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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갈릭 Dec 31. 2020

"여사님" 소리만 듣고 왔다

“그래, 여사님은 무슨 일로 오셨어요?”


생각지도 못한 호칭에 당황했다. 여사님이라니!! 나 아직 30대 중반인데... 하지만 호칭이 문제가 아니니까 정신을 차렸다.

ⓒ  Jose Antonio Gallego Vázquez

한 달 전쯤 엘리베이터에서 공고를 봤다. 여느 때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그날은 꽤 오래 눈길이 머물렀다. 입주자대표회의에서 관리비 절감을 위해 새해부터 경비초소 인력을 6명에서 3명으로 줄인다는 안내문이었다. 아파트에 살기 시작한 지 2년 만에 처음 겪는 일이었다.


낯선 일은 아니었다. 입사 초기 거리에서 싸우는 사람들을 자주 만났다. 2012년의 마지막 날에는 압구정의 한 아파트로 향했다. 1951년생 경비노동자가 23명 집단해고에 항의해 아파트 굴뚝에 올라갔다. 몹시 추운 날이었다. 몇 시간 후 근처 카페에 들어갔을 때는, 실내의 따뜻한 공기에 속절없이 녹아버렸다. 그 순간에도 경비노동자는 굴뚝 위에 있었다. 며칠 동안 칼바람을 맞은 뒤에야 그는 제 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1년 후 그와 함께 복직됐던 동료 6명 모두 쫓겨났다. 낯선 일은 아니었다. 잊을 만하면 A아파트에서 경비노동자가 해고되고, B아파트에선 주민 갑질에 시달린다. 시민사회계에서 꾸준히 아파트 경비 등 감시·단속직 노인노동자의 처우개선을 말하고 있지만, 잊을 만하면 생기는 일들이다. 그런 일이 우리 아파트에 생겼다. 난감했다. 


다행히 공고문에는 “의견이 있으면 관리사무소에 연락 바랍니다”라는 한 줄이 들어가 있었다. 관리사무소에 문의했더니 조만간 입주자대표회의가 열리는데 참관 가능하니 그때 와서 의견을 개진해도 좋겠단다. “가볼래?” 남편이 물었다. 잠시 망설였다. 생각과 행동이 늘 똑같으면 좋으련만, ‘굳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 순간, 오래 전 썼던 기사들이 떠올랐다. 


23일 오후, 후다닥 일을 마치고 관리사무소로 뛰어갔다. 2년 전 입주 등록을 하러 방문했을 때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사무실 안쪽 회의실이 있다는 것도 이날 알았다. KF94 마스크를 잘 올려 쓰고 들어갔다. 입주자대표회의 관계자 다섯 분이 아파트 현안을 두고 열띤 토론 중이었다. 1시간가량 기다린 끝에 회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30분 전부터 입이 근질근질하긴 했다. 경비인력 감축에 따른 분리수거 요일 조정 문제가 안건이었다. 몇몇 대표자들은 ‘두 달 전에 정한 걸 왜 이제 와서 그러냐’고, ‘나름 합리적인 대안을 마련했는데 주민들에게 제대로 설명 안 한 것 아니냐’고 관리사무소 관계자를 채근했다. 


입주민대표자 : “’왜 주민들한테 미리 알리지 않냐’는 민원도 있는데... 규정에 어떻게 나와 있죠?”

관리사무소 관계자 : “그런 건 없습니다.”


공동주택관리법에 따르면 광역단체들은 공동주택 관리규약 준칙을 정한다. 내가 사는 경기도도 있다. 몇 년째 경비노동자 처우 문제를 두고 사회적 논란이 끊이질 않자 경기도는 지난 7월 ‘경기도 공동주택 관리규약 준칙’을 개정하며 경비원, 미화원 등 공공주택 관리노동자에게 폭언·폭행 등 갑질행위를 할 수 없도록 했다. 


아파트들은 도 관리규약 준칙을 기준으로 자체 관리규약을 만든다. 그런데 준칙에는 ‘갑질 금지’ 외에는 경비노동자 처우에 관한 조항이 없다. 용역회사를 바꿔 고용승계가 이뤄지지 않거나 갑작스런 인원 감축이 있더라도, 딱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실 이마저도 글을 쓰면서 알았다. 회의 현장에서는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여사님” 그 다음 상황이다.


나 : “음... 아까 말씀 들어보니까, 이게 갑작스럽게 정한 게 아니라 두 달 전에 다 논의하셨고 대책까지 말씀하셨다는데요. 주민들은 몇 주 전에 엘리베이터에 붙은 공고문으로 본 거라... 그래도 한두 분도 아니고 인원을 절반이나 줄인다고 하니 야간 경비 문제 등도 우려스럽긴 해서요.”


입주자대표회의 분들은 내게 ▲ 분리수거장 배치 인력은 동일하고 ▲ 야간 정문 경비인력만 2명에서 1명으로 줄어들 뿐이며 ▲ 조경작업 등에 필요한 손이 감소하는데, 그건 필요에 따라 임시직을 고용하는 등 탄력적으로 운영할 계획이라고 했다. 또 ▲ 야간 경비 문제 등을 감안해 CCTV 화질 개선 등을 고려 중이라고 했다. 


입주민대표자 : “이제 궁금한 게 다 풀리셨나요?”

나 : “아 네... 근데 저희가 이렇게 해서 아끼는 비용이 얼마죠?”

입주민대표자 : “인건비가 월 900만 원정도 줄어드니까 세대수로 나누면 그리 많진 않지만, 쌓이면 적은 돈은 아니잖아요? 주민들 귀한 돈인데, 관리비를 아끼면 좋죠.”


‘그래도 당장 일자리 잃는 분들은 생계 문제 아니냐’ 등을 좀더 호기롭게 주장하고 싶었지만, 썩 용기가 나지 않았다. 괜히 분란만 일으키는 것 아닐까? 두 달 전에 정해졌다는데,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다시 논의하겠다는데? 결국 나는 “잘 알겠습니다. 한 번 보고 의견 있으면 또 말씀드릴게요”라고 인사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여사님”이라는 인사를 들으며.

ⓒ Rendiansyah

2020년 12월 31일이다. 어디선가 비슷한 이유로 아파트 경비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있을 거다. 오늘자로 계약만료되는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도 있다. 코로나로 모두가 버텨내는 시대라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다른 이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조차 더 힘들어졌다. 


매끈하고 세련된 비대면 사회는 네모난 모니터 밖의 거칠고 혼란스럽고 낡고 작은 것들을 쉽게 지워버린다. 누군가 고개를 돌리지 않으면, 귀를 바짝 대지 않으면 발견하지 못한다. “여사님”이란 소리를 들으며 발길을 돌린 나 역시 다르지 않다. 


때마침 눈이 온다. 아이들은 강아지처럼 넋 놓고 본다. 누군가에겐 눈조차도 버거우리라. 그에게 우산이라도 건네는 마음을 나는 간직하고 있을까. 새해부터 한 자리 비어 있을 야간 초소가 자꾸 눈에 밟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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