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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갈릭 Jun 29. 2024

"이 책은 너희를 위한 것"

바버라 킹솔버, 내 이름은 데몬 코퍼헤드

기자들이라면 한 번쯤 '버튼' 눌리는 단어가 있다. '퓰리처상 수상작.' 일단 이 말이 들어가는 책이라면 표지는 본다. <내 이름은 데몬 코퍼헤드>란 책 소개도 그래서 기억했다. 거기다가 찰스 디킨스를 완벽하게 다시 썼다니. 디킨스 책을 제대로 본 건 <어려운 시절> 딱 하나뿐이다. 하지만 세계의 비참함과 이를 나몰라라 하는 자본과 권력, 그리고 잘못된 관행과 욕구의 무해함이 몇 백 년 뒤 오늘과도 어찌나 닮아있는가 한탄하며 읽었던 기억에, 이래저래 나의 지적 허영에 딱 들어맞겠다 싶었다.


이야기 구조는 단순하다. '데몬'이라고 불리는 데이먼은 뱃속에서 아빠를 잃었고, 열한 살 생일날 엄마마저 약물중독으로 세상을 떴다는 비보를 접한다. 이후 데이먼은 위탁가정을 전전하며 '버텨내는 삶'에 익숙해진다. 가까스로 새 위탁가정에서 어쩌면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발견해 내지만, 늘 꼬리표처럼 매달려있던 불행은 잠시 숨죽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엄마의 생명을 앗아갔던 약물은 이제 그의 목덜미를 잡는다. 여기까지만 보면, 뻔하디 뻔한 스토리다. "약쟁이한테서 태어난 아이는 약쟁이가 된다"는. 사실 좀 지루하기도 했고. 그럼에도 도서관 대출 반납일이 다가왔기 때문에 최대한 부지런히 책장을 넘겼고, 마지막 페이지에서 이 책의 가장 큰 미덕과 만났다.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 루쉰의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를 선물 받았다. 지인은 첫 장에 "이 책을 읽던 시기에 내 인생의 부사는 '그럼에도'였다"며 내게 "너만의 부사를 찾길 바란다"고 말했다. 사실 그때는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지금은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내게 '그럼에도'는 '극복의 부사'다. 인생의 수많은 곡절과 혼란, 위기에도 우리가 삶을 이어나간다면 '그럼에도' 그 삶이 살아낼 의미와 가치를 지니기 때문일 거다. 물론 '그럼에도'는 완벽한 주문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라는 말이라도 없다면, 다음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까. 


데이먼의 '그럼에도' 뒤에는 '바다를 보고 싶다'가 따라왔다. 바다를 마주하러 가는 길은 혼자가 아니었다. 애팔래치아 산맥에 사는 힐빌리들의 비참한 현실을 냉소가 아닌 애정의 언어로 묘사한 바버라 킹솔버의 따뜻함이 짙게 배어나는 장면이었다. 그는 작가의 말 또한 "어두운 곳에서 매일 배고픈 채 깨어나는 아이들, 가난과 고통의 알약에 가족을 잃고, 담당관은 계속해서 그들의 서류를 잃어버리며, 투명 인간이 되었다고 느끼거나 투명 인간이 되고 싶다고 느끼는 아이들에게. 이 책은 너희를 위한 것"이라는 온기로 마무리한다. 


https://youtu.be/IVHe40IIcwU?si=DBZhASmznGKvrdJK


또 하나 인상 깊은 것은 역자 후기였다. "시끄러운 세상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은 "정치라는 영역 자체가 완전히 변질되어 기능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정치란 대화와 타협이 아니라 싸움의 장이 되었고, 좋은 정치인이란 공동체를 화합으로 이끌어가는 인물이 아니라 상대를 '썰어버리는' 싸움꾼이 되어버렸다"는 한탄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내 이름은 데몬 코퍼헤드>에서 과열된 선명성 경쟁 속에 부패하고 증발해 버린 정치의 영역을 복원하는 길, 폭력과 싸움이 아니라 말로서 공존의 길을 찾아갈 가능성, 덜 위험한 사회와 평화에 대한 희망을 본다"는 얘기로 끝맺는다. 역자 후기에서 이토록 공감 가는 사회비평을 발견할 줄 몰랐다. 


불안의 감각은 시공간을 가로지른다. 세계가 위험하다고 많은 이들이 절감하는 시대다. 이 모든 것은 괴물이 만든 지옥일까? 절대 빌런이 우리가 쌓아온 모든 것들을 파괴하고 있기에 이토록 무력하게 파국으로 나아가는 중일까? 민주주의가 흔들리는 곳곳에서 품고 있을 질문이다. 킹솔버는 그 답을 찾기 위해 집요하게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다만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것은 비록 불완전하고 미약할지라도, 또 비합리적일지라도, 다른 존재를 이해하려는 태도야말로 인류가 끝없는 전쟁과 아귀다툼 속에서도 절멸하지 않았던 힘이었음을 어렴풋이 느끼게 만든다. 


연대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고, 누군가를 설득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 줄곧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여전히 떨쳐내기 힘든 비관이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면, 지금 두 발을 딛고 있는 우리의 지옥은 결국 무지한 그의 탓도, 완고한 나의 탓도 아니란 점을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좋은 이야기는 결국 질문을 남긴다. '그럼에도'라는 부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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