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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갈릭 Sep 06. 2018

"젊고 어리석었기에 이제야 눈물을 흘리네"

이언 매큐언, 칠드런 액트

'완벽한 카펫이 더럽혀지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이언 매큐언의 <칠드런 액트>를 두 번째로 읽고 무슨 얘기를 쓸까하다 떠올린 말이다. 이 짧고 엄격한 스토리의 주인공, 피오나 메이는 59세라는 나이만큼 엄숙한 냉정함을 잃지 않는 판사다. 소설은 바늘 한 끝의 흐트러짐조차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이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일로 흔들리는지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항상 균형 있는 태도로, 법대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거리를 유지하던 이 판사는 마지막 모험을 원한다는 남편의 말에 비틀거린다. 그와 동시에 작가는 매우 어려운 과제를 떠넘긴다. 수혈을 이용한 치료를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 신자에게 강제 집행을 할 수 있게 해달라는 병원의 청구다. 피오나는 남편의 배신에 몸서리치면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차분히 사건에 몰입한다. 그리고 소년을 살린다. 피오나는 자신의 할 일을 모두 마쳤다고 여겼다.

하지만 늘 그렇듯, 인간의 선택은 우리가 예측못한 곳으로 우리를 끌고간다. "법정을 벗어나면 내 책임도 끝난다"고 생각했던 피오나는 틀렸다. "하지만 나는 젊고 어리석었기에 이제야 눈물 흘리네"라는 예이츠의 시구가 진실이라는 현실만 남았다. 피오나 역시 결국 눈물을 흘린다.

위기를 맞이한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일상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버틴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아주 사소한 자극이 영혼에 큰 균열을 만들어낸다는 걸 엄밀한 문장으로 그려내는 소설이다.

'법원이 미성년자 관련 사건을 판단할 때, 아동의 복지가 최우선'이라는 영국 아동복지법에서 따온 제목만 보면 선악이 분명히 대비되는 법정드라마를 연상시키기 쉽다. 하지만 법복을 입고 근엄하게 앉아 있는 저 판단자들도, "유악한 인간성을 드러내는 그런 자질구레한 요소들로 가득차 있다는 사실"을 촘촘한 점묘화로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결국 완벽한 카펫도 얼룩 하나에 더렵혀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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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쪽) 남편은 마음을 터놓는다는 취지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등 뒤에서'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녀의 앙상하고 용서 없는 등 뒤에서.

47쪽) 신체 각부가 적절한 형태로 제자리에 달려 세상에 나온다는 것, 잔인하지 않은 깊은 애정을 가진 부모에게서 태어난다는 것, 혹은 지리적으로나 사회적인 우연으로 전쟁이나 빈곤을 모면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우연한 행운이었다. 그리하여 선한 사람이 되기가 훨씬 쉽다는 것도.

54쪽) 부모가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선택하는 일, 그런 악의 없고 중요하고 평범하고 사적인 일이 쓰라린 결별과 지나치게 많은 돈이라는 치명적인 조합에 의하여 가공할 만한 서기 업무로, 손수레 없이는 법정으로 옮기지도 못할 만큼 무겁고 많은 법정 서류 파일로, 몇 시간에 걸친 법정공방과 심리 절차, 판결유예 등으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소동은 끈을 잘못 묶어 한쪽으로 기우뚱해진 열기구처럼 사법의 위계를 따라 아주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82쪽) 두려워하는 것은 플로베르와 톨스토이의 소설에 나오는 경멸이나 배척이 아니라 그저 동정은 아닌지. 모두가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사회적 죽음과 다를 바 없다. 19세기는 대부분의 여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에 있다. 진부한 상황에서 진부한 역할을 연기하는 모습을 들키는 것은 도덕적 판단착오보다는 저급한 취향의 문제에 가깝다.

86쪽) 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 차가운 침대 왼편을 확인하고 신체 일부가 절단된 듯한 느낌을 받았을 때, 그녀는 처음으로 버림받은 사람의 상투적인 고통을 실감했다. 잭의 가장 좋았던 모습이 생각났고 그를 간절히 원했다. 털이 많고 뼈대가 굵은 정강이, 알람시계가 첫 번째 공격을 개시하면 반쯤 잠든 상태로 부드러운 발바닥을 그 정강이에 대고 쓸어내리던 기억. 그리고 몸을 굴려 팔을 벌린 남편에게 안긴 채 따듯한 이불 밑에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시계가 두 번째 알람을 울릴 때까지 졸면서 기다리던 기억. 침대에서 나와 어른의 갑옷을 입기 전 맨살로 아이처럼 자신을 내맡기던 그 시간이 그녀에겐 필수영역이었다는, 그러나 이제는 그곳에서 추방되었다는 생각이 잠에서 깨자마자 머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욕실에 서서 잠옷을 벗으려니 전신거울에 비친 자신이 우스워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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