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탓이 아니란 걸 인정하자.
나는 늘 부모님의 이혼이 그리고 우리가 단란한 가족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나에게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느꼈다. 부모님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을 때 엄마는 나에게 자주 이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때의 나는 어렸지만 이런 중요한 문제를 나에게 묻는다는 것에 한껏 고무되어있었다. 게다가 가장 인정받고 싶어 하는 대상으로부터 그 사람의 고민을 나눈다는 것 자체가 내가 인정받고 있다는 좋은 징조로 보였다. 아마도 엄마는 이미 마음속으로 이혼을 결심해 놓았지만 매 순간마다 자식들이 마음에 걸려 내렸던 결정을 수도 없이 포기하고 다시 마음먹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부모님의 관계가 애초부터 나빴던 것도 아니었고 집안 분위기가 이렇듯 적막하고 건조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나와 동생이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은 믿기 어렵겠지만 늘 웃음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주말엔 텐트를 가지고 강으로 산으로 캠핑도 가고, 놀이동산도 가고 집안 살림이 넉넉하진 않았지만 아빠의 월급날이 되면 한 달에 한 번씩 읍내 작은 경양식집에 가서 돈가스며 함박 스테이크를 썰며 기분도 내곤 했다. 언제부터 그리고 무엇 때문에 둘 사이의 균열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 졌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몇 가지 큰 사건들이 있었지만 나는 그것이 누구의 잘못인지 지금은 판단하기가 어렵다.
예전에는 다툼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다 파악하고 있고 그 분석이 옳다고 믿었지만, 나이가 든 지금 기억들을 더듬어 보니 나의 그런 행동들이 실소를 자아 낼만큼 어리석고 유치했다.
가족 안에서 행복했던 기억들이 다 지워져 버릴 만큼 부모님의 관계는 회복 불가능할 것이라고 확신했던 나는 더할 나위 없이 일관적으로 엄마의 이혼 결심을 지지했다. 아빠는 어떻게든 이혼만은 막고 싶어 했지만 어렸던 나는 이지경이 되었는데 서류상으로 부부인 게 대체 무슨 소용이냐 싶어 아빠의 고집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계속 서로의 발목을 붙들고 상처를 내며 남은 인생을 사는 게 의미 없고 잔인해 보였다.
결국 부모님은 별거에 들어섰고 한 밤 중 쫓기듯 간단한 짐만 챙겨 집을 나서는 아빠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며 가슴이 찢어지듯 아파 한참을 울었다. 나와 동생이 10 대 때 일이었다. 그렇게 둘은 과거를 뒤로 하고 다른 시작을 할 수 있을 듯 보였다. 최소한 같은 공간에 붙어 있으면서 싸우며 불행해 하진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엄마는 아빠와의 별거 이후 더욱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아빠는 별거가 일생의 수치며 실패한 인생의 증거라도 되는 양 모든 걸 포기한 채 술만 마셔댔다. 그리고 나와 동생마저 본인의 인생에서 밀어내기 시작했다.
둘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쉽지 않았고 나는 점점 어떻게든 이런 상황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바로 잡을 수 있을까 고심을 하고 스스로 질문을 퍼부어 봤지만 결과는 같았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 더 답답했다. 부모님이 방황하는 모습에 화가 나고 원망스러웠지만 내가 직장을 잡아 일을 시작하면서 분노는 연민과 죄책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말할 수 없이 안쓰럽고 할 수만 있다면 이 모든 갈등을 내 힘으로 없애버리고 치유하고 싶었다. 아직 나이도 어리고 이제 일을 막 시작했으니 나에겐 아직 가능성이 무한하다고 순진한 생각을 했다. 직장 때문에 서울로 올라 와 남의 집 지하 작은 단칸방 하나를 빌려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친한 친구의 빚보증을 잘못 서 전재산을 날린 아빠의 빚도 갚아 주고, 매일 돈이 없어 불행하다는 말을 달고 사는 엄마에게 넉넉한 생활비를 준다면 둘이 다시 함께 할 수는 없더라도 조금은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겼다. 내가 열심히 하면 나 하나 희생해서 가족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라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