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
초록색이네, 가야겠다. 그녀는 멍하니 앞을 응시하며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었다. 아, 정말 귀찮은 일이야. 뒷문이 다 찌그러졌으니 얼마가 나올까. 아까 굴다리에서 조금 더 조심할걸. 아무래도 운전이 익숙해졌다고 긴장이 풀렸단 말이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수리를 맡기려 했던 공업사를 지나쳤다. 으악! 어쩌지? 이번 골목에선 반드시 우회전해야 해. 그녀는 이번만큼은 신경 써서 조심스레 차를 돌리며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난 사고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있을 수 있었다며, 자책했다. 그녀는 시간을 사랑했다. 그렇기에 1분 1초가 허투루 쓰이는 걸 못 견뎌서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음에도 그녀는 늘 그랬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은 전통적 서사 구조를 벗어나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인 소설이다. 단 하루 동안의 일을 다루지만, 그 하루는 한 사람의 일생보다 더 복잡하고 겹겹이 쌓인 감정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점이 너무 독특하고 흥미로워, 내 아침의 내면 흐름을 울프의 문장처럼 써보고 싶었다. 분명 지금 이 순간의 의식인데, 어느새 과거로 갔다가 현재로 왔다가, 때론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의 세계까지 건드린다.
<댈러웨이 부인>이 그렇다. 과거와 현재, 망상의 미래를 오가며 감정들이 수시로 변하고, 생각이 교차하며, 인물 간의 감정선이 실처럼 얽히고 풀린다.
이 소설에선 객관적인 실체는 없다, 주관적인 관념만이 있다. 각 인물은 자신의 입장에서만 상대를 보고, 판단하고, 반응한다. 그로 인해 사건이 발생하고, 사건은 다시 감정을 흔들고, 감정은 또다시 판단을 만든다. 그리고 재밌는 것은 개개인의 주관적 시선 또한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말, 행동, 표정, 기억, 아주 사소한 분위기 하나에도 인물들의 생각은 끊임없이 달라진다. 클래리사를 향한 피터의 감정과 생각은 과거와 현재가 다르고, 그들이 처음 만난 2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변해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다시 만난 그 순간에도, 그녀의 말 한마디, 웃음 하나, 시선 하나에 따라 피터의 내면은 실시간으로 요동친다.
맞다. 이게 우리 삶이지, 울다가 웃다 멍해지고, 그 사이 어딘가에 나도 있었고, 너도 있었다. 우리는 이렇게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계속 생성되고, 사라지면서, 그렇게 서로를 만나고 스쳐 가며 살아간다.
그래서 나는 소설 속 인물들을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내내 “판단 중지”를 외치게 된다. 가령 클래리사는 선한 사람인가? 그녀는 삶을 사랑하는가, 회의주의자인가? 명랑하고 활기차 보일 때도 있지만, 어떤 순간엔 지독히 외롭고 고독해 보인다. 그래서 깨달았다. 완전한 클래리사라는 건 없다.
클래리사는 ‘이러이러한 사람이야’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생각해 보면 나 자신조차 그렇다. 나는 어떤 사람이라고 단 몇 마디로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수만 가지 특징을 갖다 붙인다 해도 나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나 다층적인 존재이다.
울프는 바로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근대라는 시대, 주체성에 대한 의식은 깨어났지만, 정작 주체적으로 살 수 없던 틀 안의 여성.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나, 그리고 그 누구도 규정된 정체성 안에서 살아갈 순 없다고. 당신들이 부여한 타자성 안에 나를 가두지 말라고.
나는 이보다 더 우리 삶을 가까이서, 틀 없이, 숨소리 하나까지 들리게 응시한 소설을 본 적이 없다. 울프는 판단하지 않는다. 대신 보여주었다. 그녀에게 진심으로 감동하였다.
셉티머스는 전쟁에서 살아 돌아왔다. 전쟁 이전, 전도유망한 젊은이였던 그는 보통의 일상으로 돌아가려 애쓰지만, 참혹했던 전쟁에서의 경험은 이미 그의 삶에 균열을 만들었다. 전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우울증, 환청, 환시, 자살 충동에 시달리며 무너져간다. 그에게 삶은 더는 그가 살아낼 수 없는 세계였다. 평화로운 일상이란 소리 없는 폭탄이 매일 머릿속에서 터지는 전장의 한가운데였다. 심지어 전우조차 없이 홀로 버텨야 하는 외로움과 고통의 현장이었다. 그러므로 ‘죽음’은 전쟁을 끝내는 그의 마지막 의지이자 저항이었다. 그는 창문에서 몸을 던지며 자신을 지켜냈다.
클래리사는 파티에서 자살한 젊은이(셉티머스)의 소식을 접한다. 그토록 공들여 준비한 성대한 파티, 그러나 그녀는 화려한 파티장의 손님들도 잊고 작은 방에서 깊은 사색에 빠진다. ‘그는 왜 그랬을까?’ 조용한 방에서 그녀는 묻는다.
클래리사는 불길에 휩싸이고 몸이 타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 순간 나는 클래리사에게 빙의되었다. 그녀가 느끼는 감정, 그녀가 안고 있는 고요한 공포는 나와 너무 닮아있었다.
이 삶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부모가 손에 쥐여준’ 길. 나는 그 길을 끝내 살아내야 하고, 그게 때로는 무섭고 벅차다. 삶은 왜 이토록 무력하고 막막한가?
클래리사가 지금 가장 부러운 사람은 셉티머스일 것이다. 아니, 이건 사실 내 이야기다. 그의 죽음이 부러운 것이 아니다. 그녀는,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살고 싶다. ‘횃불을 휘두르다 땅에 내던져버리는 편(226쪽)’이 나을 정도로 활활 타오르는 삶을 살고 싶다. 삶은 견디어내어서는 안 된다. 살아도 살아 있지 않은 삶, 점점 희미해지다 사라지는 삶을 그녀는 경멸한다. 나는 경멸한다.
영국 런던의 상류층 가문의 부인, 그것이 클래리사의 이름이다. 늘 파티를 열고 가식적인 웃음과 화려한 드레스로 가득 찬 삶. 그런데 그녀의 내면을 따라가다 보면, 그런 표면적인 인상은 차츰 사라지고, 삶에서 살아있다는 감정,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방황하고 노력하는 모습만 남는다. 상류층 여성이라는 표상 때문에 그녀가 느끼는 삶의 감각이 지워져서는 안 된다.
그녀처럼 나도 삶이 두렵다.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넘쳐나는 공허함에 흔들리는 나 자신을 마주한다. 적당한 집에서 괜찮은 남편과 해맑은 아이. 그런데 부족하다. 정말 소중한 건 손에 쥐지 못하고 사라질까 봐 두렵다.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도 모른 채, 그냥 적당히 살아가는 날들. 클래리사처럼 겉으로는 아무 문제없는 삶 속에서, ‘살아있음’이라는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삶이 비극이라면, 셉티머스는 죽음을 택함으로써 스스로 비극을 끝마쳤다.
클래리사는 여전히 그 비극의 세계에 남아있다. 죽음을 마주한 뒤에도 삶 속으로 되돌아간다.
파티장으로 다시 돌아가는 클래리사의 발걸음을 생각한다. 그것은 비극에 남겨진 자의 의지이며 삶을 이어가겠다는 희극적 용기일 거라고. 그 발걸음이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