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박마차 Apr 06. 2021

캐나다 회사 생존기 #마지막

직장인의 생존기는 계속된다.

남편과 나는  같은 회의실 안에서 같은 사람에게 동일한 최후통첩을 받았지만 반응은 완전히 달랐다. 사인해야 할 서류를 앞에 두고 할 말은 많았지만 서툰 영어로 게다가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내 생각을 침착하게 말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안토니오와 나는 점점 감정적으로 날 이 선 채 대화를 이어 나갔고 더 이상 이 싸움이 의미가 없다고 느껴진 순간 나는 신경질적으로 서류에 사인을 하고 회의실을 나왔다. 자리에 앉아 있는 남편을 불러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우리 둘 한테만 저 서류를 줬을까?]
나는 여전히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같은 자리를 왔다 갔다 서성이며 남편에게 물었다.
[모르지. 우리 둘 에게만 줬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남편은 서류를 앞에 두고 침착하게 안토니오의 이야기를 경청한 뒤 사람 좋게 웃으며 사인을 했다고 했다. 그의 말을 듣고 입이 떡 하니 벌어졌다.
[우리 쫓아내려고 만든 서류를 앞에 두고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더럽고 치사해도 지금은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되니까. 다른 회사로 가기 전까지 회사를 지금 당장 그만 둘 생각이 아니라면 어찌 됐던 매일 마주쳐야 되는 사람이잖아 괜히 얼굴 붉혀서 좋을 게 뭐가 있겠어. 너 또 폭발했지?]
남편의 말을 듣자 더 속이 상했다. 왠지 그놈 술수에 제대로 놀아난 것 같아 더 화가 났지만 남편이 하는 말이 구구절절 옳았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나 역시 곧 안토니오에게 고개를 숙이고 한 발 물러나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과 나는 말이 없었다.  도움될 것 없는 기억을 떨쳐버리려 애썼지만 마음은 자꾸 그 회의실에 있던 시간으로 되돌아 가기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그날 밤 나는 내키지 않는 마음을 달래며 책상 앞에 앉아 침착하게 회의실에서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내 생각을 영어로 노트에 적어 내려갔다.

 아침에 출근을 하자마자 안토니오의 자리로 가서 면담을 요청했고 그는 나에게 15분을 주겠다고 선심 쓰듯 말했다. 회의실에 앉아 대화를 시작하며 나는 그에게 어제 감정적으로 행동한 것에 대해 정중히 사과했다. 그의 양해를 구한 후 메모한 노트를 보며 어제 하지 못했던 말들을 하나씩 전달했다. 바짝 자세를 낮춘 채 앞으로 더 나은 모습을 보이겠다고 약속했다.  나의 사과를 받은 그의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지며 15분 면담은 훈훈하게 끝이 났다. 자리에 돌아와 앉는 나를 보며 남편은 안쓰러운 격려의 눈빛을 보냈다. 여기까지 보면 우리의 고조되었던 갈등은 눈 녹듯 사라져 앞으로 행복하고 보람찬 회사 생활을 하게 될 것처럼 보였겠지만 천만의 말씀!!!
깨진 그릇은 붙여 봐야 깨진 그릇 일 뿐이다.

또 다른 회의를 위해 회의실로 향하는 안토니오의 기세 등등한 뒷모습을 서늘하게 쳐다보고 있을 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다른 회사의 인사팀에서 온 전화였다. 재빨리 핸드폰을 들고 비상구 계단으로 뛰어갔다.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이렇게 완벽한 타이밍에 연락이 왔다고? 그쪽 회사에서 입사를 위해 뭘 시키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절박함에 핸드폰을 든 손에서 땀이 났다. 예상했던 대로 그쪽 회사에서 아트 테스트를 요청했고 나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테스트를 하다가 쓰러지는 한 이 있더라도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내고 말겠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그렇게 이틀 후 메일로 테스트 내용을 받았고 뼈와 살을 갈아 넣어 테스트를 마쳤다. 회사 쪽에선 일을 하고 있는 상태로 테스트를 하는 상황을 이해한다며 원한다면 얼마든지 시간을 주겠다고 말했지만, 최대한 이직 프로세스를 단축시키고 싶었기 때문에 1 주일 후에 테스트를 제출했다. 몸무게가 2kg 조금 넘게 빠져 있었다.

