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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금이 있던 자리 Aug 29. 2024

여름이었다

오프라인 피드백 모임 후기 : 성은, 지수, 지원

** 오프라인 피드백 모임 7 : 성은, 지원, 지수, 상덕  


안녕 친구들(그리고 누나), 오늘이 우리 마지막 공식 모임이었네. 비록 우리 말 놓지 않았지만, 내 영감이 짚어 겨누는 바 어떤 서간의 무드를 위해 부러 반말로 진행하겠습니다. 아직 빨간 버스 안에 앉아 먼 길 정처 없을 여러분보다 먼저, 나는 고민을 시작하니다. 무엇으로 추억할지를 나는 생각한다. 오늘 모임 내내 이야기했지만, 이 기억의 책갈피를 무엇으로 짚을지 고민이 깊다. 그리고 밤은 따라 깊어지지. 


우리 여름 내내 이야기해온 바로 그것, 글 씀이란 밤이 깊어만 가는 것에 마찬가지로, 그저 백지 앞에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에 지나지 않음이니. 실지 쓰는 것은 그를 위해 그저 멀거니 떠나보낸 시간의 반의 반절도 되지 않을 거야. 그러므로 나는 지금 백지 앞에 멍하니 앉아있다, ‘무엇으로 우리의 순간을 헌정할거나.’ 언제나 글 씀에 있어 가장 기대되고 초조한 순간은 바로 이 순간. 아무리 많이 써왔어도 이 시작하는 순간의 긴장감은 사그라지지 않을 거야. 


나는 생각을 이리저리 굴려보다간 오늘 낮을 떠올린다. 바보같이 약속 시간을 헷갈려서 떠버린 시간을 알라딘에서 보내고 있었다. 무의미의 축제를 찾아 꺼내 읽고 있었다. 아, 강남 알라딘은 무척이나 더웠다. 등줄을 타는 땀이야 대수겠느냐마는 책을 든 손, 팔뚝을 따라 굴러내리던 땀방울의 이상야릇한 감각이 퍽 기억에 박혀있다, 아직 선명한 걸 보면… 발치에 땀방울이 선명히 떨어졌고, 그 흔적 위로 나는 아직의 여름을 생각했다. 처서가 지났으니 곧 가을일 줄 알았더니마는, 오늘 낮까진 아직 무더웠음을. 즉 오늘에 이르른 우리의 시간은 초여름에서 늦여름으로, 여름 안에서 마쳤다는 뜻이다. 미치어 생각해보니 것 참 수상한 여름이었다. 아마 다음 주면 거짓처럼 농담처럼 찬 바람이 불어줄거나, 혹은 소설처럼. 


그대들에게 여름은 무엇일까. 나는 내 작년 여름을 생각한다. 하지만 기억이 소상 날 리가 없어 아트인사이트를 뒤적인다. 23년 여름에는 나 무슨 글을 썼나. 어떤 생각을 안고서 삶은 시절을 지나가고 있었던가, 들춰보니 짜-잔, 아무 글도 쓰지 않았네. 하하하하하. 왜 이런 실없는 소리를 늘여뜨렸냐면 내게 여름이란 늘상 그런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유일한 계절. 


나는 그때 그 시간 속을 무엇으로 헤매이며 걸었나. 그건 기록되지 않아 영영 사라진 기억이다. 하지만 거기 비어있는 기고 일자의 간극 사이엔, 여느 때와 같이 여름에 휘청이는 내가 있었을 것이다. 언젠가 글에서 한 번 써먹었던 소재 같은데, 나는 여름이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마치 이방인에서 열사 아래 뫼르소의 인지와 감각이 휘발되어버리던 것처럼, 내 안엔 거나히 타오르는 아지랑이 같은 아뜩함만이. 의식에 빛이 내리쪼이면 나는 허덕이고, 사념은 소산하는 날벌레처럼 자취를 감춰 드디어 나는 고요하게 존재할 수 있다. 그렇게나 와글거리던 사념이 열사 아래 싹- 걷혀버리니 드디어 나는 글 쓰지 않고 존재할 수 있다. 


