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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금이 있던 자리 Mar 18. 2024

[Review] 자신만의 흐름

수림뉴웨이브 2024 독파 - 대금 연주자 '유홍'




수림문화재단에서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개최한다. 전통음악을 주제로 매주 독주회를 진행하고 퉁소, 거문고, 대금, 아쟁 등 여러 악기부터 민요, 정가 등 가창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영역의 예인들이 초빙되어 자신의 창작물을 선보일 예정이다. 스무 번의 목요일 저녁, 스무 명의 예술가를 '김희수아트센터'에서 만나보실 수 있다. 


본 프로그램 '수림뉴웨이브'는 수림문화재단에서 매해 개최하는 프로그램으로, 전통 창작 예술가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라 소개한다. 한국음악 중심의 창작 콘텐츠를 발표하고 나누는 장으로서 '예술가에게는 창작실험의 장을, 관객에게는 우리 음악의 새로운 발견을 선사하는 전통예술 공연제'이다. 


수림뉴웨이브 2024, 올해의 주제는 독파 獨波, "홀로(獨) 자신만의 흐름(波)을 추구하며 독특한 음악 세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는" 전통 예인들의 음악과 인생 이야기를 만나는 것에 그 의의를 둔다고 전한다. 주제어에 홀리어 초대 신청을 눌렀다. 지향하는 바가 친숙하거니와, 누구든 자신만의 것을 추구하는 자는 일정 고독하고, 자신만의 울림을 만들어내기 위해 빈방 고투하는 그 모습은 아름답노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퇴근길 6호선은 꽤나 붐비는 편이다. 사실 어느 호선이나 마찬가지일 테나, 2호선 신당에서 환승하려고 서 있자면 사람들이 물밀 듯이 밀려 들어온다. 배차가 길어 그런지, 고대하던 열차가 도착하고 문이 열리면 뒤로부터 물 미는 듯이 쏟아져 흐름처럼 이리저리 뒤섞이는 느낌이라, 창신을 지나 보문 즈음에서 3할이 빠지고서야 한숨 돌린다. 


오늘의 공연장은 '김희수아트센터'. 고려대역에서 내려, 제일 친한 친구의 자취방을 지나, 오래 걷지 않아서 홍릉 수목원에 다다른다. 지도가 분명히 수목원 앞 삼거리 근방을 가리키는데, 조금 의아하였다. 그럴 것이 참 자주 지나다닌 길목이기 때문이다. 뒤로는 고려대이고 앞으로는 야트막한 언덕을 지나 경희대가 나온다. 이십 대 내내 지나다닌 익숙하디 익숙한 곳인데, 이런 데 아트센터가 있는 줄은 몰랐던 것이 어딘가 아연한 구석이 있었다. 홍릉 수목원 정문이 굽어보고 있는 김희수아트센터는 꽤 으리으리하게 지어졌다. 뭐랄까, 비즈니스 센터 같다고나 할까. 제대로 치어다보질 않아 채 몰랐다만 분명 낯익은 건물이다. 내부는 세련되고 깔끔하다. 적당한 앉을 곳을 찾아 김재훈 에디터를 기다렸다. 





3월 14일 목요일 저녁, 4회차 공연은 대금의 차례이다. 개인적으로 전통 악기 중 대금을 가장 좋아해 왔다. 딱히 깊게 고찰해보지도 않았지만, 꽤 당당하게 말해오곤 한 것이다. 목관악의 음색을 좋아하거니와, 그 중 대금만이 이루어낼 수 있는 특유의 정서를 좋아한다. 호젓함과 쓸쓸함이 공존하는 속이 빈 소리, 허나 힘주어 불 제엔 악기의 나무 벽이 터지듯 울리며 내는 투박하고 강렬한 소리. 국악기 중 어느 것 하나 한국적이지 않은 게 없으나, 유독 여기서 그 독특한 향취를 짙게 맡는 것은 내 착각일런가 싶다. 


