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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갈릭 Dec 21. 2018

숨구멍

김영건, 당신에게 말을 건다

"언니는 문제 해결형인 거 같아." 이런저런 대화 끝에 나온 말에 '그런가?' 했다가 다음날 아침엔 '해결은 무슨, 문제를 만들고 있겠지'라며 혼잣말하는 요즘. 이럴 때일수록 마음에 자꾸 숨구멍을 콕콕 뚫어줘야 한다. 휘리릭 넘겼던 책장을 되새김질하는 것도 그런 방법 중 하나다.


<당신에게 말을 건다>는 엉겁결에 서점 사장님이 된 한 남자의 담백한 이야기다. 뭘해도 망하고, 동네 서점은 더 망한다는 시기에 울며불며 '나는 이렇게 버티고 있어요'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실 모두가 울면서 하루를 보내진 않는다. 그럴 수도 없다. 때론 짐승처럼 목놓아 울기도 하지만, 대개는 입술을 깨물거나 그마저도 없이 하루를 살아간다. 일상은 드라마도, 영화도 아니니까.


그래서 저자는 전화 한 통에 속초로 내려온 일부터 몇날 며칠 반품할 책들을 정리하고, 새로 들여온 도서 2만권을 분류하고, 관공서에 책을 납품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람이 인터넷 서점의 편리함과 방대함을 뚫고 나와 얼굴을 보여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이 책에서 나는 서점 주인 김영건씨의 얼굴을 어렴풋이나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책과 책 속의 동아서점에도 문득 문득 폭풍의 순간은 찾아본다. 아버지와 아들이 마주할 때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서점에서 꾸벅꾸벅 졸던 아버지, 사소한 엄격함으로 현실에서 고개를 돌리고 싶은 아들. 김영건씨는 이 모습을 두 사람의 불화보다 자신의 화에 가깝게 묘사하고 있지만, 진짜는 불화와 화 사이 어디쯤일 것 같다. 나 역시 부모에게 그러하듯.

두 사람이 세 사람, 그리고 네 사람이 되어가며 서점의 이야기는 계속 된다. "그렇게 많은 순간 나는 실패하지만, 여전히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저자의 말처럼, 미련해서 자꾸 문제를 만드는 나도 아직 희망을 버리지 못한 것 같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날, 조금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다시 숨이 차오르고 있지만, 또 한 번 크게 내쉬어볼 길을 찾아야겠지.

5쪽) 그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늦은 밤 한두 시경에 잠시 커피를 마시며 앉아 있었다. 주위는 전부 어둠에 묻혀 있고 오직 우리 서점 안만 환하게 밝았는데, 그 순간 절해의 고도에 떨어져 책의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단다. 이상하게도 고단한 심신에도 불구하고 편안함과 안도감이 들더구나.


... 정말 내 얼굴을 보고 책이 연상된다면, 이 직업이 내게 꼭 맞는 옷은 아니더라도 이제는 활동하기에 불편하지 않고 내게도 그런대로 잘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 아들아. 그동안 여러 가지 부족했거나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들을 조금 늦은 이제부터라도 잘해보고 싶고, 무엇보다도 네게 도움이 되고 싶구나. 나는 사랑하는 내 아내와 예쁘고 사랑스러운 손주들, 또 곧 태어날 네 아이와 함께 살아갈 날을 기다리며 지방의 작은 서점에서 백 년 서점을 꿈꾸며 살아갈 것이다. 내 기력이 다할 때까지 네 옆에서 자리를 지킬 수 있게 해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구나. 아들아. 네가 곁에 있다는 것이 나를 이렇게 즐겁고 기운차게 한단다. 우리 앞으로도 잘 견디자꾸나.


23쪽) 베르세르크 중에서 :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


그렇다. 나는 도망치려고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내 안의 막막함으로부터, 막막함 속의 나로부터. 


더욱이 심각한 문제는 도망칠 곳이 천국일 것이라는 기대 없이 그랬다는 점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나는 서점의 상황이 어떤지 업계 종사자만큼은 아니더라도 비교적 냉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쩌다 보니 속초에 가서 서점을 하기로 했다.


뭐, 좋다. '천국에 대한 기대'는 온데간데없으니, 대신 그 빈자리를 다른 무엇으로 채워야 할 것이다. 

다른 무엇이라고 하면?

일단은 책, 물론 책일 것이다.


49쪽) 확실한 건 그 일로부터 서점에서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한 가지를 배웠다는 것이다. 바로 이 많은 책이 대수롭지 않게 왔다가, 아무렇지 않게 가버리는 게 아니라는 것. 이 많은 책이 오고 가려면 내 작은 몸뚱어리 하나 주저앉도록 굴려야 한다는 것. 