나는 멍하게 그 시간을 보낸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붙잡지 못해서 그 시간은 떠나버린 것이다.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기억되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증발하기에. 떠나버린 시간은 마치, 불에 타 구멍이 나버린 편지와 미처 인화되기 전에 볕을 쐐버린 필름같이, 하얗게 사라진다. 기억이 서서히 인화되어 필름 위에 여물어 오르기에는 여름 볕이 너무 셌다. 나는 진 그늘을 찾는 지렁이처럼 치열하게, 그저 존재한다. 그리고 가을바람이 불며 돌아올 내 동공의 초점 아래, 의식에 세드는 상념과 함께 나는 새로이 한 해를 시작한다. 그럴 땐 언제나 여행을 생각한다. 다시 글을 써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질문, 그대에게 여름은 무엇일까. 




여름 행궁동은 무더운 만큼 아름답거나, 아름다운 만큼 무덥다. 여름에 바깥출입을 잘 하지 않아서 그렇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 년 래 가장 빨갛게 타는 노을이 갈빛 단청마루를 짙게 비추었다. 낯선 풍경이었다. 첫 만남에서 조금 일찍 도착한 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여름이 끝나가는 지금, 나는 세 번을 더 읽고도 아직 그 책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것 참 책갈피 삼을 만하지만 ‘참을 수 없는’, ‘존재’, ‘가벼움’ 개중 어느 단어로도 우리 모임에 맞물리는 게 없어 안타깝고도 기쁘다. 그런 게 맞물리는 모임은 대중 어딘가 서슬 퍼런 것이었을 테다. 반하여 우리는 정말 여름이었거든. 


우리는 시종 차분하고 나긋했다. 그게 어떤 여름의 모습일지 나는 생각한다. 언제나처럼, 나는 영감이 짚이는 대로 먼저 생각을 짜맞춰 두곤 이유거리들을 찾아 나선다. 그늘일까, 아니면 소나기일까. 세 번째 만남이 있었던 7월의 혜화엔 소나기가 퍼부었다. 비로도 식지 않는 열기가 아스팔트를 튕굴렀다. 적당한 카페로 도망치듯 들어서, 커피를 하나씩 시켜두곤 우리는 이야기한다. 차창 밖으로 비가 더욱 쏟아진다. 적당히 멀리서 들리는 쏴-하는 소리. 





소나기는 차창 안쪽에서 보아야 제맛이다. 달리 말해 창 하나를 두고 멀찍이 보아야 아름답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좁은 우산 안에 옹기종기 모여 길을 지나다니고 있다. 발목까지 덮어주진 못할 작은 우산 아래에 비를 피하는 사람들을 보며, 젖어가는 바짓단을 바라보며, 대기를 가득 채운 수증기의 후텊함에 찡그리는 뭇 얼굴들을 보며, 나는 여름을 자각했다. 습하고도 촉촉한, 후텁지고도 가슴 뜨거운, 불쾌하면서도 생기로 가득 찬, 여름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날 가장 그랬다. 


나는 비를 쳐다보며 시켜둔 빙수를 먹었다. 빙수를 하나 시켜서 혼자 다 먹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무언갈 우적우적 씹고 있는 동안에는 도저히 대화에만 집중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릇에 얼굴을 가까이 둔 바로 그 자세로는 이야기다운 이야기가 어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글이 어떻다느니, 글 씀이 어떻다느니, 이런 이야기는 빙수를 머금은 채 그다음 빙수를 입에 넣을 타이밍을 재고 있는 동안 할만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마치 빙수가 남아 있는 동안에 그런 이야기는 사치라는 것을, 모두가 자각하고 있었다는 듯이. 


대신 우리는 귀여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공교롭게 그날 우리가 피드백 받기로 청하였던 글의 주제가 하나 같이(나 빼고) 귀여움이었던 까닭이다. 지원은 ‘서울일러스트레이션페어’에 대한 글을 피드백 주제로 가져왔더랬는데, 거기서 산 소품 몇 가지가 우울한 사무실을 밝혀주었노라 말했다. 나는 사무실의 음울함, 그 틈 없는 적막함에 대해 답가를 댔고 또 누군가는 거기, 사무실이라는 안락함에 비친 장래의 걱정과 미래의 불투명함을 노래했다. 우리는 조금 울적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리 울적하지 않다. 침울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다지 침울함으로 빠져들지 않았다. 서늘한 이야기에도, 어딘가 어색할 법한 이야기에도. 그건 마치 "또 비가 오는구나, 저 지겹고 눅진한 비가..." 라고 읊으면서도, 멀건 눈빛으로 그것을 언제까지고 바라보는 듯한 이미지.  