공연장으로 들어섰다. 입구엔 '아트갤러리1'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독특한 것이 일반적인 공연장 형태를 따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매끈한 나무바닥에 스크린과 천으로 배경 막음을 해두었다. 일반적으로 접하는 공연장이 소리의 증폭을 위해 밀폐형 구조에 벽에다가 골을 파둔 것에 비하자면, 매우 열린 구조이다. 무대와 객석이 퍽 가까워 소리 샐 염려는 없겠다, 사방 시원하게 트인 것이 인상 깊었다. 원래는 전시회 장소로 쓰이는 모양이다. 





- Program -

1. 자시(子時) 
  - 작곡 : 황병기

2. 청성자진한잎

3. Today I Wrote Nothing Vol. 1 
  - 작곡 : 세바스티안 클라렌  

4. BAI 
  - 작곡 : 케이코 하라다
  - 대금 : 유홍 / 샤미센 : 혼조 히데지로

5. 즉흥 연주
  - 대금 : 유홍 / 첼로 : 지박

6. 이너스케이프(Innerspace) 초연
  - 작곡 : 유홍
  - 대금 : 유홍


사회자가 짤막하게 공연 전반을 소개하고 암전, 우측 편 스크린 뒤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연주를 시작한다.  거칠고 강렬한 호흡과 셈여림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앞서   묘사하였듯, 나는 목관이 부르르 떨 때의 소리를 좋아한다. 그건 대금만의 매력. 강렬한 인풋에 강렬한 아웃풋이 나오는 것이야 어느 악기에 매한가지이나, 대금에는 아예 결이 다른 무언가가 있다. 높다라이 쨍하고 강렬한 음정이 아닌, 순수한 진동에 가까운 소리가 음정에 섞여 흘러나는 것은 듣는 언제나 내 이목을 사로잡는다. 


두 곡을 연달아 연주한 뒤 다시 무대가 밝고, 사회자가 나와 연주자와 인터뷰를 진행한다. 사회자는 2주차 공연을 맡으신 거문고 예인 '김준영' 님으로, 오늘의 연주자인 '유홍' 님과는 고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고. 둘의 친분 탓인지 인터뷰는 산뜻하게 진행된다. 무대에 선 입장에서는 그 예절을 다하려 하나, 중간중간 흐르는 편안한 분위기까지 감춰지지는 않았다. 



Q. 공부에 연이 없던 것으로 아는데, 갑자기 열심히 영어 공부를 시작해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유학은 어떤 계기로 결심하게 되었는지?

A. 전통음악이 해외에서도 경쟁력이 있을까 하는 질문을 안은 채로 유학길에 올랐다. 운이 좋게도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좋은 기회를 얻어 지금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다. 

Q. 오늘 공연의 소제목은 'Innerscape'로 정하셨다. 다른 프로그램과 달리 유일하게 어려운 영어(웃음)로 정하셨는데, 그 이유가 궁금하다. 

A. 관객분들께는 그리 어려운 단어가 아닌 것 같은 눈치인데… (웃음) 음악에 대한 고민과 준비과정은 연주자의 내적인 고민과 내면적 여정에 매우 닿아 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연주로서 표현하는 것. 그래서 제목을 '이너스케이프'로 정해보았다. 



유홍 연주자는 특이하게 독일 유학을 경험했다고, 국악 전공자가 외국 유학을 나섰다는 것에 대단한 궁금증이 일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이어지는 3번째 곡은 독일 베를린 유학 당시, 대금에 흥미를 느낀 동문 '세바스티안 클라렌'에 의해 작곡된 곡이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모르긴 몰라도 대금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기교가 다 녹아 있는 실험적인 곡이라는 감상평을 여기 남긴다. 


그 외에도 실험적인 곡을 대거 선보인다. 4번째 곡인 'BAI'에서는 혼조 히데지로의 샤미센 연주 녹화분과 견주어 협연을 펼치고, 5번째 차례인 즉흥 연주에서는 첼리스트 '지박'님과 말 그대로 즉흥 연주를 진행한다. 사회자의 말에 따르면 공연 직전 리허설에서 처음 합을 맞추었다고. 