79쪽) 결과적으로 행운인지 불행인지, 나 같은 게으른 인간에게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 결과는 꽤 복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상 소식을 뒤늦게 듣고 책을 주문하려고 보니, 아뿔싸. 출간된 책이 자서전 한 권밖에 없었다. 그렇다. 밥 딜런은 뮤지션이다.


84쪽) 도서 납품은 한 건에 커다란 규모의 돈을 서점에 벌어다 준다. ... 서점업계가 불황이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 이 같은 불평할 여유가 있다면, 지금 당장 라벨을 붙이자. 그리고 도장을 찍자.


86쪽) 나는 보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오후에 시립도서관에 가서 책을 분류하고 꽂았다. 그동안 서점은 아버지 혼자 맡았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냐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다시 그렇게 할 수 있을지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우린 그냥 그렇게 했다. 서점을 얼마간 지속해나갈 수 있는 넉넉한 경제적 도움을 주는 일이었다. 싫든 좋든, 바로 그래서 우린 그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단단한 정신력과 튼튼한 체력도 때로는 금전으로부터 비롯한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91쪽) 나의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목표는 '서점발 베스트셀러'보다도 손님들로부터 "최소한의 답장'을 받는 일이다. 베스트셀러만 소개하고 잘 팔릴 것 같은 책들만 진열했다면 아마 묻혀버리고 말지도 모르는 책. 그렇게 묻혀버리고 말기엔 아까운 책. 그런 책들을 손님들에게 어떻게 소개해야 그들로부터 응답을 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당신이 이 목서리를 듣고 책을 펼칠 수 있을까?


97쪽) 이 책, 정말 추천해도 되는 것일까? 이 책을 추천하고 나서도 나는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 추천하기 전에 마지막 한 번 망설이는 일. 잘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좋지만, 한 번쯤은 멈춰서 망설이며 자문해보는 일. 거창하게 말해서 이것을 책 추천에 관한 윤리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서점을 방문한 손님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한 가지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저 진열에도 매 순간 조촐한 망설임들이 책 아래에 꾹꾹 눌려 있다는 것이다.


103쪽) 책 뒤에 새겨진 가격 말고도 다른 무언가가 눈에 어른거린다면, 책에 대한 당신의 그 애정 어린 마음 덕분에 우리 서점은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106쪽) 시간이 차츰 쌓이며, 어떤 책들은 주문하면서 일찌감치 그 책을 구매할 손님이 머릿속에 그려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자주 방문하시는 손님들에 한해 그러한데, 그 한 분 한 분의 책 구매 역사가 어쩔 도리 없이 내 기억에 새겨지기 때문이리라. 그렇다. 빅데이터도 아니고 엑셀도 아닌, 오로지 나의 머리 한편에 각인된 기억의 힘으로 나는 손님들을 대신해 그분들이 '구매할지도 모를' 책들을 예약한다. 그것을 나는 '나 홀로 예약제도'라고 부른다.


133쪽) 서점을 새로 가꾸며 나는 '매장에선 절대 음식 섭취 금지"라는 강령을 내세웠다. ... 잠깐 마시는 커피조차도 손님의 눈에 띄게 하지 않으려고 뒤편에 숨겨두곤 했다. 마치 그렇게라도 하면 쇠락의 길로 접어든 옛 서점의 기억을 잊을 수 있는 것처럼. 모두가 얘기하는 '서점 불황기'로부터 애써 고개를 돌릴 수 있는 것처럼. 나는 현재의 우리에게 빡빡하고 엄격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161쪽) 그렇게 많은 순간 나는 실패하지만, 여전히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165쪽) 방문한 이들로 하여금 하나 이상의 결실은 맺을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고지식하게도 그 답을 맥주도 커피도 아닌 책에서 찾고자 발버둥치고 있다.


179쪽) 불 꺼진 서점, 캄캄한 고요 속에서 아내가 오늘은 치킨을 먹자고 말한다. 나는 신이 나서 그만 사들인 책이 든 가방을 앞뒤로 흔들었다. 인생이 농담을 하면 우리는 책을 산다.


198쪽) 오직 서점에 관해서만 쓰고자 했는데,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당신에 대해 쓰고 있는 저 자신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기에 당신께 이 두서없는 편지를 남깁니다. '서점'이라는 세월 앞에 강을 건너고, 간극을 넘어서야 하는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 바로 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라는 배를 타야만, 당신의 존재를 제 몸에 지녀야만 그 간극을 넘어 비로소 서점에 다다를 수 있음을, 이렇게 뒤늦게라도 깨닫게 되어 다행입니다.


... 아버지. 앞으로도 부디 오랫동안 서점에 계셔 주세요. 오래오래 제 곁에 있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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