의 대표적인 ‘볼거리’로 소개된 홍등가가 이렇게 숙소와 가까울 줄이야. 대놓고 쳐다봐선 안 될 것 같은 마음과 궁금한 마음이 동시에 들어, 길을 지나는 동안 소심하게 쇼윈도 뒤편을 곁눈질했다. 네덜란드의 홍등가라고는 하지만 골목에 있는 성매매 여성들은 대개 백인이 아닌 중남미 계통으로 보이는 유색 인종이었다. 아슬아슬한 옷을 입고 유혹하는 듯한 자세로 서 있는 여자들을 눈앞에 마주하니, 전날 길에서 성매매를 제안당한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도대체 그 남자는 뭘 보고 나를 매춘부로 생각한 걸까’라는 생각에 이르렀을 때, 나는 멈칫했다.


나는 스스로 평등주의자라고 생각했다. 필리핀 여행 중 현지인 가이드가 어린 나이에 좋은 리조트에 머물며 여행을 즐기는 언니와 나를 은근히 부러워했을 때, 나는 혹시라도 그녀가 우리 때문에 상대적 박탈감이나 위화감을 느낄까봐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다. ‘우리가 필리핀보다 상대적으로 부유한 나라에서 왔다는 사실을 굳이 티내지 않도록 조심하자’고 다짐하면서 나는 스스로가 나름 사려 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그런데 나는 한국보다 덜 부유한 국가의 사람들,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에 대해 우월감을 표하기도 싫었지만, 동시에 그들과 하나의 카테고리에 묶이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나에게 ‘얼마냐’고 묻던 남자에게 내가 눈물 날 만큼 모멸감을 느낀 이유 중에는, 인간으로서, 여자로서, 내가 ‘돈으로 살 수 있는 존재’로 취급되었다(동등한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했다)는 데에서 오는 합당한 분노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는 유럽사회에서도 분명 낮은 계층에 속하는 성매매 여성들과 구별되지 못했기 때문에 내심 불쾌했던 건 아닐까. ‘나는 돈으로 성을 사겠다는 제안에 흔들릴 만큼 가난하지 않고, 우리나라에서 나름 고등교육을 받은 대학생인데, 나를 고작 성매매 여성으로 취급하다니.’같은 생각을 한 건 아니었을까. 평등주의자라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 속으로 사람의 ‘급’을 나누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머릿속이 조금 혼란스러웠다.


여행지에서 이방인이 되는 경험은 때로 자기 자신의 낯선 면모를 발견하게 한다. 익숙한 일상의 공간에서 벗어나 나를 ‘노바디’로 바라보는 시선에 둘러싸일 때, 나는 내 안에 의외의 애국심이나 용기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하고,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부끄러운 이중성과 차별의식을 마주하기도 한다. 여행을 통해 문제를 단번에 뿌리뽑을 순 없지만, 적어도 내가 지닌 문제의 존재를 인식하고, 앞으로 나의 모순을 바로잡아보자는 다짐 정도는 하게 된다. 내가 자꾸만 여행을 결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 낯선 나라에서 이방인이 되는 일은 고되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스스로의 새로운 면을 또 하나 찾아내고, 집에 돌아가서는 좀 더 나은 인간이 되리라 마음 먹곤 한다. 우리 각자의 삶이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소설이라면, 여행은 그 소설의 배경을 바꾸는 일이다. 스스로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고 느낄 때, 나 자신이 영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나는 비행기 티켓을 사고, 삶의 배경지를 바꾼다. 소설의 주인공을 교체할 수는 없어도, 돈과 연차를 쓴다면 배경지 정도는 바꿀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흔히 소설 속 인물들이 그렇듯, 새로운 장소에서 낯선 사건들에 부딪히다 보면 전보다 한 뼘 더 성장한 인간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휩싸인다. 내가 매년 여행에 기꺼이 투자하는 시간과 돈에는, 그런 희망을 구매하는 비용도 분명 섞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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