실험적이고 전위적이었다고만 하면 어딘가 표현이 납작하니 식상한 면이 있겠고… 표현을 좀 골라보려 했지만 여전히 앎이 전무하여 어렵다. 그럼에도 독창적이고 새로웠다고 일단 써둔다. 그럴 것이 대금이란 악기 자체가 익숙지 않아 다른 악기들과의 협주가 그 자체로 신선한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일전 경험한 '토마스 스퇴뢰넨'의 유러피안 재즈가 선보인 바로 그 전위성이 상기된 까닭이다. 대금 연주에서 유러피안 재즈를 상기하다니, 이게 내 의아함을 다소는 설명해줄지도 모르겠다. 이게 '유홍' 예술인 그 자신만의 흐름일까, 독일 유학 기간 동안 수학한 현대 음악 트렌드 및 경향을 그는 전통음악에 결부시키고 녹여내고자 한 것일까, 나 혼자는 생각했다. 


이 기묘한 감상을 어떻게 표현할지는 참 어렵다. 5번째 곡, 대금과 첼로의 즉흥 연주는 말 그대로 재즈의 그것을 연상시켰다. 트럼펫과 콘트라베이스가 나누는 즉흥 연주의 광경이 연상된다. 앞선 연주자의 진행을 받아서 치고 나오며 연주가 나아가고, 중간 중간 무아지경의 독주를 통해 서로 갈고 닦은 기교를 힘껏 뽐낸다. 첼로는 활을 눕혀서 연주하거나 손으로 뜯는데(피치카토), 즉흥연주 특유의 경쾌한 템포에 맞추어 내는 피치카토 음색이 아름다웠다. 


대금은 뭐라 할까, 저녁 산에서 울려오는 올빼미와 멧비둘기 소리, 스타카토로 끊기며 내는 기차 경적소리, 건넛마을 삽살개 짖는 소리, 늑대가 길게 목 늘어뜨려 우는 소리, 가면 쓴 다스베이더의 숨 쉬는 소리에 이르기까지, 악기로 구현할 수 있는 소리의 폭이 다채로와 놀랐다. 소리, 소리, 새삼 우리 음악이 '소리'라고 불리던 것에 생각이 미치며, 그 이해가 깊어진다. 이만하면 이 공연에 대한 내 표현의 어려움이 우회적으로는 전달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공연을 마치고 생각이 깊어졌다. 홍릉 수목원을 떠나 정릉천 쪽으로 걷는다. 정릉천 변에는 '불타는 왕십리'라는 꽤 오래된 술집이 하나 있다. 근처 자취방에 사는 내 짝패를 불러 김재훈 에디터와 셋이서 그 술집으로 들어섰다. 우리는 유쾌했다. 공연은 신선하기 그지없었고, 공간은 친숙하며 어딘가 그리운 감상을 자극하고 있었다. 이제 완연한 봄바람이 부는 저녁, 고려대 정릉천 인근은 호젓하고 불타는 왕십리도 그러했다. 양념 막창과 소주를 시킨 다음, 금번 공연과 전위성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다간 골머리가 아파 그만두고 이내 다른 이야기로 빠져들었다. 그때의 감상은 바로 그 자리에서 바로 갈무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리뷰를 쓰며 재확인한다. 


나도 다 정리가 안 되지만, 이 정취가 그대로 전달되었으면 싶다.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이 글을 접하시는 분들이 한 번쯤 놀러 오셨으면 좋겠다. 고려대역 지나 정릉천 건너 홍릉 수목원에 이르기까지, 그 길지 않은 길이 꽤 호젓하다. 반대편 경희대 쪽으로도 산책하기 좋은 길이라, 공연 관람하시고 밤 산책 권할만 하다. '수림뉴웨이브 2024'는 2월 말부터 시작해 10월 말까지 매주 목요일 19시 30분에 공연을 개최한다 하니 봄이 다 가기 전에 한번 와보셨으면. 네이버 예약으로 예매하실 수 있고, 무엇보다도, 무료이니 부담없이 찾으셨으면 좋겠다. 공연 퀄리티에 대해서는 위에서 열심히 묘사했으니 반복하진 않겠다. 오늘의 공연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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