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답게 살려다가 먼저 갈 판
"당신의 성격 유형은 ENFP입니다"
10분가량의 간단한 설문조사를 끝내자 이 네 글자가 화면에 떴다.
이 성격 조사에 따르면 나는 58%의 외향성을 가진 재기 발랄한 활동가 유형이라고 한다. '재기 발랄'이라는 말이 꽤나 마음에 들어 '아, 그렇구나' 정도로 넘겼다. 이전에 했던 조사에서도 모두 같은 결과가 나왔던 걸 보면 나는 이 알파벳의 조합에 잘 들어맞는 사람이겠거니 하고 말이다.
'혈액형이 뭐야?'라는 질문을 안부 묻듯 물어보던 2000년대 초반을 지나 이제는 그 자리를 'MBTI가 뭐야?'라는 질문이 대신한다. 혈액형이 내가 먹던 아이스크림을 너도 먹어도 되는지의 여부를 결정짓던 정도라면, MBTI는 같은 유형이 나온 세계 각국의 유명인사나 연애 스타일, 직업, 각 MBTI의 궁합까지. 파생되는 거의 모든 것들이 새로운 콘텐츠로 공유되면서 더 자주,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있다.
"와, 정말요? ENFP였구나! 의외네요."
하루는 이런 말을 들었다. 4가지로 나뉘는 혈액형이든 16가지로 나뉘는 MBTI든 크게 상관하지도, 연연하지도 않는 나라고 생각했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의외'라는 말에 움찔하고는 말았다.
"왜요? 그런 것 같지 않나요? 그럼 전 어떤데요?"하고 묻는 내게 그 사람은 "아, 생각해보니 맞는 거 같아요, ENFP"라는 말로 대화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날 오후, 문득 ENFP 성격 정의가 궁금해졌다. '창의력이 특출 나다',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시너지가 폭발한다', '친화력이 좋다', '주의집중이 잘 안된다', '통신사 VIP다'(여기서 조금 소름이 돋았는데, 나는 살면서 통신사를 바꾼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등등. 이 정도면 어디선가 나를 사찰하거나, 내 일기를 훔쳐보고 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왜, 그 사람이 나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생각으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내가 그 사람 앞에서는 친화력이 좋지 않았나? 조금 소심해 보였나? 하고, 아닐 수도 있지만 제멋대로 해석하고는 괜히 나빠진 기분에 쓴 커피만 들이켰다.
여전히 나는 수많은 인구의 성격을 단 몇 가지의 유형으로 분류하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심리학을 전공한 지인에 따르면, 요즘 우리가 하는 짧은 검사로는 제대로 된 MBTI를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다소 편협하고 단정적인 이 검사가 그날의 나에겐 오히려 내 성격과 진짜 나다운 것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이전의 나는, 평일도 쉴틈 없이 사람들 사이를 뛰어다녀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하루라도 캘린더의 일정이 비면 어딘지 모르게 시간이 손에서 날아가버리는 기분. 그 기분이 참 별로라서 하루에 2번, 많게는 3번까지도 약속을 잡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하루 건너 하루의 약속을 잡아도 그 곱절이 되는 이틀 정도의 휴식이 필수적이다. 한두 살의 나이가 가져다준 체력적인 한계라고 생각했는데, 이날 생각해보니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온 에너지를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는데 쏟았던 게 이전의 나였다면, 지금의 나는 오롯이 혼자 있는 시간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을 조금은 배운 것 같달까. 정성 들여 가꾼 화초가 조그마한 새싹을 피워냈을 때, 10살이 조금 넘은 반려견이 품에 안겨 곤히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볼 때. 어느새 조금 더 집중할 수 있게 된 이런 일상의 소중한 순간들이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나는 ENFP가 말해주는 성격 유형에 정말로, 아주 많이 가까운 사람이다. 하지만, 이 네 개의 알파벳 조합으로는 나다움을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나는 드라마를 보다가 울 정도로 감성적이다가도 어떤 순간에는 지극히 계산적이게 변하기도 한다. 누가 나한테 하나를 주면 내가 편하자고 두 개를 줘야 마음이 가벼워지는 사람. 약속이 끝나고 집에 올 땐 어쩐지 헛헛해져서 그 날 말실수 한 건 없나 하고 몇 번이고 그날의 대화들을 곱씹어 보는 사람. 거절하는 게 힘들어서 돌리고 돌리고 돌려서 말하고는, ‘왜 더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지’하고 온종일을 후회하는 사람. 종종 옷장 정리를 하지만 옷은 줄지 않고, 대신 깊숙이 놓아둔 편지 꾸러미에서 몇 년 전의 편지를 발견하곤 감동해버리는 사람. MBTI 결과는 채 말해주지 않는 나다움이다.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건, -10분짜리의 성격유형검사 결과보다는- 그 속의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 시간을 할애해, 들여다보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렇게 찾은 수많은 단점보다는 몇 가지의 장점을 벅차게 사랑하는 것이다.
하루를 또 잘 살아낸 나를 진심으로 기특해하는 것. 내 공간과 내 사람들을 살뜰히 챙기면서도 내 것이 아닌 것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지금의 나를 더 괜찮은 나다움으로 끌어가는 일이 아닐까. 그게 그 날 오후의 긴 생각이 가져다준 결론이었다.
적어놓고 보니 MBTI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그렇게 부정적이지만은 않은 듯하다.
당신의 직업이나 연봉 등 머리를 굴려 대답해야 하는 수많은 질문을 던지기 이전에 잠깐이라도 그 사람의 성격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니 말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덧없는 질문들로만 대화를 채우는지 생각해보면,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아, 그래도 '의외네요'라는 말은 최대한 아끼자.
괜히 생각만 많아질 수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