테스트 결과를 기다리는 며칠 동안 나와 남편은 말 그대로 피가 말라갔다.
[그래도 너는 테스트라도 했고 희망이 있지. 난 어쩌냐......]
[내가 만약 이 회사로 이직한다면 회사 일단 그만두고 다른 회사 알아봐. 한 명이라도 일 하고 있으니 괜찮아.]
나는 호기롭게 말했지만 아직 결과를 모르는 상태에서 이런 가정이 무슨 소용이겠냐 싶어 곧 팔다리에 기운이 빠졌다. 우리는 틈만 나면 이런저런 시나리오를 상상해 보며 어떻게 하면 이 곳을 하루 라도 빨리 빠져나갈 수 있을지 궁리를 거듭했다.

그러는 사이 안토니오와의 사이는 점점 더 악화되었다. 나는 그 와의 얼굴을 마주치는 것조차 싫어 멀리서 그의 모습이 보이면 외면한 채 다른 쪽으로 돌아갔고 그는 계속해서 내가 한 작업에 트집을 잡았다. 왜 그렇게 작업을 했는지에 대해 설명을 해도 그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단 하나,
[프로젝트의 콘셉트와 맞지 않아!]
였다. 그야말로 사람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래도 테스트 결과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연락을 주겠다고 약속 한 날짜까지 기다려도 답이 오지 않았다. 기다리는 동안 메일을 하루에도 몇십 번씩 체크했다. 금요일 오후 퇴근할 시간까지 기다리는 답이 오지 않자 절망감에 휩싸였다. 결국 그날 퇴근 후 집에 와서 점심에 먹은 음식을 모조리 토 해 냈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주말을 잘 버텨 낼 자신이 없어 더 늦기 전에 담당자에게 문의 메일을 보냈다. 이미 퇴근을 했을 시간이고 답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도 없었지만 초조해 미쳐 버리더라도 할 수 있는 걸 하고 미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30분쯤 후 새 메일 알람이 울렸다. 나와 남편은 누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메일을 읽기 시작했다. 테스트 결과는 합격!이었다. 추 후에 남은 일정이 남아 있었지만 테스트를 합격하면 입사까지 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행복하고 느긋한 주말을 보내고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안토니오에게 가장 먼저 퇴사 소식을 알렸다. 당황하는 그의 얼굴 표정을 보며 내가 지금 얼마나 기쁜지 노래라도 부르고 싶었지만 아직 남편이 언제까지 더 근무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므로 이번만큼은 꾹 참기로 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이틀 후 혼자 남겨 지길 쓸쓸해하던 남편 역시 다른 회사로 이직 제의를 받았다. 속전속결로 입사가 결정되고 나와 남편은 극적으로 같은 날 퇴사를 하게 되었다. 퇴사 당일 나는 안토니오에게 받았던 최후통첩을 곱게 4 등분으로 찢어 쓰레기통 맨 위에 보란 듯이 올려놓고 팀원들과 인사를 한 후 남편과 함께 환하게 웃으며 회사를 나오게 되었다.



캐나다 회사 생존기는 이번이 마지막 에피소드입니다. 남편과 저는 그때 이직한 회사에서 현재까지 만족하며 직장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 급하게 마무리를 지었지만 그래도 한 주제를 가지고 한동안 꾸준히 썼다는데 나름 만족하고 있습니다. 많이 모자란 글을 찾아와 읽어 주시고 좋아요를 눌러주시고 댓글도 달아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또 감사드립니다. 그런 관심이 없었다면 이 에피소드들을 마치지 못했을 거예요. 그럼 다음 주에 다른 주제로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캐나다 회사 생존기#1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