 

나는 그런 무드를 참 좋아한다. 그때 비로소 나는 내 안에 간직된 많은 것, 대개 서늘함의 냄새가 오래된 생선 비린내처럼 저미어 있는, 그 많은 이야기들을 할 수 있다. 내겐 어떤 종류의 즐거움에도 그 비린내가 베어 있음을 느낀다. 즐거움에 그 반대의 것이, 음울함에도 그 반대의 것이 동시에 베어 있음을. 그러고 보면 즐거움이란 흰 창호지 같다. 그렇다면 반대로 굴비에도 오래된 종이 향이 배게 마련이었던가? 아마 그럴지도 몰라. 그게 내 글과 이야기가 지니는 본디 향취가 아니었을까 친구들아? 


비 내리는 차창에 앉아, 빙수를 먹는 것과 귀여움에 대해 이야기하며 조금은 울적한 이야기를 넌짓 건넨다는 것, 그건 참 여름다웠다, 그러면서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바깥을 응시함이란. 그 사이에 감도는 편안함을 나는 사랑한다. 좋음과 싫음을 한 물에 들이킨 채, 머금어 찬찬히 스러내는 그 여유로움을. 나는 삶에 대한 예찬이나, 소위 ‘인생 만세’ 류에 잘 공감하지 못한다. 그 하얀 종이, 인생에서 나는 어김없이 굴비 냄새를 맡기 때문이다. 흰 종이를 희다고 말하는 것, 몹시 희어 어김없이 깨끗하리다고 말하는 것이란 내게 있어 인생 만세의 한 가지 전형이다. 나는 냄새를 맡는다. 여기, 샛노란 굴비 하나가 있지 않았던가 내 친구야? 세상에 굴비 없이 굴비일 수 있는 것이 있다면은 바로 그 콤콤한 창호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름 만세, 막론하여 어떤 종류에서건 쾌재를 부를 만큼 재빨랐더라면, 나는 우리를 여름다웠노라 추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습하고 끈적하고 꿉꿉하며 불쾌하면서도, 생기가 넘치고 눈부시고 발랄한, 24년의 여름을 바라보던 우리를 생각하듯이는. 그 모든 것을 아우른 뒤 나지막이 불러보는, ‘아름다웠다’를 나는 좋아한다. 전부 다 헤아리고도, 조금 더 곱씹어 내뱉는 ‘아름다웠다’를 나는 사랑한다. 이 모든 것들이 그대들의 의도는 아니었을 테지만, 비 오는 7월의 혜화, 어느 카페 2층 창가에서 내가 생각하던 것은 이런 것이다. 굳이 나는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느 한 가지 분위기에 그다지 천착하거나 휩쓸리지 않은 채 차창 바깥을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에, 곧이어 또 다른 귀여움, ‘헤드위그’와 해리포터, 그리고 ‘틴틴팅클’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그렇기 때문에 또한 해리포터와 헤드위그와 어린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하면서도, 얼마든지 아바다 케다브라와 헤드위그의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었고, ‘틴틴팅클’의 그 하찮은 귀여움과 무해함을 이야기하면서도, ‘콩물이’의 우울한 가정사에 관해 이야기할 수도 있었다. 그 외에도 덕후와 K-POP과 팬픽과 BL에 대해서도, 티몬과 잃어버린 비행기 표와 주식 폭락에 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이야기가 어쨌든, 우리는 그 이야기의 창밖을 응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올해 여름에 대한 기억은 이것으로 마무리되겠지. 내년 여름은 아마 적어둔 이 순간을 기억하고 있을 테다. 그대들이 내게 여름을 상기한 까닭은 그대들이 여름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같은 여름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만남이란 그 여름 장마를 바라보던, 2층 창가 자리의 그 모습에 닮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질문, 그대들에게 여름이란 무엇일까. 무엇이기에 우리는 같은 눈빛으로 거기 쏟아지는 비와 세상과 사람들과, 차창에 비친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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