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과 비종교인의 연애

우리 세상의 교집합은 어디에

by 간호사K

나는 종교를 가진 누군가에게 욕심이 날 때, 비종교인으로서 스스로 느낄 소외감이 무섭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 그 밖에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고 집단적 성격을 가진 수 많은 종교들 그 무엇이든.​


왜냐하면, 그는 교인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종교의 사람들과 유대감이 있다. 공통의 경험, 가치, 믿음이 있고 이를 지속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정기적인 만남과 활동을 계획한다. 유기적으로 인간관계가 얽매여 있고, 서로 도우며 사는 삶을 표방하다보니 그 맺음이 끈적하다.

종교 활동을 하는 오빠를 이해하기 위해, 대학 시절에 일부러 친구 따라 교회에 가본 적이 있다. 간호학생 특강이라 해놓고 결국은 교회 선교 목적으로 멘토링을 했던 선생님께도 질문을 던지고 싶어 몇 번 만났다. 찬송도 듣고 설교도 듣고, 믿음에 대한 이야기도 나눠 본다.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읽으며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이어령 작가님이 어떻게 영성으로 이끌렸는지 이해하려고도 해봤다.

“이 모든 게 주님의 뜻이다. 나를 인도해주시는 주님께 감사하다.”는 친구의 평온한 미소를 보면서 믿음의 배경을 가진 자의 안정감을 느꼈다. 고독한 세상에서 무언가 믿고 의지할 곳이 있다는 것, 같은 믿음을 공유하는 이들이 곁에 있고 서로 이 믿음을 강화한다는 것, 그 믿음을 바탕으로 서로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받기도 하여 협동공동체로 기능하는 것의 장점들에 대해 생각했다. 생의 고난과 역경에서, 불안과 분노에 대처하는 능력이 남다를 수 있겠다 싶었다. 나를 초월한 큰 의지, 큰 뜻이 있다면 이 작고 사사로운 고민과 실패가 무슨 소용이랴.

단체에 대한 요구가 많은 종교 이야기다. 종교로서 기능하고 지속하기 위해서는, 단체 활동이 기반이 되긴 해야 한다. 사람이 모여야 활동도, 성금도, 자원봉사도, 믿음의 실천도 가능하다. 그래서 자꾸만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종교 행사에 참여하는 오빠를 보면 뺏기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서운해하지 않으려 하지만 서운하고, 섭섭하고, 소외감을 느낀다. ​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자유는 견디기 어려운 고독과 통렬한 책임을 동반한다.’고 주장했다. 개인과 사회는 자유가 요구하는 고독과 책임을 받아들이면서, 더욱 자신다운 삶을 살기 위해 정신력과 지식을 갈고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선택에 많은 것을 내맡긴 자유로운 사회이기 때문에 더욱 어깨가 무거워진다. 그렇지만 개인을 누가 지켜줄 수 있는가? 자유로부터 도피한 사람들은 권위에, 종교에 의지하기 쉽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나를 내던지고 누군가에게 나를 의지하는 것보다, 자아에 대한 인식과 믿음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무리 믿음을 가지려고 해봐도, 초월적 가치와 신념에 쉽사리 마음을 열지 못한다. 비종교인으로서 종교가 주는 정서적 혜택은 누리지 못하지만, 그래도 나는 내 삶의 모든 선택과 고통을 짊어지고 가겠다는 의지와 자신이 있다. 삶과 자연의 신비로움에 대해 온전히 바라보고 감탄하며 체화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


오빠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을 희생해 시간과 노력을 쪼개며 종교와 나를 둘 다 잡지 말라고, 나는 이야기한다. 이야기하며, 나는 오빠의 손을 잡는다. 내게 종교는 내 일상을 채우는 사람들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