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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마차 May 21. 2021

딸 들의 연대기

엄마의 불행을 먹고 자란 딸

엄마의 아빠, 외할아버지는 엄마가 초등학교 때 돌아가셨다고 했다. 나와 동생은 외할머니댁 벽에 걸린 사진으로 외할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외할머니는 손주들을 몹시 귀여워하셨고 나라에서 지원을 받을 정도로 없는 살림이었지만 본인이 일을 하시며 버는 돈을 조금씩 모아 두었다가 손주들이 가면 그 돈을 아낌없이 쓰셨다. 떼를 쓰고 어리광을 부려도 다 예뻐하시며 보듬어 주시는 외할머니 때문에 어렸을 적 외할머니 댁에 가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었다. 나중에 제법 머리가 크고 나서 외할머니가 동시대의 여느 어르신들처럼 남존여비 사상을 불변의 진리로 믿고 계시는 분이라는 걸 알았어도 나는 여전히 외할머니를 사랑했다. 어린 시절 나를 포근하게 조건 없이 안아주시고 머리며 얼굴에 뽀뽀를 해 주신 유일한 내 주변의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좀처럼 본인의 과거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종종 분노에 찬 목소리로 본인이 외할머니 때문에 얼마나 힘든 유년시절을 보냈는지 중얼거리셨다. 외할머니는 어린 엄마에게 거의 매일 욕설을 퍼부었으며 어서 일을 해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라고 내몰았다고 하셨다. 위로 언니 아래로 남동생이 있었던 엄마는 본인이 형제들 중 가장 부당한 대우를 당했으며 그런 현실이 싫어 도망치듯 아빠에게 시집을 왔다고 하셨다. 아빠의 직업이 공무원이었으므로 안정적인 직장 덕에 적어도 끼니 걱정은 없이 살겠구나 싶은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도피처라고 생각한 결혼생활은 만만치 않았고 엄마 예상대로 정말 끼니 걱정 없이 살 정도로의 살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빠는 말 많고 탈 많은 무려 9남매의 장남이다. 시골에서 홀로 농사를 지으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하물며 장남 결혼식에 단칸방이라도 하나 마련하라고 전세 자금이라도 턱 하니 내주시겠거니 꿈을 꾸었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월세로 신혼살림을 시작하며 어렵게 모은 돈으로 간신히 전세 자금을 마련했지만 그 마저 사기를 당해 전세돈을 홀랑 날려 버렸다. 


살면서 누구나 크건 작건 수많은 불행과 마주한다. 행복한 시간은 찰나 일 뿐이다. 매일이 너무나 행복한 사람은 그야말로 정신 승리자이며 복 받은 인생이다. 왜냐면 인생은 대부분이 고난이고 잠깐의 행복을 위해 그것을 견뎌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엄마에게 뜻대로 되지 않는 고된 인생살이는 모두 다른 사람의 탓이었다. 공부를 더 하지 못한 것도, 아빠와 결혼한 것도, 가난한 것도, 행복하지 못한 것도....... 그렇게 나는 엄마의 불행을 먹고 자랐다. 


부모님은 빠듯한 살림에 나와 동생이 대학까지 공부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해 주셨고 몸이 아프면 밤 새 곁에 있어 주셨다.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집을 마련해 주셨고 세 끼 따듯한 밥을 먹게 해 주셨다. 부모님은 부모님의 책임과 의무를 다 하셨다. 자식이 없는 내가 부모님이 자식을 위해 한 것들이 얼마나 힘들고 대단한 것이 었는지를 논한 다는 것이 애초에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잘 안다. 나는 그 입장이 되어보지 못했으니까. 그렇지만 결핍과 불안에 시달렸고 그것들은 성인이 후에 나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불편하고 어색했고, 정서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했으며, 강박과 우울에 평생을 시달리고 있다. 나이 40의 문턱을 넘으며  나는 내 평생을 괴롭혀 왔던 그것과 드디어 마주 할 수 있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의 충격은 생각보다 격렬했고 오래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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