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렇게 키운 적 없는데

젠더는 누가 가르쳤을까?

by 와초 Wacho


7살이 된 친구 딸의 이야기이다. 작년부터 핑크 망사 원피스를 그렇게 좋아하더니, 이제는 원피스 중에서도 긴 드레스만 골라 입고 있다고 한다. 긴 드레스를 찾다 못해, 한복 치마를 입고 외출할 때도 있단다. 친구는 “부끄러움은 엄마 몫”이라며 웃음 섞인 한탄을 했다. 비단 이 친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이들이 모인 곳에서는 핑크색,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아이들이 넘쳐난다. 모든 엄마가 딸에게 여자애니까 핑크색만 입으라고 하진 않았을 텐데. 어떻게 된 걸까?


소윤이도 소방차를 좋아하긴 하지만, 남자애들에 비해서 공룡이나 자동차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보단 인형을 돌봐준다거나 친구가 되어 함께 노는 것을 좋아한다. 어린이집에서 마당놀이를 할 때면, 여자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밥 만드는 놀이를 하고, 남자아이들은 뛰어다닌다. 물론 여자아이들도 뛰고 계단에서 뛰어내리고 자전거를 탄다. 다만 남자아이들이 밥 만드는 놀이를 하는 건 아직 본 적이 없다.


키즈카페에 가면 소윤이를 비롯한 여자아이들은 꼭 한 번씩 파우더룸에 앉는다. 거울 앞에서 화장하고 고데기를 들고 논다. 나는 화장을 거의 하지 않는데도, 소윤이는 브러시는 어떻게 쓰는 건지 궁금해하며, 눈이랑 볼에 화장하는 놀이를 한다. 파우더를 가짜로 얼굴에 톡톡 바르며 재밌어한다.


나는 소윤이에게 성별로 나뉜 역할을 심어주고 싶지 않았다. 여성과 남성을 가르는 그 어떤 말도 한 적이 없다. ‘넌 여자니까 이래야지’, ‘아유 참 여자네 여자야.’ 같은 말들. 밖에서 두어 번 들었을 수는 있지만. 그게 나의 양육방침이었다.

최대한 핑크색 옷은 안 입히고 싶었고, 푹신한 동물 인형은 사주지만 바비인형은 아직 주고 싶지 않았다. 일부러 파란색, 갈색 등의 옷을 입혔다. 공구 놀잇감, 경찰차, 소방차를 집에 들였다.


나처럼 자라게 하고 싶진 않았다. 여자애니까 조신해야 하고, 덤벙대거나 너무 나서도 안 되고, 예뻐 보이려 꾸미는 일 따위를 당연하게 여기며 자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소윤이는 부엌놀이와 엄마를 따라 청소하는 걸 좋아한다. 강아지 인형을 아기처럼 돌봐주는 놀이도 좋아한다. 애초에 전제가 잘못된 걸까?

그걸 여자의 본성이라고 말하는 것. 활동적이고 거친 놀이는 남자의 본성이라고 하는 것 말이다. 이렇게 구분 짓는 것 자체가 사회적 관습이고 젠더 고정관념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 여아는 내가 그토록 심어주고 싶지 않은 부엌일이나 돌봄 따위를 왜 벌써 놀이로 하는 거냔 말이다. 필요도 없는 화장을 왜 지금부터 배우고 있는 거냐고.


무의식적으로 우리 몸에 밴 젠더 인식이 아이들을 이렇게 만들고 있는 걸까? 생각해 보면 나도 여러 번의 위기(?)가 있었다. 소윤이 친구들과 밥을 먹고 있을 때였다. 한 남자아이가 엄청 거칠게 밥을 입에 넣었다. 그때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우와, ㅇㅇ야 남자네~!”

말하고 나자마자 깜짝 놀랐다. 내 입을 한 대 치고 싶었다. 내가 한 말이 믿기지 않았다.


이런 사건들이 켜켜이 쌓여 이렇게 3~4세 아이 때부터 여성성, 남성성의 신화를 베껴 써 나가고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며 엄마들 사이에선 이런 말들이 수없이 오갔었다.

“확실히 여자애, 남자애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뛰다가 넘어져도 울지 않고 일어나는 남자아이를 보며) “역시 아들은 달라.”

“어머, 애교 봐봐, 딸 너무 예쁘다.”


애교? 애교라니!

나는 그토록 듣기 싫어했던 단어를 아이들에겐 무의식적으로 쓰고 있었다.


아직은 소방차도 인형도 좋아하는 소윤이는 어떻게 자랄까? 젠더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어른들의 미묘한 표정과 반응 속에, 그림책 캐릭터 구조와 이야기 속에, 장난감의 색깔과 모양 속에, 옷에 새겨진 무늬와 색감 속에. 이 세상엔 셀 수 없이 많은 젠더코드가 숨어있고, 우리 아이들은 숨 쉬듯 흡수하며 자라나겠지.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아이는 결국 내가 사는 모습을 보며 자란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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